Return to super rich! RAW novel - Chapter 123
– 124화 –
2000년 11월.
21세기가 시작된 게 벌써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훌쩍 흘러 11월이 됐다. 그걸 증명하듯 무더위도 사라졌고, 이제는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느낌이 났다.
후우 –
그걸 증명하듯 내뿜은 날숨에 입김이 서렸다.
‘… 벌써 11월인가, 시간 참 빠르네.’
이른 새벽. 이민욱은 제 입김을 바라보며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하지만 늑장을 부렸다간 지각을 할 게 분명할 터. 그는 재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원룸이 가득한 길을 내려가, 마치 정어리가 무리에 합류하듯 그는 다들 바쁘게 출근하는 직장인 행렬에 끼었다.
이후 부지런히 걸어 지하철에 몸을 올렸고, 언제나 그렇듯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덜컹- 덜컹- 쉬리리리리릭-
귀에는 지하철 특유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샤락- 사라락-
코에는 앞에 있는 여자의 덜 마른 머리에서 샴푸와 섬유유연제에 옅은 향수 냄새가 섞여 났으며,
부비적- 부비적-
등에는 뒷사람에게 밀려 억지로 닿은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평소와도 같은 출근길이었다.
‘…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익숙해졌다.’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온 지 벌써 9년. 대학을 졸업한 뒤 어느 중견기업에 취업해 직장이 됐다.
물론, 지금 생활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억지로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내년이면 나도 벌써 서른인가.’
서른. 참 묘한 나이였다.
어찌 보면 인생의 반도 못 온 젊은 나이였고, 사회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때였지만… 스물아홉의 민욱에게 있어 서른은 뭔가 커다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됐는데,
아직 해야 할 게 많이 남았는데,
강제로 어딘가에 떠밀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뭐 어쩌랴. 시간은 잡는다고 잡히는 것도 아니니, 다른 사람들처럼 맞이해야지. 지금 이런 고뇌 또한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 되리라.
‘… 추억이라. 어렸을 때 생각나네.’
추억이라 하니 문득 중학생 때 친구들이 떠올랐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죄다 같은 반이 돼서 항상 몰려다녔던 녀석들. 하지만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면서 연락이 드물어지게 되는가 싶더니, 지금에 와서는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다들 잘 지내려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문득 민욱의 눈에 지하철 상단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 그때 그 친구, 뭘 하고 있을까?
– [디움 동창회]에서 찾아보세요!
전지혜가 활짝 웃으며 찍은 광고였다.
‘한번 찾아나 볼까. 디움이면 나도 ID 있긴 한데…’
…
그날 밤.
언제나처럼 야근에 시달려 오후 10시쯤 돼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몸이 꼭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무거워 당장에라도 잠들 것만 같았지만, 그럼에도 민욱은 TV를 켜며 맥주캔을 깠다.
치익 – ! 벌컥- 벌컥-!
“크으으으으! 하… 진짜 이 맛에 산다.”
식도를 따라 쌉싸름한 맛과 함께 탄산이 들어간 주류 특유의 상큼함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쓴 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궁금했는데, 이제는 저거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 버렸다.
–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스타 서바이벌! 동고동락!
– 서바이벌 동고동락은 같이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한 명씩 떨어지는 서바이벌 게임입니다! 저는 MC를 맡은 유지석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민욱은 그 프로그램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박장대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시간 남짓한 예능 프로그램이 끝나자 뭔가 기묘한 공허함이 몰려들었다. 마치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저주에 걸린 고대 그리스의 에릭 직톤처럼, 그도 잘 시간만 되면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분명 몸은 정말 피곤함에도…
이상하게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일 출근하는 게 싫어서인지,
온종일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우울증 같은 병에 걸린 건지는 몰랐다.
어쩌면 저 셋 중 하나일 수도,
아니면 저 셋 모두 아닐 수도,
혹여나 저 셋 모두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유 따위 뭣이 중하랴.
그저 지금 이 순간이 공허한 게 중하지.
칙- 칙- 화르륵-
스으읍- 파스스- 후아-
이제 45일 남짓이면 서른이 되는 시점.
민욱은 문득 어렸을 적을 떠올렸다.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고, 하교 후엔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거나 문방구 앞에서 쪼그려 앉아 오락을 하던 그 시절.
그땐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뭘 해도 그닥 기쁘지가 않았다.
