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the building owner RAW novel - Chapter (306)
회귀해서 건물주-306화(306/740)
306
김명순.
나이는 65세, 올해로 20년째 이 동네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토박이다.
터벅.
그녀의 발걸음엔 힘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박영진 앞으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박 사장, 이거 월센데 며칠 늦었어. 미안허이.”
“누님도 참, 새삼스럽게 뭘 그런 일을 가지고……, 그나저나 요즘은 좀 어떠세요?”
“월세 늦은 거 보면 모르남? 요즘 같아선 정말 장사할 맛이 안 나. 작년까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유지해 왔는데, 올해 들어서는 영 아니야.”
김명순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박영진이 바로 물었다.
“그 정도예요?”
“박 사장이 더 잘 알 거 아녀? 내가 올해로 20년째 장사를 하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힘든 적은 처음이여. 그리고 진짜 문제는 뭔지 알아?”
“진짜 문제요?”
“그려, 박 사장도 알다시피 상권이 학교 정문 쪽으로 옮겨가면서 여기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거야. 사람이 말이야,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희망이 있으면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반대로 희망이 안 보이면 그것처럼 무서운 게 없는 법이거든. 그런데 지금 여기 사람들이 딱 그 짝이야. 내일이 없다 보니…….”
김명순의 푸념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계속됐다. 말은 길었지만 얘기하고 싶은 건 하나였다. 지금의 현 상황이 너무 힘들고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것. 그래서 이런 분위기라면 그 누구도 버티기 힘들 거라는 거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현성의 표정도 좋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박영진과 나눴던 대화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김명순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박영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김명순의 말이 끝나자 박영진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잠시 침묵이 흐르고.
박영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누님 생각엔 어떻게 하면 여기 상권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없어!”
김명순의 대답은 단호했다. 오히려 질문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였다.
보통은 사람이 질문을 하면 잠깐이라도 생각을 하고 대답하는 게 기본이다. 아니, 설사 아무리 뻔한 대답이라고 하더라도 질문한 사람을 생각해서 단 몇 초라도 시간적 여유를 두고 말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김명순의 대답은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만큼 시간을 두고 생각할 가치조차 없다는 얘기다.
황당한 건 박영진이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 만큼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을 하리라곤 생각을 못 했었다.
1, 2년도 아니고 20년을 넘게 이곳에서 장사를 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애착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미련은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어떡하든 상권을 살릴 수 있는 작은 의견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김명순의 대답에선 미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박영진은 다시 물었다.
“조금의 미련도 없는 겁니까?”
“미련?”
“네, 누님이 이곳에서 장사한 세월이 얼만데 어떻게 그렇게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박 사장!”
김명순은 박영진을 진중하게 불렀다.
그러자 박영진의 목소리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네, 누님!”
“세를 들어 사는 나와 건물주인 박 사장,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절박할 거 같은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물론 박 사장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만 월세도 제때 못 내는 이 늙은이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박 사장 말처럼 내가 이곳에서 장사한 지 20년이 넘었어. 그런 사람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런 답변을 한다는 얘기는 그동안 수없이 고민을 했을 거라는 건 생각 안 해봤는가?”
“…….”
“나라고 왜 애착이 없고 미련이 없겠는가? 언젠가부터 수면제가 없으면 밤에 잠을 못 자. 숱한 밤을 새워가며 고민을 해봤지만 내 머리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어. 내가 오죽했으면…….”
김명순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박영진이 바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데…….”
“이제 그만하려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계약기간이 끝나는 올여름까지만 하고 그만할 셈이네. 그러니 그렇게 알고 미리 가게 내놓게. 몇 날 며칠을 고민해 봤지만 여기서 더 계약을 연장한다는 건 나 스스로가 감당할 자신이 없네. 씁쓸하지만 이제 나는 여기서 멈추려고 하네. 박 사장과의 인연도 여기까지인가 보이.”
“…….”
박영진은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전 김명순이 너무도 단호하게 대답을 할 때까지만 해도 미련조차 없다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더 많은 시간을 혼자 고민하고 최종적으로 내린 결정이란 것을 알았기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사장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성이 김명순을 불렀다.
그러자 김명순이 고개를 돌려 현성을 바라봤다.
“나 말이야?”
“네, 사장님. 죄송한데 제가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장은 무슨 사장, 이제 어차피…… 그나저나 뭔데? 말해 봐.”
김명순은 별 기대 없다는 듯 말을 툭 던졌다.
그러자 현성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만약에 말입니다, 월세를 새로 조정한다고 해도 계약 연장을 안 하실 겁니까?”
“월세를 새로 조정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월세를 깎아준다는 말씀입니다.”
“호호…….”
김명순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깐.
웃음을 멈춘 김명순이 현성을 보며 물었다.
“지금 몇 학년?”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음…… 어쩐지, 혹시 건물주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가?”
“네? 그거야…….”
왜 모르겠는가? 전생에서 20년을 넘게 장사하면서 겪은 건물주만 해도 몇 명인데, 심지어 마지막엔 건물주의 배신으로 죽음에까지 이른 자신이다.
그뿐인가.
TV를 통해 족발집 사건, 곱창집 사건 등 세입자와 건물주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보면서 건물주들의 면면을 지켜봤던 현성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건물주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가끔 보면 착한 건물주들의 미담에 감동을 받은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건물주에 관해서 말하라고 하면 할 말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김명순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현성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도 모른 척 말이다.
