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uper rich! RAW novel - Chapter 675
– 676화 –
길었던 전쟁이 끝났고, 언제까지나 대한민국 재계의 정점을 지킬 것만 같던 대영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에 더해 폭군이던 마광위는 감옥에 들어갔고, 그의 장남 마병수는 강박에 쫓겨 불안정해졌으며, 차녀인 마예라는 새로운 왕국은 건설해 제 꿈을 이어나갔고, 준성의 회귀에 방아쇠가 된 마병수는 폐 가득 바닷물을 머금었다.
가히 완벽한 복수가 이러할까?
10년간 계획했던 것만큼.
너무 과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딱 적당할 만큼의 향신료가 들어간 담백한 승리였다.
그럼에도 준성은 여기서 멈출 생각 따윈 없었다.
‘경영에 있어 경쟁은 필수불가결이다. 그저 큰 산을 하나 넘었을 뿐이야. 아직도 세계 각지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경쟁자들이 너무나도 많아.’
이유? 뭐 별것 있으랴.
경영자는 참치 같은 족속들이다.
이는 준성 역시 똑같았고 말이다.
그러니 작은 승리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어가기보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옳겠지.
물론, 그렇다고 큰 전쟁이 끝난 뒤 아무런 휴식도 없이 바로 전력질주를 시작할 생각 따윈 없었다. 본디 전통적인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들 휴식기를 가지며 내정과 군을 정비하듯. ND그룹 역시 그럴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에 준성은 여태까지 본인이 직접 대영 건을 처리하며 한동안 제 손이 닿지 않았던 기업들을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훑어보기로 마음먹었고···
그 사이 시간 역시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
··· ···
··· ··· ···
1997년 한국에 진출한 일본 저가 커피 기업인 도토루에서 파트 타이머로 시작해, 지금에 이르러선 글로벌 기업인 네스트의 사장까지 오른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뿐이랴?
기업의 제일 아래인 시간제 근무자부터 사장까지 오른 그의 일화는 여러 식품 기업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 이에 한동안 프랜차이즈 기업들이 네스트를 롤모델 삼아 현장 출신 의사결정자를 등용하는 일이 잦아질 정도였다.
그에 더해 세계 언론에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재민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커피 프린스]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다. 뭐, 재민은 싫어했지만.
물론, 저 명성으로 인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디 기업의 세계는 철저한 실력주의다. 일반 직원과 다르게 임원쯤 되면 이직이 매우 활발해지는 편이었다. 비단 서양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말이다.
이는 임원이라는 자리 자체가 고용이 아닌 계약 형태(직원이 임원으로 승진 시 퇴직금을 모두 정산받음)였기 때문이거니와··· 철저히 실적으로만 평가받기에 실수 하나만으로도 잘리는 일이 빈번했고, 혹 반대의 경우엔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받는 일이 잦았으니 말이다.
까닭에 김재민에게도 러브콜이 쏟아졌다.
하긴, 어찌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무려 세계 커피 시장의 선두인 네스트의 사장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온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특이하게도 재민은 그 어떠한 조건에도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다.
이에 어느 날 준성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얼마 전 던킨에서 CEO 제안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연봉 3,000만 달러(07년 10월 환율 기준 약 270억 원)에 옵션도 괜찮던데, 왜 안 가셨습니까?”
혹 떠날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 찔러 본다기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참고로 저 연봉이 현재 김재민이 받는 연봉보다 1.5배 정도 높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건 왜 물어보시나요?”
이에 재민이 의도를 파악하곤 픽 웃으며 되묻자,
준성은 별것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저라면 갈 것 같아서요. 경영자에게 명예와 연봉을 빼면 뭐가 남습니까? 던킨이면 나름 괜찮은 회사기도 하고요.”
매우 솔직하기 그지없는 답변. 덤으로 떠난다 한들 잡지 않을 것만 같은 말투였던 탓일까? 재민은 뭔가 원하던 반응이 아니라는 듯 ‘흐음-’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 보신 것 같으니 저도 있는 그대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던킨이 네스트보다 나은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아직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서요.”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에 이번엔 준성이 갸웃거렸다.
“겸손이 과하신 것 아닙니까, 커피 프린스?”
농을 섞어 던진 준성의 말에 재민이 잠시 눈을 꽈-악 감은 채 3초 정도 침묵했다. 그 모습이 채식주의자가 제 밥상에 올라온 육회 내지는 산낙지를 보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왤까.
참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다.
“··· 제가 그 별명 싫어하시는 거 아시면서도 꼭 놀릴 때마다 그러시네요. 어쨌든. 대표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네스트의 주요 전략은 모두 윤일남 이사님과 대표님께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두 분이 없는 곳에서 과연 제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드는 게 사실이고요.”
뭐, 엄밀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일남과 준성이 유독 뛰어난 경영자였을 뿐. 그게 재민이 모자란 사람이란 얘기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역량이 부족했다면 준성이 ND그룹의 지주회사 사장 자리에 김재민을 앉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어딜 가도 제 몫을 해낼 사람이기는 했지만··· 딱히 그걸 짚어주거나 알려 주지는 않기로 했다.
경영자에게 있어 적당한 열등감은,
좋은 동기 부여가 됨을 잘 알았기에.
“저는 대표님 아래에 더 있을 생각입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도 한참 남았고요. 그러니 휙 던지듯 버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철석같이 달라붙어 있을 거니까. 고용했을 땐 자유였을지 몰라도, 해고할 때는 아니거든요.”
씨익 웃으며 말하는 재민의 말에,
준성 역시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다면야 언제든지. 하지만 제 교육 방침은 실전주의라 매우 엄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실컷 깨질 텐데.”
“하이고, 언제는 안 그러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 말에 준성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기도 잠시.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문득 재민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이에 준성도 그걸 꽉 붙잡고 대답했고 말이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여태껏 온갖 험난한 일을 함께 넘어왔기에,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했으니까.
이후 재민은 다시금 일터에 복귀.
언제나처럼 제 몫을 해내며 네스트를 이끌었다.
그렇게 처음 만날 때만 하더라도 샛노란 병아리 같던 경영자는 지금에 이르러 늠름한 투계가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준성에게 영향을 받은 걸까?
그는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몇몇 학자들은 말한다.
닭이 공룡의 후손이라고.
과연 재민은 공룡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를 뛰어넘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준성은 ‘닭이 공룡으로 변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같은 실 없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저어내며 털어냈다.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나와 재민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아. 그러니 옆에서 직접 정성 들여 가르치며 지켜보면 되겠지.’
*
네스트의 사돈이자,
든든한 동맹인 [동남그룹]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대영과의 전쟁 과정에서 네스트의 동맹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카제인 나트륨 파동]과 [공정위의 악의적인 조사]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그걸로 동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대영과의 전쟁이 끝난 후 대영 경영권 분쟁에 참여한 것에 대한 넉넉한 보상을 받았고, 추후 이를 설비에 재투자하며 더욱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덤으로 동남은 처음 네스트와 연합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한국 인스턴트 커피의 왕’이자 그저 그런 로컬 브랜드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후 김재민이 부마 노릇을 하며 여러 공동 사업을 진행. 동남은 [캡슐 커피] 외에도 [네스트 인스턴트 커피]를 세계 각지에 유통하는 어마어마한 대기업이 됐다.
그에 더해 이러한 폭발적인 해외 진출로 인해 원래 동남이 다루던 다른 상품들 또한 수요 견인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됐고, [아시아의 네슬레]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비록 아직 인스턴트 왕국인 일본의 기업들과 폐쇄적인 환경과 정부의 드라이브로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기업들을 모두 짓누를 순 없을 정도였지만···
딱히 걱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미 네스트가 커피 프랜차이즈 산업을 정벌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동남 역시 그 낙수효과로 인해 어느 정도 수익을 챙겨가게 될 터.
그에 더해 원래 식품 산업의 싸움은 다른 산업과 다르게 매우 느리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물리적인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본래 산업마다 각기 다른 싸움법이 있는 법이니까.
여담으로 김재민의 처(妻)인 류수연은 언제나처럼 본인의 일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했다. 비록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워낙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마예라와 함께 대한민국 여성 경영자 랭킹 상위에 당당히 입성. 이후 네스트와의 협업을 이끌었다는 공로로 유력한 미래의 동남그룹 회장 후보로 거론됐다.
이는 동남이라는 기업 자체가 직계와 방계를 비교적 덜 차별(어디까지나 ‘덜’이다, 아예 없지는 않다)하는 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까닭에 수연은 세간의 평가나 사내 정치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언제나처럼 커피 빛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업무 전선에서 활약했다.
준성은 그런 동남을 이렇게 평가했다.
‘동남, 참으로 좋은 기업이지. 그들과 손을 잡은 건 정말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네스트와 동남의 관계적인 특성상 후방 지원에 특화된지라 얼핏 하는 게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생산력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됐어. 그들은 우리의 혈맹이다.’
*
[네스트]의 이사이자,훌륭한 자문이던 [윤일남]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게 갑작스럽다거나 뜬금없지는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얘기를 들어왔고,
다들 언젠가는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담백하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늦가을의 어느 저녁.
윤일남은 문득 준성을 옥상으로 불러냈다.
본디 사람은 살다 보면 뭔가 초인 같은 감각으로 ‘아, 올 게 왔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는 법. 준성 역시 호출을 받은 순간 무언가를 느끼곤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옥상으로 향했다.
덜컹 – 끼이익 –
스와아아아-
두꺼운 철문을 열자,
쓸쓸함을 머금은 바람이 불기도 잠시.
이내 시야로 난간 앞에 선 일남이 들어왔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퍽 무겁게만 느껴지는 걸음을 얼마나 옮겼을까?
인기척을 느낀 일남이 제 시선을 석양이 지고 있는 하늘에 고정한 채. 손만 뻗어 들고 있던 커피잔을 하나 건넸다.
슬쩍 살펴보자 초창기 네스트 테이크 아웃 컵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일남이 딱 들어왔을 무렵에 사용되던] 디자인이었고 말이다.
“··· 그리운 디자인이네요.”
“네-에, 시간 참 빠르지요?”
그러고 보면 항상 그랬다.
마치 사람의 삶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기쁠 때는 너무나도 빠르게,
힘들 때는 너무나도 느리게.
하지만 항상 부지런하게.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본디 생명체는 그 시간을 살아가며 무언가를 남기는 법. 그게 호랑이처럼 가죽일 수도, 위인처럼 이름일 수도 있겠지. 이에 준성은 그 긴 시간 동안 일남이 무엇을 남겼는지 아주 짧게나마 고민해 봤지만··· 쉬이 답을 낼 수 없었다.
이유? 간단했다.
너무나도 많았기에.
일남은 준성이 바쁠 때마다 네스트가 가야 할 길을 쉽게 짚어줬고, 심지어 재민을 교육하기까지 했다.
때로는 경험에서 묻어 나오는 연륜으로, 때로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지나오며 단련된 경험으로 말이다.