이것 또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른 따윈 안 되는 게 좋을 텐데…
조금 정도는 더 청년으로 남아있어도 될 텐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더라?’
생각을 뒤져 봤으나, 흐릿했다. 꼭 자기 미래처럼.
그렇게 한참이나 창밖. 정확하게는 3M 거리밖에 안 되는 건너편 건물을 보고 있기도 잠시. 민욱은 문득 아침에 봤던 광고가 떠올랐고,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인터넷에 들어갔다. 그러자…
– **년도 두리중 졸업생 [3학년 6반]
혹시나 싶었던 자기가 다녔던 학교가 개설되어 있었고, 심지어 카페까지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있었네.’
민욱은 피식 웃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잠시.
거의 10년 만에 보는 동창들은 훑다가, 이내 가까운 시일 내에 동창회가 잡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 갈까?’
하지만 망설여졌다. 이번 달은 경조사가 많아 용돈도 빠듯했고, 저축을 생각하면 돈을 아껴야만 했지만…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
며칠 후. 민욱은 오래간만에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저 그뿐인데도, 오래전에 묻어뒀던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에서 내려 복잡한 버스를 타고 도착한 동네는 어렸을 적 그대로였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시간이 멈춰있던 것처럼 말이다.
매일 약속했던 것처럼 모였던 문방구,
어렸을 적엔 그렇게나 가기 싫었던 학교,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항상 같이 놀았던 놀이터,
망하고 중국집이 된 오락실 등을 얼마나 훑었을까?
약속 시각이 됐기에,
동창회가 잡힌 술집으로 들어가자…
– 어? 저거 이민욱 아니냐!?
– 와! 야! 얼마 만이냐! 잘 지냈냐!?
– 하, 새끼! 온다면 말을 좀 하지! 몰랐잖아!
중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격하게 환영해 줬다. 비록 이제 다들 곧 서른이 되어가는 녀석들이었지만, 어째 지금 봐도 똑같았다.
“야! 이 병*들, 어떻게 너희는 시간이 지나도 똑같냐!?”
“하, **끼. 지는? 크크큭, 너도 똑같아 븅*아. 근데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서울 가더니 연락 뚝 끊기고.”
“하하… 뭐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새끼, 군대 가고 나서 연락 끊겨서 뒈진 줄 알았다.”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민욱의 잔에 술을 채워줬다. 분명 굉장히 오래간만에 만났음에도, 어제 만난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아마 부담을 주지 않으려 그런 것이리라.
동창회 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왁자지껄한 사이로 과거 추억들이 오갔고…
– 하, 야 난 저 새* 처음 봤을 때 완전 개또** 새*줄 알았다니까? 기억나냐? 왜 플라스틱 우유 박스 있잖아? 그걸로 비탈에서 타다가 자빠져서 구른 거.
– 그때 저 븅* 저거, 얼굴 싹 다 갈렸잖아 크크큭. 얼음 비탈에 붉은색 궤적 쭉 그어지는데 난 쟤 그때 뒤진 줄 알았어. 나 119 처음 불러 봤다니까 진짜, 깔깔깔.
– 하, 지난 일을 왜 또 꺼내실까. 그러는 지는? 담배 피우다 담탱이한테 걸려서 1교시부터 6교시 끝날 때까지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 불려가서 처맞았잖아. 크크크…
그 사이로 민욱은 봄꽃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회색빛 일상에서 벗어나 어렸을 적 봤던 동화 속 세상으로 돌아간 느낌이 이러할까? 물론, 동창회 자리가 그렇듯 서로 제가 잘났다고 자랑하기 바쁜 녀석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민욱의 눈에는 즐겁고 아름다운 게 먼저 들어왔다. 행복할 시간도 없는데 그런 거 봐서 뭐하랴.
– 야, 야. 다 필요 없어. 닥쳐봐. 뭐니뭐니해도 제일은 이민욱 아니냐?
민욱은 술을 마시다가 반쯤 뿜어낼 뻔했다.
“야, 갑자기 잘 가다가 내 얘기가 왜 나와?”
“저 새* 저거, 김아영한테 고백한다고 여자반에 고백한다고 갔다가… 체육 시간 전에 애들 옷 갈아입는데 문 열었잖아. 난 저놈 실내화 주머니로 처맞던 거 아직까지 기억난다. 너 이 새* 넌 그때 수갑 찼어야 돼, 임마. 그때 이후로 저놈 별명이 아마 범죄자였지, 아마?”