“건물주가 왜요?”
“학생은 안 겪어봐서 모를 거야. 여기 박 사장도 있지만 건물주라는 사람들은 월세를 한 번 올리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다시 내릴 줄을 몰라. 주변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게끔 재조정을 해야 하는데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거지. 세입자들이야 죽든 말든 그저 월세만 챙기면 되는 사람들이라는 거야.”
김명순은 일부러 박영진이 들으라는 듯 거침없이 마음속에 있던 말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자 현성도 김명순의 말에 한 술 더 보탰다.
“같이 공생하는 관계가 아닙니까?”
“공생? 그 사람들 머릿속엔 그런 생각은 아예 없다네. 학생은 혹시 지금의 월세가 언제 정해진 건지 아는가?”
“글쎄요, 그거는…….”
현성은 역시나 모른 척했다. 그 이유는 김명순의 불만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박영진이 자신을 슬쩍 바라봤지만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때 김명순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4년 전 월세야.”
“4년 전이요?”
“그래, 그때 장사가 제일 잘될 때였거든. 그다음부터 차차 여기 상권이 죽기 시작했어. 결정타는 작년 초 학교 정문 쪽에 건물들이 완공되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입주하면서 끝난 거지.”
“장사는 당연히…….”
“보통 3, 40%는 다 빠졌지. 심지어는 반 토막 난 집도 꽤 됐었고. 그런데도 건물주 중에서 월세를 빼준다는 놈은 단 한 놈도 없었어.”
김명순은 ‘놈’이라는 말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 현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박영진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박영진은 할 말이 없다는 듯 현성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말은 안 했지만 박영진의 표정에서 인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성은 김명순을 보며 물었다.
“혹시 세입자들이 월세를 빼 달라고 얘기는 했었나요?”
“흥…….”
김명순은 갑자기 콧방귀를 켰다.
그러자 현성이 바로 물었다.
“왜요? 혹시 뭐라고 하던가요?”
“그 인간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네? 뭐라고 했기에…….”
현성은 순간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김명순의 눈빛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는 박영진을 바라보는 김명순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박영진의 표정이었다.
얼굴빛이 붉어질 정도로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현성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간에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김명순이 현성을 불렀다.
“학생.”
“네, 사장님.”
“아까 월세를 깎아주면 나보고 계약 연장을 안 할 거냐고 물었지?”
“네, 그렇습니다.”
“어린 학생한테 어른으로서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이상과 현실은 많이 다른 거거든. 학교에서야 건물주와 세입자가 공생관계라고 배울지 모르겠지만 내가 65년을 살면서 터득한 건 그런 관계는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학생의 질문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겠지?”
“네? 아, 네…….”
현성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김명순이 신미숙을 힐긋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 어머니가 이 동네에서 장사를 하려고 여기 오신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 네.”
현성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명순이 박영진을 보며 말했다.
“박 사장, 미안하네. 내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 보네.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이 좀 심했네. 어찌 됐건 20년 동안 박 사장 덕분에 먹고살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함세.”
“…….”
“혹시라도 새로운 사람이 오거든 지금의 이 월세를 고집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야 이렇게 여기서 물러나지만 다른 사람이 이 고통을 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아닐세, 내가 괜히 주접을 떨었구먼. 건물주는 월세를 내리는 법이 없다는 걸 그만 내가 또 깜박했네. 하여간 늙으니까 자꾸 이렇게 깜박거린다네. 신경 쓰지 마시게. 그럼 난 이만…….”
김명순은 그 말을 끝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현성이 바로 김명순을 불렀다.
“사장님.”
“응? 뭐야,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게야?”
“조금 전 제 질문에 대답을 안 해주셨는데요.”
“질문? 무슨 질문?”
“월세를 빼 달라고 하니까 건물주들이 뭐라고 했는지 말입니다.”
현성은 조금 전에 자신이 물었을 때 김명순이 박영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은 세입자와 건물주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현성은 지금 그것이 궁금해서 나가려는 김명순을 붙잡고 묻고 있는 것이다.
김명순의 말이 이어졌다.
“차마 내 입으로 그 말을 할 수는 없고, 나 나가거든 여기 박 사장한테 직접 물어보게.”
“네? 아니, 무슨 말씀이시기에…….”
“직접 들어보고 판단은 학생이 하게. 그럼 난 이만 가네. 참! 혹시라도 시간 되거든 우리 식당으로 한 번 오게. 내가 밥 한 끼 따뜻하게 해 줌세. 꼭 우리 손주 녀석을 닮았구먼.”
김명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입구로 향했다.
저벅.
김명순이 몇 걸음 옮겨 문을 막 열 때였다.
“누님!”
박영진이 갑자기 신명순을 불러 세웠다.
김명순은 돌아서며 박영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영진이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박영진의 손에는 만 원짜리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이게 뭔가?”
“월셉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다시 나한테 주는 거냐고?”
“정확히 5만 원입니다. 월세의 딱 50%입니다.”
김명순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지금까지 수차례 얘기를 해도 전혀 반응이 없던 박영진이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다른 건물주들의 핑계를 대며 엉뚱한 소리를 하던 박영진이다. 그런 그가 지금 월세의 반을 돌려주겠다고 한다.
그 의미가 뭘까?
김명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 사장,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