까닭에 지금에 와서는 네스트의 핵심 산업 중 그의 손이 단 하나도 닿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나 많은 것을 바꾼 일남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많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준성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넥타이,
낡았지만 아직 한창때인 중절모,
여전히 믿음직한 양복과 구두,
클래식한 멋을 뿜는 가방까지.
그 모든 게 처음 봤을 때와 모두 똑같았다. 그저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면 일남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흐름 뿐. 꼭 나이 대신 멋을 먹어가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늙었다.
호록 – 후우 –
준성은 건네받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곤,
주황빛으로 물드는 석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 윤 이사님께서 여기로 부르셨을 때, 대충이나마 무슨 말씀을 하실지는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제 불길한 예측이 맞았나 보네요.”
일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했다.
“··· 제 욕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직 네스트에는 윤 이사님이 필요합니다. 비록 세계 1위가 됐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니까요. 스타벅스는 상처를 치료하며 시장 탈환을 노리고 있고, 맥도날드 역시 내정이 안정되면 머지않아 던킨과 네스트 측에 싸움을 걸어올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네스트가 커피 프랜차이즈 산업의 정점이 됐지만, 본디 경영에서의 순위는 유동적인 법. 언제 어떻게 뒤바뀔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일남 역시 그 사실을 아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딱 거기까지였을 뿐. 제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준성 대표.”
“··· 예.”
“내 꿈이 뭐였는지 압니까?”
알다마다.
어렸을 적에는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며 황폐해진 한국에서 자라며 ‘우리도 미국처럼 맛 좋은 과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젊었을 적에는 지금은 타계한 티아라의 전임 회장과 함께 ‘세계 최고의 과자를 만들자’는 꿈을 꿨으며···
비틀린 부정으로 인해 믿었던 티아라의 회장에게서 축출된 이후엔 본인을 믿고 따라온 정예병들을 데리고 쟈르뎅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커피를 만들자’라는 꿈을 꿨다. 이는 쟈르뎅이 네스트에게 합병된 뒤에도 똑같았고 말이다.
“··· 세계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거였죠.”
그 말에 일남은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나이가 잔뜩 들었지만, 일 얘기를 할 때만큼의 그는 아직도 꿈꾸는 소년처럼 보이는 건 왤까. 아마 이는 그가 마음에 품은 열정이 아직도 따뜻하다는 증거이리라.
“네. 그랬었죠. 근데 이제 그 꿈을 이뤘습니다.”
일남은 이후 본인이 들고 있던 컵을 보라는 듯 스-윽 내밀었다. 준성이 들고 있던 컵과는 다르게, 최근 점유율 1위 달성으로 만든 이벤트 컵이었다.
저 컵을 보자 준성은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스타벅스를 이겼다는 쾌감이 다시금 솟아오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씁쓸함 역시 피어올랐다.
“있잖습니까, 이 대표. 나는 평생 꿈과 희망의 노예였습니다. 마치 ‘정점’에 굶주리기라도 한 것처럼. 위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달려왔어요. 그리고 오랜 노력의 시간 끝에 드디어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강철같던 노인의 진심과 함께,
어렴풋했던 끝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준성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얘기했었지요? 나는 여태껏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적은 사람입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지요. 꿈을 이루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다행히 좋은 사람과 좋은 기업을 만나 시간 안에 목표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
마음 같아선 떠나려는 일남을 붙잡고,
더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준성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법입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처럼. 내 인생 역시 해가 뜨고 해가 지겠지요. 하지만 저 석양을 보세요.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나는 내 삶 역시 저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곧 차갑고 어두운 밤이 오기 전에. 내 삶이 아직 아름다울 때 떠나야지요.”
“···”
애간장이 끓어오르고,
아이처럼 붙잡고도 싶었음에도,
하지만 그럼에도 준성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는 내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 몸은 낡은 수레에 가죽끈을 엮어 억지로 끄는 것과 같아요. 머지않아 마지막 불꽃을 다 태우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야겠죠. 그럼 분명 추해질 겁니다. 티아라의 회장이 그랬듯. 뒤틀린 사람이 되어 회사에 누가 될 거예요. 나는 압니다. 박수 칠 때 떠나지 못한 사람의 최후를. 끝까지 권력을 탐하던 사람의 최후를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
그의 말을 모두 부정해,
논리로 설득하고 싶었지만,
준성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제 나의 길은 여기서 끝이 날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스트의 길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준성 대표와 김재민 사장이 나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의 자취가 네스트에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
일남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준성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그를 잡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헌신한 그의 노력을 짓밟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리고 그가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었기에.
슬픔을 머금은 침묵이 얼마나 길게 이어졌을까?
일남은 커피를 호록거리며 준성을 쳐다보곤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 마음이 복잡해서요.”
“허허허-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나는 네스트와 함께하며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퍽 행복한 삶이지 않았습니까? 즐거운 싸움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준성 대표도 웃으세요.”
준성이 일남을 쳐다보기도 몇 초.
아직도 눈에는 여전히 슬픔을 잔뜩 머금었지만,
여태까지의 행복을 담아 입에는 미소를 그렸다.
일남의 말마따나,
여태까지 퍽 행복한 삶이었으니까.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으니까.
스윽 –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일남은 머잖아 제 품에서 한자로 ‘사직서’라 적힌 봉투를 내밀었고, 준성 역시 그 청을 허한다는 듯 그걸 받아 제 가슴 속에 품었다.
그러자 일남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주어서.”
이에 준성은 본인 역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고마웠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셔서.”
그렇게 과자로 만든 호랑이,
윤일남이 네스트를 떠나 은퇴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오랫동안 메뉴얼로 남아,
위기 때마다 네스트를 수호신처럼 보호하리라.
여담으로 준성은 윤일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일남(一男)이라는 이름답게, 최고의 사내였다.’
*
일남의 은퇴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아무래도 워낙 커다란 영향을 남겼기 때문일까?
그가 짐을 정리해 떠나던 날.
네스트 내의 많은 직원이 그를 배웅했다.
당장 그룹의 총수인 이준성부터 시작해서,
도제이자 아들과도 같았던 김재민 사장에,
소위 윤일남 라인이라 불리던 사람들,
그리고 일남이 직접 키운 직원들까지.
그들은 모두 일남이 가는 길을 배웅해 줬고, 일남 역시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말해 주며 덕담을 건네줬다.
– 그래, 민 부장. 고생 많았어. 요즘 머리가 자꾸 빠지는 것 같은데, 슬슬 관리해야 해. 안 그러면 고생한다.
– 김희지 과장. 처음 봤을 땐 애 같았는데 이제는 늠름한 커리어 우먼이 됐구만.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가는 길 안심하고 편하게 갈 수 있겠어.
– 김 대리. 자네는 일이야 뭐 워낙 잘하니, 슬슬 결혼 준비해야지? 일도 좋지만, 가정도 챙겨야 하는 법이야. 원래 좋은 처가 있어야 가정이 화목해지는 법이거든. 곧 좋은 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네.
– 우 인턴.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다네. 본인 같은 젊은 피가 네스트의 미래라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가볍군.
직원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덕담을 나누는 그의 모습은 꼭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였기 때문일까?
평소 혼이 실컷 나던 직원들도. 일남에게 의지하며 많이 배운 직원들도. 모두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일남을 보내줬다.
그렇게 직원들과 얘기를 끝낸 뒤.
이내 일남이 준성과 재민 앞에 멈춰 섰다.
“이준성 대표, 자네와는 이미 할 얘기를 다 나눴으니··· 그저 건강만 하세요. 어차피 나 없이도 세계를 제패할 사람이니 나는 걱정 없이 전선에서 물러나 묵묵히 지켜보겠습니다.”
이에 준성은 피식 미소를 머금은 채 받아쳤다.
“글쎄요. 윤 이사님 같은 훌륭한 책사가 없다면 저도 고생 꽤나 할 것 같습니다. 지켜보시다가 영 답답하시면 돌아오시죠. 네스트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
“하이고, 이 늙은이를 얼마나 더 부려먹으려고 하는 겝니까? 이준성 대표는 다 좋은데 염치가 없는 게 문제에요. 아주 일하다 죽으라 그러시지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차마 말은 못 했는데. 우리 회사 복지에 묘비 만드는 것도 추가해야겠네요.”
“예끼. 나이 든 사람이나 놀리고. 못 씁니다, 그러면.”
그 말에 둘 다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기도 잠시. 일남은 이내 꼭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재민을 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김재민 사장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김재민은 약 10초 정도 침묵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 윤 이사님 없이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글로벌 기업의 사장치고는 매우 약해 보이는 말이었으나, 동시에 매우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재민은 여태 준성이 가르쳐 준 대로 잘 성장하긴 했지만, 언제나 일남이 옆에서 그의 약점을 메워 주지 않았던가?
근데 그 든든했던 백업이자 누구보다도 믿음직했던 사람이 회사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재민 입장에선 꼭 원래 타던 자전거에 안전장치가 사라진 기분이리라.
일남 역시 이를 너무나도 잘 알았는지, 마치 제 손주를 달래듯 인자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잘해 낼 겁니다.”
“···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저는 아직 제가 한참 부족해 보이는 걸요. 윤 이사님께도, 대표님께도.”
“있잖습니까. 살다 보면 가끔 관성에 취해 익숙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잠깐 쉬며 뒤를 돌아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멀리 왔다는 걸 깨닫는 일이 잦지요. 김재민 사장도 똑같습니다. 과거의 본인과 지금의 본인은 달라요.”
“···”
“내가 떠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 모두 김재민 사장의 가슴과 머릿속에 남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벽에 막힌 것 같았을 땐 그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분명 시간을 곱씹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니.”
“···”
“아. 그리고 영 걱정된다면, 본인이 받았던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시면 됩니다. 본디 뜻을 이어받는 자가 있다면 그 무엇이든 쉬이 사라지는 법이 없으니까요.”
“··· 예, 알겠습니다.”
재민은 여전히 잡고 싶은 눈치였지만,
딱히 그러지는 않았다.
이미 준성이 허락했다는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니와··· 그는 네스트 안에서 그 누구보다도 일남의 건강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스타벅스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 과로로 졸도를 하거나, 심지어 이유 없이 코피까지 쏟던 일남 아니던가?
그러니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를 잡는 건 오히려 건강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재민은 이를 꽉 깨문 채 슬픔을 이겨 내며 일남이 가는 길을 배웅. 이후 일남이 탄 차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일남이 완전히 떠난 뒤.
준성은 돌하르방처럼 선 재민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 네. 아마도요.”
“조금 불안한 대답이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정말로.”
이에 준성이 ‘진짜?’라고 묻듯 물끄러미 쳐다보자,
재민은 이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윤 이사님께서도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뜻을 이어받는 자가 있다면 그 본질은 휘발되지 않는다고요. 저는 방금 윤 이사님께 많은 것을 건네받았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괜찮아야죠.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마치 훌쩍 자란 아들을 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아니면 덤벙대던 신입이 제 몫을 톡톡히 하는 것을 본 기분이 이러할까? 준성은 픽 웃으며 재민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일하러 갑시다.”