“아, 미친놈아! 그 얘긴 왜 꺼내!”
민욱은 말로는 싫다고 해도 입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다 지난 일이라 이미 다 추억이 되어 있었기에. 그렇게 으레 남자들이 그렇듯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있기도 잠시.
“야. 근데 현웅이 어떻게 됐냐? 오늘 안 왔네?”
민욱이 예전 친구 중 한 명을 묻자,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걔… 백혈병 걸렸다.”
“아… 미안하다.”
“아냐, 네가 미안할 게 뭐 있냐. 걔 그래도 골수 이식받고 회복 잘해서 집에서 요양하고 있어. 아직 면역력 때문에 밖에는 잘 못 다니는데, 나름 잘 지내더라. 요즘 인터넷에 푹 빠져있던데? 우리 동창회 사이트 관리자가 걔야.”
“그래도 다행이네. 많이는 안 아픈 것 같아서.”
하지만 으레 이런 자리가 그렇듯, 무거운 화제는 금방 날아가고 과거 추억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만났기에, 짧은 밤사이에는 다 풀지 못할 이야기보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얼마나 술을 마셨을까? 시간이 늦어져 갈 사람은 떠나고, 이내 자연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
사회생활에서의 침묵과는 다른,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편안한 침묵이 말이다.
민욱은 그 포근함 속에서 자기가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 그러고 보면 인생 참 앞만 보고 달렸네.’
고등학생 무렵부터였을까?
부모님의 강력한 주장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항상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처럼 세뇌를 받았다. 그래서 꼭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공부했고, 그 결과 나름 괜찮은 서울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고 1학기가 끝났을 무렵.
문득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바보는 아니었기에 대학만 들어가면 동화 속 이야기처럼 모든 일이 뾰로롱- 하고 해결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여태까지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는데,
마치 양계장 속 닭처럼 책상에만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광활한 자유와 기회가 떡 떨어졌다.
– 이제부터 넌 자유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할 수 있는데.
내게는 무한한 기회가 있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그 광활한 자유가 오히려 목을 조른 거였다.
평생을 굴속에 살아온 사람에게는 뻥 뚫린 하늘과 평야는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민욱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자유를 제 손으로 포기했다.
그저 고등학교 때 했던 것처럼 뭔가를 공부했고, 교수가 하는 말을 녹음까지 하며 달달 외워 시험지에 그대로 옮겨 적어 좋은 학점을 따냈으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영어도 공부하고 자격증도 땄다.
그렇게 얻은 직장이 바로 지금의 직장이었다.
딱히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너무 많은 걸 잃어버린 것 같다…’
지금 이 동창회에 와서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옛 친구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참 바보처럼 살아왔구나, 라고 말이다.
행복.
그거 정말 별거 아닌데.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데.
정작 내가 등만 돌리면 동화 속 세상처럼 그대로 남아 맞이해줄 친구들과 돌아갈 곳이 있었다.
‘… 앞으론 바보처럼 살지 말아야겠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소중한 것도 챙기며 가자.’
크응-
맥주와 함께 복잡한 감정을 넘기기도 잠시.
옆에 있던 친구놈 하다가 이쪽을 스윽- 보는가 싶더니…
“야? 워메? 너 우냐? 울어? 풉?”
“뭐, 뭐? 이 새*야. 울긴 누가 울어!”
“얘들아! 민욱이 운다! 이거 봐라, 크크큭!”
“안 울었어 븅*아!”
“에이~ 지랄한다~ 눈가가 시뻘겋구만 뭘? 오구오구, 우리 민욱이 친구들 오래간만에 봐서 좋았쪄염~?”
오래간만에 등장한 건수에 얼쑤 좋구나 물어뜯는 친구들을 보며 민욱은 버럭했다.
“에이, 씨! 미친놈들아! 안 운다고!”
“아~ 예~ 그러시겠죠~ 우리 민욱이 꼬추 떼라~ 야! 그나저나 PC방 안 갈래? 요즘 디아 재밌던데? 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친구들은 이내 다 같이 오락하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욱 역시 거의 이끌리듯 그 대열에 합류했다.
마치 어렸을 적 우르르 몰려다니며 축구를 하거나,
오락실에서 다 같이 오락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민욱은 그렇게 친구들과 밤거리를 걸으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창회… 오길 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