“네. 그래야죠. 윤 이사님이 은퇴하신 만큼 제가 훨씬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이후에도 재민은 약 3분 정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멍- 하니 빈공간을 쳐다봤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적응 기간이라는 게 필요하기 마련이었기에, 준성은 딱히 별말 하지 않은 채 홀로서기를 시작한 투계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마도.
*
일남의 은퇴 이후.
소위 [윤일남 사단]이라 불리던 다수의 베테랑 역시 퇴직을 희망했다. 비록 그들 모두가 네스트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믿고 따르던 장군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들 역시 이제 멈춰서 가족과의 평온을 즐겨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낀 모양이리라.
이렇게 한때 ‘과자로 만든 호랑이’ 아래에서 제과와 제빵 산업을 휩쓸던 귀신 군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남의 말마따나 그들이 남겨 놓은 수완과 노하우는 네스트와 ND그룹에 남았고, 그걸 이어받은 이들이 앞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나아가리라.
물론, 그들 중 모두가 퇴직한 것은 아니었다.
본디 떠나는 이가 있으면 남는 이가 있듯.
[신칠익 사장]은 ND 그룹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뿐이랴?
준성은 그가 한때 윤일남의 부관 역할을 했던 과거를 참작. 후방에 내버려 두기보다는 그 능력을 십분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공석으로 남은 네스트의 [경영자문]에 임명했다.
그렇게 칠익은 네프로에서 네스트에 재임명.
이후 일남의 자리를 물려받곤 어딘가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스읍 – 후우 –
‘형님은 떠나셨지만, 저는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저 역시 세계 1위를 달성한 후 미련이 남진 않았지만··· 모두가 떠나 버렸다간 형님의 유산이 금방 휘발되어 버릴 테니까요. 그러니 저는 이 자리를 조금만 더 지키다 가겠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오랜 세월을 직장인으로 일하며 이별과 만남에 익숙해진 까닭일까?
그는 이내 훌훌 털어내고는 일을 시작했다. 일남을 따라가려면 엄청나게 노력해야 할 것 같았기에.
*
[네스트 베트남 법인]의,[로켓]은 계속 동남아에 남았다.
마병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준성은 로켓의 굳건한 충성심을 확인. 이에 그를 네스트 본사로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로켓 측에서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 저는 이 약속의 땅에 남겠습니다. 비록 저 역시 대표님과 함께하고 싶지만, 누군가는 궂은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특히 윤일남 경영자문이 은퇴한 이상 네스트 안에 농장 관리를 할 만한 인력도 없고··· 무엇보다 [그 일]에 대한 비밀을 한동안 지킬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 라는 게 그 이유였다.
가히 말 그대로 네스트와 준성만을 생각하는 충신이 이러할까? 이에 준성은 그런 그의 의지를 존중해 베트남 법인에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올 수 있게끔 손을 쓰겠다는 맹약을 남겨줬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된 뒤.
마치 예배당을 연상케 하는 사무실 속.
로켓은 꼭 신에 대한 찬미를 그린 것 같은 벽화 앞에서 대영의 몰락이 담긴 신문을 접곤 기도하듯 손을 합장했다.
‘모든 게 당신의 뜻대로 됐군요. 거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너무나 영광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제 한 몸을 기꺼이 분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바꿔준 인생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사제처럼.
제 신전에 앉아 네스트 베트남 법인을 관리했다.
그 모습에서 얼핏 광신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으나, 앞으로 준성이 그의 기벽을 잘 관리하면 괜찮아지리라.
아마도.
*
네스트의 자회사 중 하나이자,
우유 빙수 제빙기를 만드는 기업인,
[제일쇄빙]의 [우지웅 사장]은 잘 지냈다.
그는 여전히 익산에 있는 제 공장을 운영하며 꼭 판타지 소설 속 드워프 같은 기세를 풀-풀- 풍기며 철을 두드리며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이유인즉슨···
준성은 네스트가 아시아 시장을 어느 정도 제패한 뒤. 산업 선두주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우유 빙수에 대한 권한을 사실상 프리 소스처럼 공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좁은 시야로 보면 네스트의 강력한 사이드 디쉬 중 하나였던 ‘우유 빙수’를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가벼운 매출 타격이 있긴 했으나···
오히려 많은 커피숍에 우유 빙수용 제빙기가 놓이며 사람들에게 친숙함을 형성. 결과적으로 시장의 파이가 커져 이익 자체는 크게 줄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뿐이랴?
준성은 해당 아이디어를 풀어 버리는 과정에서 제일쇄빙에게 ‘네스트 독점 제공’이라는 조건 역시 풀어 버렸고···
그 과정에서 우유 빙수 제빙기 생산 기술이 가장 뛰어났던 제일쇄빙에 어마어마한 양의 발주가 들어온 것이다. 까닭에 우지웅 사장은 매년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일을 해 나갔다.
그런 그의 모습은 세상 행복해 보였고 말이다.
‘역시 네스트와 손을 잡은 건 뛰어난 선택이었다!’
*
일본 [도토루]의,
[오치아이 호시지로]는 곤욕을 겪었다.
그는 꽤 오래전 네스트가 일본에 진입했을 당시. 미리 위험성을 파악하고 그 방어를 지휘했지만, 실패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준성이 뛰어났기 때문일 뿐. 오치아이가 부족해서라기엔 약간 어폐가 있었고, 도토루의 다섯 가문 역시 이를 알았기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형태의 곤혹이 찾아왔는데···
바로 네스트가 세계 1위가 되자마자 집 앞에 자질에 대한 논란이 짙은 황색 언론의 기자들이 몰려든 거였다.
– 안녕하십니까, 오치아이 호시지로 님! 얼마 전 네스트가 커피 프랜차이즈 산업의 세계 1위 점유율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ND그룹의 지주회사인 네스트의 추정 시가 총액 역시 어마어마하고요!
– 만약 본인께서 네스트 설립 당시 [도토루 코리아]를 판매하시는 대신 조인트 벤처를 하거나, 일정량의 지분을 소유했을 시 약 1,000억 엔 정도의 이익을 봤을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그 돈을 날린 기분은 어떠십니까!?
– 지금 듣기로는 네스트의 김재민 사장이 도토루 코리아의 일개 직원에 불과했었다고 합니다! 이는 도토루의 인사 관리 정책이 뛰어나다는 반증인데, 본사와 귀하는 왜 그렇습니까!? 이에 대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오치아이도 내심 ‘아, 도토루 코리아 팔 때 한 10% 정도 지분은 확보해 놓을 걸 그랬나? 아니면 5%라도?’하는 생각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었다마는···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서 생각하는 거고. 아니, 무슨 공개 처형하는 것처럼 기자들이 몰려와서 카메라 들이대며 저런 말을 뱉어 대니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짜증을 억누른 채 애써 입만 웃으며 기자들에게 대답했다.
“네, 저 역시 네스트의 지분 중 1%라도 가지고 있을 걸 하고 매우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아쉬워서 죽겠습니다. 그리고 도토루의 인사 관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아침마다 우리 집 좀 찾아오지 마세요. 집사람이랑 애들이 놀라잖습니까.”
다음 날.
해당 황색 언론에는 오치아이를 당첨된 복권 용지를 파쇄기에 갈아 버린 바보처럼 묘사했으나, 오치아이는 딱히 별다른 생각 없이 ‘허허-’ 웃고 넘어갈 뿐이었다. 그에 더해···
‘··· 김 군은 잘나가는 모양이군. 뭐. 처음부터 잘하던 녀석이니 좋은 사수를 만나 날아오른 것뿐이겠지.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해 나가자고. 네스트가 곧 일본에 상륙할 조짐이 보여. 저번에는 졌지만, 이번에는 절대 안 질 거다.’
저번에도 그랬듯. 오치아이는 도토루 내부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네스트에 대비했다. 꼭 지진과 해일에 대비하듯. 저번보다 훨씬 더 높고 단단한 방파제를 쌓으며 말이다.
*
말레이시아 [에어 아시아]의,
[토니 페르난데스]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는 대영과의 전쟁이 끝난 뒤 가성비의 경영인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끔, 백기사로 참여한 몫을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퍽 만족할 만한 수준의 투자 수익을 실현했다.
게다가 그뿐이랴?
준성은 그와 [모종의 거래]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음지쪽 영향력을 ‘아주 조금’ 행사해 에어 아시아에게 가해지던 부당한 압력을 철회. 한국 취항편을 추가해 줬다.
이에 토니 역시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말이다.
‘역시 경영을 하는 데에 있어 좋은 친구를 두는 것만큼 가성비 좋은 것도 없지. 내 친구들이 다 네스트만 같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뭐··· 그건 불가능하려나? 하하하!’
*
뱀버거 [짐 스키너]가 이끄는,
[맥도날드]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사실 준성은 스타벅스가 실각하자마자 맥도날드가 동맹을 해제하고 즉시 공격을 해 올 줄 알았다. 실제로도 당시에 짐 스키너는 혼자 오해를 한 채 삽질(?)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준성의 예상과는 달리 맥도날드는 공격은커녕 확보한 점유율을 방어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일남이 은퇴하기 전에 남긴 의견에 의하면···
– 맥도날드는 바로 다음 전쟁을 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큽니다. 게다가 경영권 역시 주주와 이사회에 나눠져 있어서 의사결정이 신속하지 못할 거예요.
– 그러니 일단 확보한 땅을 제 뱃속에서 천천히 소화하며 다시금 힘을 기르겠죠. 그러니 저희 역시 마냥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방어 준비를 해야 합니다. 특히 대영을 무너뜨리는 데 큰돈을 썼으니 더더욱.
··· 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짐 스키너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말이다.
‘기다려라, 네스트. 일단은 미국 전반에 제기된 비만 문제와 그 빌어먹을 던킨부터 처리한 뒤에 천천히 공략해 주마.’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경영에 있어 경쟁은 필수불가결 아니던가?
준성 역시 이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저 평온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짐 스키너, 덤벼 보고 싶다면 마음껏 덤비라고.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도 그럴싸한 전략을 갖고 있었어. 나한테 실컷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그건 너도 똑같을 거다.’
과연 다시 한 번 [커피 산업 멸망전]이 벌어지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5년? 10년? 아니면 20년?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냉전처럼 이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준성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싸움을 걸어오면 상대해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
다음으로 [디움]의,
[곽권영 사장]이 준성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대영과의 전쟁이 있기 전.
권영이 분명 이런 말을 남겼었으니까.
– 디움 메인 페이지에 대영의 비리를 폭로하라고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디움은 현재 대한민국 인터넷 시장의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근데 만약 저희 이익을 위해 사용자에게 노출될 뉴스를 선별한다면, 이건 여태 디움이 쌓아 온 비전 그 자체를 짓밟는 겁니다!
– 예, 살다 보면 분명 융통성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죠. 하지만 저는 이게 ‘시작’이 될까 두렵군요. 위기마다 디움의 권력을 이용해 시민들의 귀와 눈을 가리고, 나중에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시민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제공할까 봐요! 그럼에도 이런 지시를 내리시는 겁니까!?
– ··· 정녕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디움을 지키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하셨다는 것은 이해하니까요. 근데 공감은 못 하겠네요. 아무리 악에 대항한다는 명분이 있다 한들 자신을 지키고자 질서를 무시한다면, 그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이니까요. 그러니 이게 ‘마지막’이 될 겁니다.
얼마 전 대영과의 전쟁이 끝났다.
권영 역시 최후통첩을 하러 온 것이리라.
준성은 평소와는 다른 권영의 모습을 보곤 내심 눈치를 챘기에 하던 작업을 멈추고는 권영을 올려다봤다.
“오셨습니까?”
“··· 예.”
“제 추측대로라면 [그때 있었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오신 것 같은데 말이죠. 맞습니까?”
“···”
권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 모습이 꼭 이미 결단을 내렸기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도 보이기도. 동시에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해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왤까.
“생각은 많이 해 보셨나요?”
“··· 예. 전쟁이 꽤 길어져서 차고 넘칠 만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봤고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셨든. 미안합니다. 그러니 마음먹은 일을 하세요. 막지 않을 테니.”
그렇게 담담한 말 이후 몇 초나 흘렀을까?
문득 권영이 조용히 담배를 권했다.
“··· 한 개비 태우시겠습니까?”
“그러시죠.”
칙 – 칙 – 화르륵 –
스읍 – 파스스 – 후우 –
그렇게 담배가 타는 사이.
준성은 피식 웃으며 권영에게 말했다.
“담배 끊으신다더니, 실패하셨나 보네요.”
“예. 대신 많이 줄이기는 했죠. 딸 아이가 싫어하거든요. 예전에는 아빠가 제일 좋다고 했는데, 가까이만 가도 담배 냄새가 난다고 도리질을 치더라고요. 그래도 줄이고 나서는 좀 많이 나아졌습니다.”
“걔가 벌써 10살이죠?”
“··· 예. 디움이 포털 서비스를 시작한 이듬해에 태어났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니 시간 참 빠르네요.”
“원래 행복한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행복하셨다는 뜻 같아서 저도 마음이 좋네요.”
행복이라는 단어에,
권영은 잠시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준성은 잠시나마 97년 겨울에 본 꿈을 품은 소년 같던 권영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으레 꿈과 목표가 확실한 사람들이 그렇듯. 아마 권영에게도 시간 따윈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으리라.
“예. 행복했죠. 지금도 행복하고요.”
“그랬다니 다행이네요.”
딱 거기까지 얘기했을 무렵.
서로 물고 있던 담배가 다 타버렸다.
마치 행복했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그걸 신호로 두 경영자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고,
권영은 이내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사직서였다.
이에 준성은 마치 기다리던 고통을 만난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그걸 받아가려는 찰나···
부욱 – 북 – 꽈악 – !
권영은 그걸 시원하게 찢어 버린 뒤 손에 쥐고는, 어딘가 개운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반면 준성은 잠시 멍- 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고 말이다.
“··· 흐음? 뭡니까, 그 퍼포먼스?”
“이 사직서는 그 사건이 있었던 날에 작성한 겁니다. 사실 오늘 여기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짜로 낼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냥 조금 정도는 더 유예해 보려고요.”
유예라는 말에 준성이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흥미로운 의견이네요.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전쟁 속에서 제가 선을 넘은 건 사실이었잖습니까. 그리고 그 선을 넘은 결과로 곽권영 사장님의 신념이 짓밟혔을 테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도 권영은 이전부터 계속 산업 선두주자가 되자마자 [정보 독점]과 [빅-브라더] 그리고 [여론 조작]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도 그럴 게 디움의 크기가 상상 이상으로 커지며 준성이 마음만 먹으면 그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유명한 히어로 영화에서도 그러지 않던가?
–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 라고 말이다.
심지어 영화나 만화 속 슈퍼 히어로도 저런 마음으로 고통을 받는데, 그저 일반인에 불과한 권영에게 어마어마한 힘이 주어진다? 사실상 일반인의 손에 핵폭탄 격발 스위치가 쥐어진 거나 진배없었다.
까닭에 권영은 회사가 괴물처럼 변하지 않게 만들게끔 철옹성 같은 매뉴얼을 만들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강도 높은 처벌을 부과했었다.
근데 그 와중에 준성이 대영과의 음지 전쟁을 위해 권영에게 대영의 악행을 디움 메인 페이지에 연이어 노출시키라 지시. 이러한 특정 뉴스의 과한 노출 역시 권영 입장에선 여론 조작으로 느껴 매우 큰 불편함을 느꼈었다.
“예. 그랬었죠. 제가 퇴사를 결심할 정도로요. 하지만 말입니다··· 대영과 싸우다 보니 대표님께서 왜 그런 선택까지 하셔야 했는지 조금 정도는 알 것 같더군요.”
그랬다. 권영은 이후 매우 긴 시간 동안 대영과 싸우는 사이. 마예라와 우동민 그리고 여러 정보원이 건네준 ‘대영의 악행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제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사지로 내몰고,
증거인멸을 위해 노동자의 시체를 유기하며,
더러운 영향력으로 경쟁자를 도태시키려 하고,
돈을 위해 영혼까지 팔려고 하는 모습들을 말이다.
그리고 권영은 깨달았다.
준성도 결국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표님께서 하신 일들을 감쌀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한마디로 경고라는 뜻.
가히 권영다운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준성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깔끔하고 청명한 웃음이 이어졌을까?
권영이 손에 쥔 찢은 사직서를 스-윽 내밀었고,
이후 준성이 뭐냐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자···
“서랍 안에 제 사원증 가지고 계시죠? 교환하죠.”
맞았다. 실제로도 권영은 마지막이라고 말할 당시 제 사원증을 집어 던지며 떠나갔고, 이에 준성이 그걸 보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담으로 권영 역시 이후 빌딩 출입을 해야 했기에, 본인이 가지고 있던 여분 사원증으로 할 일은 다 했기에 딱히 이 시적인 물물교환에 응하지 않아도 무방했으나···
까짓거 조금 시적이면 어떠하랴.
떠나려던 명장이 돌아왔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에 준성은 웃으며 제 서랍을 열었고,
이후 거기서 권영의 사원증을 꺼내,
찢어진 사직서와 교환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곽권영 사장님.”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그렇게 권영은 디움에 남기로 결정했다.
여담으로 준성은 물물교환이 끝나자마자 딱 4등분 난 사직서를 테이프로 엉기성기 붙였는데, 이를 본 곽권영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뭐하냐고 묻자··· 준성이 장난기 가득한 악동 같은 웃음을 머금고 되돌려줬다.
“10년짜리 놀림감인데, 그냥 놓치긴 아쉬워서요.”
그 말에 권영은 그제야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머리 위에 떠 있던 물음표를 느낌표로 치환하며 그 사직서를 빼앗으려 들었지만··· 준성은 그걸 서랍에 넣고 봉해 버렸다.
“하! 그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방금 본인이 한 짓은 어떻고요?”
그 말에 권영은 또 곰곰이 생각하기도 잠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자, 볼일 끝났으니 저는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준성은 다음이라는 말에 꽤 힘을 줘서 말했고,
권영 역시 이에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퇴장했다.
이렇듯 권영은 디움에 남는다는 선택을 골랐다.
아마 그는 여태까지 그래 왔듯. 타락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 디움을 성장시키리라. 퍽 믿음직스러운 정의의 수호자가 아닐 수 없었다.
*
[디움]의 [사울] 역시 여전했다.흡사 만족을 모르는 천재가 이러할까?
그가 디움 내에서 이룩한 성과가 어마어마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부사장이 될 수도 있었으나··· 사울은 여전히 사내 정치 따윈 관심 없다는 듯 간결하게 대답했다.
– 경영은 대표님이랑 권영이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내 전문분야도 아니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 많은데 제가 높은 자리 앉아서 뭐 하나요? 저는 제가 잘하는 거 할게요.
– 그리고 개발자가 어쭙잖게 경영자 자리 앉았다가 회사 나앉은 거 여럿 봤어요. 그렇다고 아예 개발 모르는 경영자가 개발자들 다루는 건 사양이지만, 우리 회사 사장은 곽권영이잖아요? 그 사람이면 괜찮아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걸 증명하듯 실제로도 준성이 사울이 만든 서비스를 전략에 사용한 적은 있어도, 사울이란 사람 자체를 직접 기업 전략 운용자로 쓴 적은 없었다.
까닭에 그는 그저 오롯이 연구실에 박혀 콜라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어떻게 해야 디움이 더욱 앞으로 나아갈지. 그리고 사용자들이 편해질지만 생각했고 말이다.
여담으로 이러한 사울의 태도는 디움 내에 특이한 문화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보통 디움 같은 IT 서비스 회사의 경우. 보통 사내 정치 세력이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바로 [경영자]와 [개발자]다.
전자는 개발자들이 만든 편리한 기술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들일까 고민하는 존재들이고,
후자는 개발에만 집중해 본인의 회사가 타사보다 훨씬 더 좋은 기술력을 가지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바람직한 회사의 경우 저 두 가지 형태의 인재들이 상호 협력해나가며 매우 좋은 시너지를 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람직할 때’ 얘기였고···
보통은 서로 간의 정치 세력을 만들어 다른 한 세력을 종속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잦다. 이러할 경우 내부적인 비효율로 인해 회사가 내리막길로 가게 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회사보단 본인들의 안위가 중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디움은 조금 달랐다.
당장 사장인 곽권영부터가 개발자와 경영자 모두에 속하는 쌍방향 인재였거니와, 혹 [경영자 라인]에서 수작질을 하려고 해도 사울이라는 역대급 개발자가 든든히 버텼으니 말이다.
까닭에 누군가가 사내 정치로 다른 한 세력을 압박하려 하면 사울과 권영이 귀신같이 나타나 그 싹을 제거. 두 세력의 힘이 황금 같은 균형 맞추며 높은 효율을 뽑아냈다.
‘아마 곽권영과 사울이 계속해서 시너지를 내준다면, 디움이 IT 업계를 장악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어.’
준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
[디움]의 [오태희] 역시 회사에 남았다.그는 이번 대영 경영권 분쟁의 가장 큰 전투를 해낸 사람 중 하나로서, 어마어마한 결과를 끌어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대영을 무너뜨린 남자] 아니던가?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대영을 무너뜨린 판을 짠 것은 준성이었으나··· 그 전투를 지휘한 것은 오태희였으니 말이다.
이에 준성은 그가 떠날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태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신뢰 관계가 아닌 돈으로 엮인 용병이었으니까. 하지만 준성의 예상과 달리 오태희는 떠나지 않고 여전히 디움에 남았다. 뛰어난 펀드나 여러 투자회사에서 러브콜을 날렸음에도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 이준성을 배신하라고?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그 녀석은 지시만 잘 따르면 보물을 뱉어내는 괴물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판을 꿰뚫고 짜는 능력까지 뛰어나지.
– 나는 말이야. 그 괴물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달콤한 꿀과 피를 빨며 기술을 훔칠 거야. 그래서 내가 최고가 될 수 있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과거에 피승원과 만나 위와 같은 발언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은 훔쳐 갈(배워 갈) 게 남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준성 역시 제 제자들을 교육하지 않았던가?
그저 거기에 슬쩍 마당에서 귀동냥하며 배우려는 서당개 한 마리 정도 추가되어 봐야 달라질 건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소식이다. 대영과의 전쟁으로 인해 금고가 가벼워졌어. 그러니 저런 자본주의의 망령 하나쯤은 휘하에 두는 게 좋겠지. 적당히 고기만 잘 던져주면 절대 배신하지 않을 인물이기도 하니까.’
오태희.
그는 끝까지 자본주의의 망령이었다.
분명 언젠가는 ND 그룹과 이별을 하게 될 날이 올 테지만,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니 준성은 사냥개가 떠나기 전까지 잘 부리기로 했다.
*
[디움]의 자회사인 [미니랩]과 [SNS] 그리고 [유튜브]는 풍랑 하나 없이 시장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그도 그럴 게 애초에 모회사가 IT 서비스 부동의 1위인 디움이었거니와··· 준성이 미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엄청나게 큰 투자를 한 기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그들은 대영과의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대신 후방에서 평화를 즐기며 계속해서 성장. 디움의 핵심 서비스로서 구글과의 점유율 경쟁에서 커다란 도움을 줬다.
게다가 그뿐이랴?
거기서 괜찮은 스타트업과 연계해 디움에게 그 누구보다도 빠른 속도로 기술을 점유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에 더해 디움이 만지기 힘들어 보이는 기술은 다른 기업에게 연결해 줌으로써 점차 [디움의 기술 공룡화]의 가능성을 보여 갔다. [SNS]는 여전히 무료 서비스였으나, 어마어마한 이용량을 토대로 한 수준 높은 광고와 더불어 약간의 유료 과금 모델로 무시 못 할 수준의 수익을 뽑아내 줬다.
게다가 이들은 ND그룹 계열사 내에서 몇 안 되는 상장사답게 외부 투자금을 미친 듯이 빨아들였고, 그 결과 디움의 금고가 대영의 전쟁으로 비게 되는 불상사를 막아줬다.
그 외에도 SNS는 유저들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데 탁월했기에, 디움은 사울의 지도 아래 슬슬 [제4차 산업 혁명]의 한 종류인 [빅 데이터 프로세싱]을 준비해 나갔다.
비록 지금 시점에서는 그저 ‘훌륭한 서비스’에 불과하겠지만, 머지않아 SNS는 디움에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데이터 베이스가 되어 주리라. [유튜브]는 점유율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광고를 삽입하기 시작하며 어느 정도 괜찮은 수익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긴 했지만··· 머지않아 동영상 플랫폼을 모조리 석권한다면, 디움의 둘도 없는 효자가 되어 크나큰 수익과 명예를 안겨 주리라.
*
강력한 경쟁자였던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디움을 지켜보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래리, 봤어?”
“당연하지.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 경쟁자에 대한 소식인데 놓칠 리가. 남한에서 일어났던 [미스터리]의 전쟁이 끝난 모양이던데? 근데 이 정도 규모일 줄은 몰랐어.”
“어. 나도 솔직히 깜짝 놀랐어. 아무리 디움을 모태로 한 엔터프라이즈가 거대하다지만, 오랜 세월 동안 뿌리를 박아 둔 글로벌 제조업체를 통째로 뽑아낼 줄은 몰랐거든. 게다가 거기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것 역시 의외였고.”
솔직히 저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장 네스트에서 준성의 최측근인 재민과 일남마저도 ND와 대영 사이에 있던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대영이 먼저 공격을 했으니 반격을 했을 뿐이거니와, 준성이 지나가듯 ‘대영 쪽에서 옛날에 네스트 인수를 시도했습니다, 제가 그쪽 전략기획실에서 일하는 것을 조건으로요’라고 했던 말을 조합해 뭔가 사건이 있었거니 했을 뿐이었다.
근데 ND그룹 내부 사람도 아닌 지구 반대편에 있던 세르게이와 래리가 그걸 파악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까닭에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아마 스마트폰 때문이었던 것 같지?”
“분명 스마트폰에 드라이브를 걸 생각일 거야!”
··· 이렇게 해석했다.
뭐, 반쯤은 맞는 말이기도 했고 말이다.
덤으로 둘은 동시에 같은 답을 낸 서로를 보며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는가 싶더니 얼굴에 호승심을 띄워냈다.
“엄밀히 따져서 아직 스마트폰은 불안정해. 하지만 만약 디움이 대영전자를 흡수했다면, 1년 안에 단점을 모조리 상쇄한 완벽한 제품이 나올 거야. 이 말은 곧···”
“PC 기반의 인터넷 서비스 플랫폼이 모바일 환경으로 확대된다는 얘기지. 새로운 시장이 열리며 신세대가 도래할 거란 얘기기도 하고. 흥미롭네. 겨우 1990년에 정보화시대가 열렸는데, 불과 20년도 안 돼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다니.”
“그게 전부 너, 나 그리고 [미스터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한 거야. 그러니 감탄할 시간에 아이디어부터 짜내 봐. 신시대의 주인은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래리 페이지는 잠시 고민하기도 잠시.
이내 제 주먹을 손바닥에 가볍게 내려치며 말했다.
“세르게이. OS 시장은 어때? 보니까 디폰은 독자적인 OS를 쓰고 있잖아? 분명 머지않아 여러 스마트폰 사이에서 ‘표준 전쟁’이 발생할 거야. 거기를 선점한다면···?”
“아- 나쁘지 않네! 스마트폰 혁신은 놓쳤지만, 그 혁신 위에 올라타면 되잖아? 당장 개발 시작해야겠다!”
“알겠어. 그럼 나는 우리랑 같은 아이디어 있는 회사 있으면 빠르게 합병하고, 인력 모집할게. 이따 보자고!”
그렇게 젊은 구글의 두 창업자는 각자 반대 방향으로 달리며 곧 있을 스마트폰 시장의 전쟁에 대비했다. 하지만 달랐던 각자의 방향과 다르게 똑같았던 게 하나 있었는데···
‘이준성 대표, IT 서비스 산업에서의 싸움은 당신이 이겼어요. 우린 이미 사용량 점유율에서 디움에게 뒤처졌으니, 이제 당신이 정점이에요. 하지만 안심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짝 뒤쫓을 테니까.’
‘이준성 대표 당신은 강한 경쟁자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야후가 그랬고, 구글이 그랬듯. 영원한 정점은 없어요. 당신 역시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죠. 그러니 앞으로도 잘 싸워 봐요. 물론, 어차피 우리가 이기겠지만.’
바로 디움을 이기겠다는 강한 집념이었다.
*
[유니드어스]이자 [넥스타]의,[장민우 사장]은 한국 게임계의 스타가 됐다.
긴 시간 동안 준성이 대영과의 전쟁에 집중했듯. 민우 역시 한국 게임계를 살리는 데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바다 이야기 사건]과 [스타 리그 중계권 사태]로 인해 그는 한국 게임계의 어두운 면을 여실히 목격. 이후 그저 게임만 개발하던 어리숙한 경영자에서, 노련한 게임 산업의 열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까닭일까?
본래 준성이 회귀하기 전만 하더라도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게임 산업은 찬란한 황금기를 끝으로 조금씩 저물어갔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 이봐, 경영관리팀장. 지금 이 신규 사업 보고서 뭐야? 저번에 바다 이야기 건 때 엮여서 피바람 불었던 걸, 잠깐 봄날이 왔다고 잊었나?
– 내가 얘기했잖아. 유저들은 개, 돼지가 아니야. 갈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대상이라고. 결핍과 욕구에 집중해서 핵심 과금 구간을 파악한 것은 분명 사업적으로 옳아. 하지만 여기는 도박장이 아니라 게임 회사야.
– 그러니까 돈벌이용 슬롯머신을 만들 생각하지 말고, 게임을 만들어. 게임을. 기본을 잊은 게임 제작사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알겠어?
장민우는 본인이 직접 총대를 메곤 유저들이 환멸감을 느낄 법한 과한 BM(business model, 수익모델)과 P2W(Pay to Win, 실력보다 과금이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게임 구조)는 최대한 자제했고··· 되도록 외부 요인 없이 오로지 실력과 노력으로만 결과가 결정되게끔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이 마냥 쉬웠던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유니드어스가 본인보다 더 큰 [넥스타]라는 회사를 집어삼켰기 때문일까? 여러 자잘한 소음이 난 것이다.
준성이 옆에서 직접 징계위원회까지 소집하며 구조조정을 도와줬음에도 말이다. 뭐, 어찌 보면 당연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뀐다고 그 직원들까지 한 번에 변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까닭에 몇몇 개발자들은 과거의 그 ‘갈취하여 얻은 돈’에 대한 향수를 품었고, 심지어는 ‘옛날이 나았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이 소식은 들은 장민우는 분개했으나··· 그 역시 이제는 마냥 몽상가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저런 발언을 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선언했다.
– 최근 들어 넥스타 내에 BM과 P2W에 대한 화두가 자주 흐르며 사업성을 개선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것 같더군요. 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희가 공짜로 게임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 현재 [유니드어스]-[넥스타]의 작품을 모두 합쳐도 매출 순위가 제일 높은 것은 모두 유니드어스의 게임입니다. 두 회사의 작품 숫자가 근 5배가량 차이가 남에도 말이죠.
– 근데 여러분들께서 보시기에 유니드어스의 저 압도적인 매출량이 유저들에게 과금을 강요해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재미있게 만들었기에 게임의 밸런스와 상관없이 매출이 높은 겁니다.
–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똑똑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만든 게임의 매출이 낮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재미가 없어서입니다. BM이네, P2W이네 할 것도 없습니다.
– 애초에 저런 경영적 수단은 어디까지나 게임이 뽑아낼 수 있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뿐이에요. 안 될 게임은 저런 거 갖다 붙여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이렇듯 장민우는 변했다.
비록 과거의 살짝 모자란 모습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의 등에는 이제 한국 게임 산업 전체가 올라탔기에 이제는 마냥 약할 수만은 없었으니 말이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나름이다.
그것에 대한 개인의 선호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옳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쉬이 말하기 어려우리라. 그렇기에 준성은 그저 경영학적으로 장민우를 판단했다.
‘장민우는 한 단계 성장했다. 이제야 조금 사장다워졌고, 본인의 꿈을 위해 싸움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좋은 경영자가 되겠군.’
그렇게 [온실 속 화초] 같은 장민우는 사라졌다.
대신 [한국 게임 산업의 열사]가 남았을 뿐.
그는 앞으로도 한국 게임 산업을 위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나갈 테고, 제 게임들을 디움과 연계해 아주 높은 수익을 창출해 내리라. 그것도 아주 건전한 게임들로 말이다.
*
[빅셀]의 [허진택 사장]은,디폰을 계속 향상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에게는 준성과의 [약속]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로테의 멸망이었고 말이다.
ND그룹에 진택이 영입됐을 당시.
그는 잠시나마 준성의 아래로 들어가는 대가로 추후 로테 그룹을 멸망시키는 데 도움을 달라는 조건을 걸었었다.
하지만 솔직히 진택 역시 내심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크게 믿지 않았다. 그의 경영자 생활이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곧 처음 ND그룹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저 막연히 언젠가는 로테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으니까.
꼭 어렸을 적에 공부를 열심히 하면 본인이 반드시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도 고등학교 들어가 현실과 부딪히기 시작하면 그 막연한 생각이 조금씩 구체화되며 서울대에서 SKY로, SKY에서 서울권 대학으로, 서울권 대학에서 제발 경기도 내에만 갈 수 있기만을 기도하게 되는 것처럼.
남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진택 역시 점차 그렇게 됐었다.
이유? 간단했다.
난생처음으로 대기업 계열사의 사장이 되자, 직원일 때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압도적인 스케일을 느꼈던 탓이다.
이는 지금 구치소에서 푸-욱 썩어가고 있는 마광위가 한때 강조하던 [경영자에게 필요한 건 부담을 견디는 심장과 공포를 무시하는 광기다]라는 말과도 꽤 궤가 맞았는데···
그는 로테에 비해 한없이 작아만 보이던(적어도 진택의 생각에는 그러했었다. 그는 로테의 방계 혈통으로서 오로지 전통적인 경영만 배워왔기에) 그 ND 그룹조차도 어마어마하게 대단해 보였으니 말이다.
까닭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진택은 조금씩 타협해 나갔다.
방계가 직계를 이긴 사례가 거의 없다고.
어차피 처음부터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고.
굳이 복수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냥 지금처럼 안주하며 살아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그래서 진택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일에만 집중했다. 더불어 ND 그룹에 들어오고 나서는 크게 로테에 대한 복수를 언급하거나, 그 문제로 준성을 재촉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진택은 점차 상황에 익숙해졌다.
마치 날카로웠던 칼이 녹에 뒤덮이듯.
냄비 안 개구리가 서서히 익어가듯.
그저 관성에 몸을 맡겨 살아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그랬‘었’다.
준성이 직접 본인이 키운 그룹으로,
재계의 정점인 대영을 무너뜨리기 전까지만.
그걸 직접 목격한 허진택은 어이가 없어졌다.
솔직히 그는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게 무조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거니와, 심지어 ND 그룹이 이로 인해 큰 위기에 빠지면 적당히 디폰의 데이터를 들고 독립할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예측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다윗이 던진 돌에 골리앗이 즉사했다.
까닭에 허진택은 매우 큰 혼란과 더불어 여태까지 이 평화에 취해 복수를 포기한 채 시간만 허비하던 본인에게 환멸을 느끼기도 몇 날.
전쟁이 끝난 뒤 휴식 중인 준성에게 술자리를 요청했고··· 이후 제 마음을 토로함과 동시에 가르침을 청했다.
“··· ··· ··· 이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입니다. 여태 제가 너무나도 안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대표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본인이 어떻게 대영을 무너뜨렸는지. 제가 어떻게 해야 로테 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요.”
사실 꽤 충격적인 내용이긴 했다.
[스마트폰 혁신]의 중추인 허진택이 여차하면 탈출을 감행하려 했었다는 것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준성은 가볍게 회를 안주 삼아 청주를 넘겼다.
그 모습에서 무패의 기록을 자랑하는 정복왕 같은 기품과 패기가 살짝 묻어났고 말이다.
“흥미로운 얘기네요. 근데 동시에 의아하기도 하고요. 가르침이라 하면, 여태까지 계속 드리지 않았습니까?”
“··· 예?”
그 말에 진택은 잠시 놀란 듯 동공을 키웠지만, 준성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제 잔에 청주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이미 본인은 [스마트폰 혁신의 문을 연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마케팅 효율을 위해 얼굴마담은 ND그룹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저와 곽권영 사장이 했습니다만··· 이미 업계에선 디폰의 전신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두 알고 있죠.”
맞는 말이다.
실제로도 디폰이 발표되고 난 후. 진택에게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여러 핸드폰 제조사들에게서 핵심 기술을 가지고 이직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빗발쳤었다. 그저 다 거절했을 뿐.
“있잖습니까, 허진택 사장. 만약 제가 귀하를 일회용 인재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전략을 공유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점은 본인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본인 역시 그 비밀스러운 전략들을 진행하며 자연스레 실력이 늘어 갔을 테고요. 그 정도도 못 느끼셨다면, 영 실망인데요.”
정답이다.
그간 ND그룹에 워낙 큼직큼직한 일만 있어서 간과하기 쉽지만, 이미 [지금의 허진택]과 [막연히 로테를 무너뜨리려던 허진택]은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 옳았다.
가지고 있는 명성, 체화된 경험, 부릴 수 있는 전략의 숫자, 등에 업은 영향력, 시장에 대한 통찰력까지. 모든 차원에서 말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그는 이미 큰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거였다.
처음 ND그룹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이에 진택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숙였다.
“···”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던 주제에 준성이 대영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자 조바심에 휩쓸려 경솔한 짓을 한 꼴이 됐으니 말이다.
준성 역시 그런 진택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아챘으나, 굳이 그걸 내색해 부끄러움을 주지는 않기로 했다.
‘원래 젊은 경영자는 패기가 넘쳐야 하는 법이지. 가끔 그 기세를 못 이겨 헛짓거리를 해도 상관없어. 그러면서 배워 나가는 거니까. 어차피 지금 아니면 저런 만용도 못 부리는 법이기도 하고 말이지. 푸흐흡.’
쪼르르르- 꼴깍-
준성은 머금었던 청주를 삼키곤 화제를 돌렸다.
“허진택 사장.”
“··· 예, 대표님.”
“조급해하지 마세요. 나도 맨바닥에서 대영을 무너뜨리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본디 귀하 같은 상황에서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싸움은 기다리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요.”
“···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 말에 준성은 픽 웃음을 흘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만약 로테와 싸움을 하고 싶다면 당장 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승산을 늘리고 싶다면 빅셀 안에서 디폰을 더 키우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본인만의 세력과 뜻을 같이할 믿음직한 동료들을 모으는 것 역시 중요하고요.”
그 말에 진택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몇 가지 이름을 입에 담았다.
“김재민 사장, 윤일남 자문, 곽권영 사장, 사울 본부장, 장민우 사장 같은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준성이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ND 그룹의 자랑스러운 경영자들이었다. 준성이 이를 침묵으로 긍정하자··· 진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 큰 어른한테 할 비유는 아니었다만, 꼭 10살짜리 꼬마가 마왕을 잡겠다고 나무 막대기 하나 들고 결의에 찬 모습이 이러할까?
준성은 진택이 가야 할 험난한 길이 눈에 훤했으나··· 그건 그가 이겨내야 할 시련이었기에 크게 간섭하진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약속]은 지켜 주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노력하세요. 그리고 본인께서 저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신 만큼, 귀하가 로테와의 싸움을 시작할 때 ND그룹 역시 아군으로 참전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단히 노력해서 복수를 끝마치셨으면 좋겠군요.”
이에 진택은 긴 침묵 후 감사를 전했고,
그렇게 준성은 그에게 맹약을 남겨줬다.
과연 그가 준성처럼 로테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니면 여태까지 수도 없이 반란을 시도했던 다른 방계처럼 그 역시 실패해서 역사 속에서 잊혀지게 될까?
어느 쪽이 될지는 기다리면 알 수 있으리라.
아마도.
*
[우동민 기자]는 [진짜 영웅]이 됐다.물론, 그가 언론계에서 종종 영웅 소리를 듣게 된 건 야후 이후부터였긴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별명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우동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준성이 준 스크립트를 읽어 내려갔을 뿐.
본인 손으로 직접 해낸 건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거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아무래도 당시의 우동민은 네스트를 취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영에게 보복을 피격. 보도자료가 끊기고, 나아가 ‘반골’ 소리 들으며 직장까지 잃게 될 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동민은 준성이 던져 주는 특종거리를 덥석 받아먹었고, 그로 인해 따라오는 명예와 성공이 본인이 직접 이룬 것인 양 착각에 취해 살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준성과 함께하면서부터 그는 점차 기업의 더러운 면들을 보게 됐고, 그러자 본인이 퍽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농담조로 본인에게 ‘영웅’이라 부르는 선배들을 보자 더더욱 말이다.
– 영웅 기자라고? 내가?
– 아니야··· 나는 그런 거창한 존재 따위가 아니었어. 나 혼자서는 취재 따위도 할 줄 모르고, 위험에 뛰어들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저 이준성이란 기업인이 다 만들어서 던져 준 자료를 내가 직접 취재라도 한 것처럼 나불댔을 뿐이야. 그게 전자 스피커랑 다를 게 뭐지?
– 정작 진짜로 언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는데···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그걸 모른척한 거야.
– 특종이 아니니까, 돈이 안 되니까. 지금은 일단 성공부터 하자고, 저런 건은 나중에 유명해지고 나서 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무시했던 거라고.
그럼에도 동민은 변하지 못했다.
본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듯. 관성에 취해 여태까지 했던 대로 살아갔을 뿐. 변화를 위한 가시밭길에 쉬이 몸을 던질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순 없었다.
모두 저렇게 사니까. 원래 저게 정상이니까.
대의를 위해 변할 수 있는 사람이 대단한 거지,
그렇게 변하지 못한 사람이 못난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의미 없이 흘러가던 시간도 잠시. 이번 [대영 반도체 공장 백혈병 사건]을 접하며 그는 조금씩 변해갔다.
– 뼈 빠지게 일했는데··· 내게 돌아온 건 백혈병밖에 없었어요··· 확진이 나자마자 회사에서 퇴직금에 5,000만 원을 더 얹어 준다고 했어요··· 대신 산재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재판까지 할 생각은 없이 그렇다고 했는데··· 갑자기 500만 원만 주고 입을 다물더라고요··· 속은 거죠. 대영이 그런 놈들입니다. 저희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숫자였어요.
– 내 아내가 죽었어요. 백혈병으로. 근데 뉴스가 안 나와요. 그 어떤 언론사에서도 이 사실을 다루지 않아요. 이게 옳은 세상입니까? 저것들이 옳은 언론입니까? 나는 당신도 안 믿어요. 여태까지 많은 사람이 취재한다고 왔는데, 제대로 기사가 난 건 단 한 건도 못 봤어요. 그러니까··· 내 아픈 기억을 더는 헤집지 말고, 가세요. 난 당신 안 믿어요.
– 우리 아빠 백혈병으로 죽은 거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아빠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일을 너무 잘해서, 선녀님들이 하늘나라에서 필요하다고 데려갔대요!
모두 취재 과정에서 동민이 들은 말들이었다.
동시에 추악한 대영의 민낯이기도 했고 말이다.
이는 갈팡질팡하던 동민의 마음을 열 방아쇠가 되기에 충분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본인의 과거에 속죄하기 위해. 참회해서 위해 말이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았다.
정선 공인노무사의 말처럼. 크고 강한 괴물과의 싸움에는 시간이 매우 많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괴물의 심리에 익숙해지며 본인의 마음 역시 검게 물들어갔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동민은 이겨 냈고,
결과적으로 반도체 사건을 마무리됐으며,
그의 폭로는 대영을 무너뜨리는 핵심이 됐다.
그는 그렇게 이 사건으로 [진짜 영웅]이 됐다.
사람들은 우동민을 칭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살피고 다니는 참된 기자라고 소리쳤고, 이 사건으로 인해 언론인 단체들은 그에게 권위 있는 상을 수여하겠다고 말했으며, 준성 역시 고생한 대가에 대한 성의를 표시하려고 했지만···
동민은 그 어느 것 하나 받지 않았다.
그게 꼭 여태 정의심이 아닌 보상을 원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에 대한 반성처럼 보이기도, 혹은 저러한 보상이 제 마음에 불순물이 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는 우동민 본인만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저런 거 말고 확실한 건 하나 있었는데···
KBC 본사, 로비.
우동민이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얼마 전 본인이 OJT(On the Job Training, 현장 직무 교육)를 진행했던 후배 여기자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선배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어, 뭔데?”
“다른 선배님들이 우 선배님께 항상 [영웅]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왜 그런 거냐고 물었는데, 다들 웃기만 하셔서··· 진짜예요? 아니면 놀리시는 거예요?”
그 말에 동민은 제 부사수가 천진난만한 바보인 건지, 아니면 언론고시(언론계 은어, 언론사 입사 시험) 준비할 때 최근 뉴스 모니터링 따윈 안 해도 됐던 천재인지 고민하기도 잠시. 이내 피식 웃음을 머금고는 묘-한 대답을 들려줬다.
“뭐, 한때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 근데 이젠 아니야. 그냥 남들과 똑같은 시시콜콜한 기자일 뿐이지. 그저 조금 다를 게 있다면, 남들보다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잘 들어주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영웅이란 말 쓰지 마. 나는 그런 거창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시시한 기자일 뿐이지.”
그 말에 후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참된 기자라도 본 듯 곧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우동민을 쳐다보기도 잠시. 이내 로비에 한 남자가 뛰어와 속삭였다.
– (잠시 숨을 몰아쉬고는) 야, 이번에 중견기업에서 부사장 폭행 사주 사건 터졌다. 보니까 이미 전화 싸-악 돌려서 기사 안 터지게 손 좀 쓴 것 같더라! 특히 저번에 대영 터트린 게 우리라서 그런지 부사장님이 너 찾더라고. 어떡할 거야!?
그 말에 우동민은 씨-익 미소를 머금고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 상쾌하게 대답했다.
“해야죠. 당연히. 그게 제 일인데.”
그렇게 그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진짜 언론인이자 진짜 영웅이 됐다.
비록 본인은 그걸 부정했지만.
*
[공인노무사]인,[정선]은 언제나처럼 정진했다.
아무래도 숙련된 괴물 사냥꾼이었던 만큼,
여러 괴물의 최후를 지켜봤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대영의 파멸이 나오는 뉴스를 봤음에도 딱히 크게 기뻐하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매우 담백하게. 컨테이너로 된 간이 노조 사무실에서 담배를 물었을 뿐이다.
틱 – 틱 – 화르륵 – !
스읍 – 파스스 – 후우 –
– [마예라 총수] 아래로 [대영전자그룹]의 출범 이후, 대영전자가 과거 청산을 시작했습니다. 마 총수는 본인의 취임사에 ‘개혁’이란 단어를 10번 이상 썼을 정도로 매우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고, 그 과정에서 얼마 전 시끄러웠던 [대영 백혈병 사고]에 대한 보상 절차를 진행함과 동시에 공장 내 안전 수칙의 전면적인 수정을 약속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이로 인해 반도체 공장에서 위험물질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린 직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함과 동시에, 의료비 전액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이러한 상황에 [대영 의료원]을 가진 대영그룹 측은 여전히 [백혈병의 원인은 공장이 아닌 직원들 개개인의 실수]라며 마예라 총수의 저러한 행위가 기업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라며 매우 큰 유감을 밝혔습니다.
얼마나 담배가 타들어 갔을까? 뉴스가 끝나자마자 정선과 함께 모여있던 대영 화성 반도체 공장 노조원들이 힘겹게 쟁취한 승리에 힘찬 함성을 내뱉었다.
– 와아아아아 – !
–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그렇게 모두가 기쁨에 겨워 하는 사이. 대영 화성 반도체 공장의 노조위원장이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습기를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정선에게 다가왔다.
“··· 드디어 끝났네요.”
“아아. 욕 많이 봤수.”
“이제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안심하고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겠죠? 저희가 원하던 회사가 되겠죠?”
연이은 물음에 정선은 대답하지 않은 채.
뭔가 기묘한 감정이 담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글쎄, 일단 물어봤으니 대답은 해 드리지. 첫째. 보상이야 새로 취임한 총수 나부랭이가 개혁을 지껄였으니 받을 수 있을 거요. 그 액수가 얼마나 될지가 문제겠지만.”
이후 정선은 담뱃재를 털어내곤 말을 이었다.
“둘째. 이제 안심하고 일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클 거요. 총수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전임자 모가지 날아간 건을 방치하진 않을 테니까. 셋째. 노조가 원하던 회사가 될 수 있을 가능성은 적수. 아무리 계열분리가 됐다지만, 회사 내에서 노조 곱게 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도 총수 모가지 날리는 방아쇠 노릇을 한 노조를 말이지.”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 반도체 사건으로 인해,
폭군 마광위의 멱이 따인 것이 사실이다.
본디 역사에서도 새로운 왕국이 세워진 뒤에 얼마 안 가, 그 왕이 힘이 과하게 세진 개국공신들의 목을 자르듯. 새로운 총수 역시 노조를 어느 정도는 눈여겨볼 게 분명했다.
특히 대영은 재벌 중에서도 노조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마예라가 선함을 추구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윤리적 측면]일 뿐.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닌, 회사와 노동자 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녀 역시 한낱 경영자에 불과했다. 적어도 정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봐 왔기에.
뭔가 미묘한 대답 때문이었을까?
노조위원장에게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잠시.
정선은 픽 웃고는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뭐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지으시나? 웃어요. 결국, 우리가 이기지 않았수? 아까 한 말은 그냥 물어봤으니 대답을 한 거고. 본인은 이런저런 자잘한 걱정 따윈 하지 마쇼.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내가 돌아오면 되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편하게 이 승리와 평화를 즐기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정선은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평화 속에서도 위기를 대비하는 사람처럼.
항상 의심하고,
항상 경계하며,
항상 조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세상을 살며 사람을 양식으로 삼는 괴물이 된 기업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으니 말이다.
약 3년이란 세월을 함께했던 만큼 노조위원장 역시 그런 정선의 성격을 어느 정돈 알았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감사는 개뿔. 나도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그리고 나는 옆에서 훈수만 둔 거요. 이 승리는 당신들이 쟁취한 거야. 그러니까 감사할 필요 없수다. 괜한 소리 하지 마쇼.”
참고로 저건 회색빛 거짓말이다.
정선은 시장에 있는 그 어떤 노무사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일을 해줬거니와, 당장 시체 유기 사건에서도 제일 앞줄에서 대영의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여댔었다.
그에 더해 법적인 사안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으니, 그가 없었다면 분명 대영 반도체 공장은 여전히 백혈병 문제가 남아 있었겠지마는··· 그럼에도 정선은 겸손을 부렸다.
이에 노조위원장이 허허허- 웃고만 있자,
정선은 ‘쯧’ 소리를 내곤 말했다.
“함께해서 즐거웠으니, 이제 살아생전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나를 다시 봐야 한다면 큰 사건이 터졌다는 거니까. 그럼 욕들 보쇼. 나는 다시 내 사무실로 돌아갈 테니까”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대영이 보상을 시작한다는 뉴스에 노조원들이 축제를 벌이는 사이. 정선은 주섬주섬 제 물건을 챙기는가 싶더니 컨테이너로 된 노조 사무실을 나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다.
이 승리에 어울리게.
스읍 – 파스스 – 후우 –
그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금 담배 연기를 내뿜자,
항상 옆을 보좌하던 실무직이 다가와 물었다.
“고생 많았다, 선아. 이제 뭐 할 거냐?”
“다음 일 해야지. 쉴 틈이 어딨나.”
그 말에 실무직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 좋은 쪽으로 변함없는 새*.”
“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누군가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야지. 모두가 시류에 휘말리다간 촛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괴물들의 시간이 될 테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정선과 그의 동료는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을 무찌르고 돌아가는 용사처럼 말이다.
아마 그들은 제힘이 다할 때까지 괴물을 쫓아다닐 테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리로 달려가 큰 힘이 되어 주리라. 정선. 그는 제 선(善)이란 이름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박상진]은 광위와 준성의 전쟁으로 인해,공석이 된 공정거래위원장 자리를 꿰찼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재계의 정점인 대영이 쪼개져 모든 사람이 경제 상황에 집중하는 가운데··· 재벌에게 적대적인 성향의 인물이 공정위원장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영이 휘청이면 당장 경제 성장률이 어쩌네, ND그룹이 아무리 강해도 대한민국은 결국 제조업 국가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고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박상진을 마냥 안 좋게만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워낙 대영이 터트린 스캔들이 강력하기도 했고, 몇몇 사람들은 슬슬 폭주하는 대기업들을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극심한 갑론을박이 이뤄지는 가운데.
MH와 집권 여당은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활용해 박상진을 공정위원장 낙점을 강행. 이후 박상진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설립 취지에 맞춰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제 활동을 위해 기업들을 감시하겠노라 선언했다.
특히 전임 공정위원장이 뇌물수수와 부정한 청탁으로 잘려나갔기에, 청렴을 강조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고 말이다.
비록 기존 계획과는 다르게 준성의 전쟁이 워낙 급진적으로 진행되어 박상진이 대영의 해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으나, 이 점은 딱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의 한국에는 양보 없는 감시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록 대영이 무너지긴 했지만, 더러운 수단을 바탕으로 제2 혹은 제3의 대영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당연한 얘기겠지만, 준성의 개인적인 복수와 전쟁이 끝났다고 한들 대한민국이 멈추거나 하진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는 부패 그리고 비리와의 전쟁을 계속해 나가야 하리라.
준성이 뽑은 다음 감시자는 박상진이었고 말이다.
준성이 회귀하기 전,
박상진에게 붙은 별명이다.
이는 회귀 후에도 분명 똑같겠지.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박상진은 공정위원장이 되자마자 준성이 숨통이 끊어 놓은 대영그룹의 밝혀진 비리에 대해 어마어마한 과징금과 시정 명령을 날려댔고··· 안 그래도 반쯤 맛이 간 마창수를 더욱이 절벽으로 밀어 붙여댔다.
아마 그 모습을 보아 할 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문제는 정치권의 상황을 보아 할 때. 다음 대통령은 아주 높은 확률로 비둘기파(the doves, 기업에 온건한 정책을 펼치는 성향의 정치인)인 MB가 될 것 같다는 거였는데···
그가 매파(The hawks, 기업에 강경한 정책을 펼치는 성향의 정치인)인 박상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MB가 여러 논란이 있는 대통령이지만, 그 역시 기업인 출신의 대통령. 그러니 만약 박상진의 능력이 MB의 성향을 뛰어넘을 만큼 좋다면··· 혹시 또 모르리라.
이 부분은 박상진 본인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여태까지 그 혼자서 잘해 왔듯,
이번에도 똑같을 것 같았으니까.
*
이렇듯 ND그룹과 함께했던 기업들과 사람들에게, 대단히 많은 일이 있었다. 준성은 대영과의 전쟁이 끝난 뒤 그것들을 일일이 모니터링하기도 잠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참 커졌네. 내 회사.’
뭐,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이제 대영이 무너지며 ND그룹이 사실상 대한민국 정점이 되지 않았던가?
비록 주요 계열사들이 모두 비상장 상태인지라 정확한 데이터 비교는 불가능했지만, 경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ND 그룹이 압도적인 힘을 가지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 머릿속으로 알던 사실이었음에도,
이렇게 전쟁이 끝난 뒤 돌아보니 새삼 놀라웠다.
준성은 피식 웃음을 머금고 있기도 잠시.
어차피 이제 대영과의 전쟁도 끝나 처리해야 할 큰일도 없었기에, 잠시 짬을 내서 추억에 빠져보기로 했다.
‘··· 1997년 2월. 맨손으로 PC 한 대를 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 와서야 대한민국의 최고의 회사를 세운 건가. 여기까지 1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철컥 – 덜그럭 – 드르륵 –
준성이 데스크 맨 아래에 있는 잠긴 서랍을 열자, 여태까지 기록했던 [복기 자료]가 적혀 있었다. 연말에 항상 [과거]-[현재]-[미래]로 나눠서 살펴봤던 자료들 말이다.
마치 예전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준성은 그 자료들을 정독해 나갔다.
박상진에게 연락해 샤리를 컨설팅하고,
철수하려던 도토루를 헐값에 매수했으며,
메일링 서비스 디움을 인수해 포털을 시작하고,
쟈르뎅과 야후를 제쳐 한국 시장을 정벌했으며,
그 외 정말 많은 일을 겪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겪었고,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정말 많은 전략을 지휘했다.
그 과정에서 운이 좋아 동료를 만들고,
최악으로 보이던 적들을 힘겹게 이겨 냈으며,
끝끝내 복수의 대상인 대영 역시 척결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내용들이 모두 세세히 적혀 있었다.
팔랑 – 팔랑 – 팔랑 –
그렇게 얼마나 읽어 내려갔을까?
준성은 이내 다 읽은 자료를 내려놓고는,
마치 개운함을 즐기듯 기지개를 쫙- 켰다.
참 좋은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참 좋은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참 좋은 시간들만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잠시.
문득 사무실 안에 노크 소리가 굴러들어왔다.
똑똑똑 –
이에 준성은 복기 노트를 서랍에 넣으며 시계를 슬쩍 훑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김재민 사장이 할 말이 있다며 1시간 정도만 내어 달라고 했던 상황. 이에 준성은 감상을 잠시 넣어두곤 언제나 그렇듯 정갈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들어오세요.”
승낙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잠시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길 약 5초.
휘릭 – ! 후웅 – !
이내 문이 거세게 열리며···
팡 – ! 파바방 – ! 팡 -!
파티용 폭죽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김재민을 포함한 ND 그룹의 사장진과 핵심 인력들이 큼지막한 케이크를 든 채 등장했다. 심지어 은퇴를 선언했던 윤일남조차 편한 차림으로 함께했고 말이다.
그 상황에 준성은 잠시 놀란 눈으로 ‘혹시 오늘이 내 생일이었나? 아닐 텐데?’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이내 재민 옆에 있던 민우와 진택이 큼지막하게 인쇄된 무언가를 펼쳤다.
촤락 – ! 촤라라락 – !
그 정체는 바로 유명 잡지와 언론의 기사 스크랩 자료였다. 도대체 뭐길래 저러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자···
– 2007년 세계 부자 순위, 1위 이준성! ND그룹의 지주회사인 네스트의 지분 대다수를 소유 중인 것으로 추정! 새로운 슈퍼리치의 등장에 많은 사람이 벌써부터 큰 관심!
–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굴기! IT와 커피 산업으로 세계를 지배한 국가, 남한! 엔터프라이즈 하나가 국가의 경제를 이끌다? 남한의 독특한 사례를 연구하다!
– 세계의 비상장 공룡 중 하나인 ND그룹 추정 시총, 현재 남한의 코스피를 다 합친 것보다 크다!? 디움 특수투자실 출신 펀드매니저의 세계를 놀라게 할 제보!
– ND그룹, 이제는 커피와 IT를 넘어 제조업에 도전!? 무패행진을 기록 중인 기적의 기업에 전문가들의 시선이 집중! 2010년대는 스마트폰의 시대가 될 거라 예측!
모두 준성과 ND그룹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대영을 쪼개놓은 탓에 기자들이 이런저런 뉴스를 뽑아낸 모양. 근데 동시에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기사들이기도 했다.
보통 어느 회사가 글로벌 기업 정도가 될 정도로 커지면 쉬이 무너지지도 않거니와, 심지어 누군가에게 적대적으로 인수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옳았다.
특히 대영처럼 건실한 기업은 더더욱. 근데 준성이 그 대영을 결딴내다 못해 아예 토막을 내놨으니 언론들이 기겁을 했을 테고, 여러 말과 소문들이 섞여 저런 기사가 쏟아지는 결과로 이어졌으리라. 물론, 대다수가 진실이었고 말이다.
이에 준성이 피식 웃고 있자니, 사울이 기다렸다는 듯 뻥- 하고 샴페인을 터트렸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취이익- 소리를 내며 마구마구 흩뿌려 버렸다.
꼭 청춘 영화 속 파티 장면 같은 모습도 잠시.
김재민이 대표로 나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최근에 계속 격한 일만 있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쉬어 갈 필요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최근 준성은 재민이 영 풀이 죽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여태 함께했던 일남이 사라지기도 했거니와, 스타벅스를 이겨 시장의 정점이 되었으니 그만큼 어깨에 얹어진 짐도 더 무겁게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근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또한, 재민의 말 역시 맞았다.
여태 준성은 단 한숨도 쉬지 않고 달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 정도는 잠시 쉬어 가도 괜찮겠지.
“그래요. 어차피 사울이 샴페인을 죄다 뿌려 버렸으니, 안 쉴 수도 없겠네요. 아, 그리고 이번에 코르크 마개 겨냥 잘했네요. 저번에는 천장에 쐈다가 전등 부숴 먹었잖아요.”
사실상 준성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사울이 배시시 웃으며 ‘그래서 이번엔 책장에 쐈어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짧게나마 사무실에서 파티가 이어졌다.
꼭 북유럽 신화에서 최강의 전사들만 모인다는 발할라처럼.
각자의 산업에서 굵직한 발자국을 몇 개나 남긴 뛰어난 인재들이 서로 웃고 즐기기도 몇 시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러운 침묵이 찾아왔고··· 그 사이 재민이 슬쩍 다가와 샴페인을 건네며 말했다.
“다 끝났네요. 스타벅스와의 전쟁도. 대영과의 전쟁도.”
“··· 그러게요. 참 힘든 시간이었어요. 그렇죠?”
말해 뭣하랴.
한쪽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기업이고,
한쪽은 대한민국 재계의 정점이었던 기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저는 괜찮았습니다. 그저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오히려 대표님께서 제일 힘드셨을 것 같네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준성은 침묵으로 긍정하며 샴페인을 홀짝거렸다.
“근데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네스트는 목표로 하던 스타벅스를 넘어 섰고, 디움 역시 사용량에서 구글을 압도 중이잖습니까. 처음 정했던 목표를 모두 이뤄 버렸네요.”
게다가 그뿐이랴?
유니드어스는 ‘유니허브’로 차세대 게임 플랫폼 시장을 석권했고, 빅셀은 ‘디폰’으로 스마트폰 시장의 문을 열었다. 그러니 얼핏 이젠 밝은 미래가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준성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예. 처음 정했던 목표는 이뤘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원래 목표는 과정 속에서 계속 수정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가요? 대충이나마라도 어떤 걸 계획하고 계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ND그룹 지주회사의 CEO로서 어느 정도는 알아 둬야 할 정보 같아서요.”
그 말에 준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스트는 추후 있을 맥도날드를 경계해야 했고,
디움은 기술을 확보해 종합 IT기업이 돼야 했으며,
유니드어스는 제작사가 아닌 플랫폼화를 마쳐야 했고,
빅셀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우뚝 서고자 노력해야 했다.
··· 하지만 저걸 모조리 말해 줄 필요는 없을 터.
까닭에 준성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선언했다. 마치 죽기 직전까지도 정복만을 꿈꾸며 ‘세상의 끝’을 확인하고 싶었던 이스칸다르(الإسكندر, 알렉산더 대왕)처럼. 준성 역시 존재할지조차 모를 ‘끝’을 향해 계속 달리고 싶었으니 말이다.
“위로 가야죠. 더욱 높은 곳으로. 그리고 아직 저희가 섭렵하지 못한 산업들도 많이 남아 있고요. 근데 저 혼자서는 성공할 수 없는 길일 것 같네요.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사무실에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기도 잠시.
비단 재민뿐만이 아닌, 여태까지 준성과 함께 길을 걸어온 기적의 경영자들이 모두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 예, 언제든지.
준성 역시 이에 화답하듯,
깔끔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끝
작가의말
그간 감사했습니다.
다음 작품으로 뵙겠습니다.
– 김종혁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