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the building owner RAW novel - Chapter (375)
회귀해서 건물주-375화(375/740)
375
주르륵주르륵.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현성은 통화 중이었다.
“네,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에 총선이라 집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서 그 문제는 더 얘기해요.”
-그래, 알았다. 그럼 그때 보자. 항상 밥 잘 챙겨 먹고.
“네, 아버지.”
피식.
전화를 끊은 현성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아버지와 통화를 한 이유는 준치 때문이었다. 2년 전에 산삼을 캐러 갔다가 바위틈에서 구한 멧돼지 새끼였다.
그 새끼가 자라 어느덧 마을에서 제구실을 한다는 것이었다.
씨내리.
바로 준치가 요즘 하는 일이다. 씨내리 조건으로 새끼를 낳으면 새끼 돼지를 한 마리씩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벌써 3마리째라는 거였다. 그래서 돼지우리를 좀 더 크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준치 또한 회귀하면서 얻은 인연이다. 그날 거기에 안 갔더라면 준치의 생명도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인연의 끈이 점점 더 길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몇 년만 더 지나면 마을 전체에 준치의 유전자는 상당히 늘어날 것이라는 거다.
어쩌면 나중에 식당을 운영할 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녀석 참!”
현성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질 때였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자취방 주인집 아들인 박민석이었다.
현성은 반갑게 박민석을 맞았다.
“아, 민석이 형, 들어와요. 그런데 오늘은 논문 준비하러 안 갔나 봐요?”
“비 오는 날은 이상하게 책이 눈에 잘 안 들어와.”
“하하, 그렇죠? 이런 날은 그저 김치전에 막걸리가 최곤데…….”
“네가 뭘 좀 아는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준비했다는 거 아니냐?”
박민석은 들고 온 검은 봉지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냈다. 그러자 현성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안주로 김치전 금방 만들게요.”
“김치전?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
“형, 몰랐구나. 제가 또 한 요리 한다는 거 아닙니까?”
때마침 저번에 이혜선의 어머니가 주신 김치가 알맞게 익은 상태였다. 현성은 먼저 김치부터 썰기 시작했다.
스각스각…….
오랜만에 현성의 주특기인 칼질 소리가 일정하게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박민석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뭐야? 그 칼 솜씨는? 너 요리도 배웠어?”
“특별히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좋아해요.”
“그래? 근데 그냥 좋아하는 거치고는 그 칼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하하, 그래요? 자, 그럼 이번엔 반죽입니다.”
현성이 이번엔 잘게 썬 김치에 부침가루와 설탕 그리고 계란을 넣고 젓기 시작하자 제법 반죽이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민석이 다시 말했다.
“김현성, 그러고 보면 참 만능 재주꾼이야. 공부면 공부, 요리면 요리,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형도 참…… 김치전 하나 하는데, 무슨 그렇게까지…….”“무슨 소리야, 나는 라면 하나 끓이는 것도 힘들던데. 물 조절도 그렇고 어떨 때는 덜 익고 어떨 때는 너무 익어서 불고, 하여간 요리는 너무 힘들어.”
현성은 그렇게 말하는 박민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치이익.
현성이 반죽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올리자 기가 막힌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형, 혹시 빗소리하고 김치전 할 때 나는 소리의 파장이 같다는 거 알아요?”
“정말?”
“네, 그래서 비 오는 날 김치전이나 부침개가 생각나는 거래요.”
“그러고 보니 소리가 똑같은 거 같기도 하다. 진짜 신기하다.”
박민석은 귀를 기울여 빗소리와 김치전 소리를 번갈아 들으며 신기하다는 듯 그 행동을 반복했다.
그때 뭔가 생각난 듯 현성이 물었다.
“참, 졸업여행 날짜는 나왔어요?”
“응, 원래는 가을에 간다고 하더니, 갑자기 올림픽 때문에 다음 달에 간다고 하더라고. 가을에는 올림픽 관광객까지 몰려서 방값이 장난 아닌가 봐.”
졸업여행이 변경된 이유는 비용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현성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다. 현성의 관심은 오로지 날짜.
그래서인지 그의 질문은 바로 이어졌다.
“날짜는 언제래요?”
“둘째 주 목요일. 정확히 날짜는 5월 12일이고 학교 정문에서 아침 6시에 다 같이 모여서 출발한대.”
묻지도 않았는데 출발 시간까지 정확히 얘기하는 박민석이었다.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벌써부터 졸업여행에 대한 설렘이 느껴졌다.
오늘이 4월 20일이니까 앞으로 정확히 23일이 남았다. 23일 후에 박민석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졸업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의미 없는 얘기지만 현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형도 갈 거죠?”
“당연히 가야지! 평생에 한 번인데!”
대답하는 박민석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자 현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그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휴우!”
황당한 건 박민석이었다. 졸업여행을 갈 거냐고 묻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기껏 돌아오는 게 한숨이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야, 김현성. 너 뭐야? 형이 평생에 한 번 졸업여행을 간다는데, 그게 그렇게 한심해 보이냐?”
“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순간적으로 놀란 건 현성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박민석이 한심했던 건데 그게 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밖으로 표출되다 보니 오히려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성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제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그만……하하.”
어색할 때는 그저 웃는 것도 그 상황을 넘기는 한 방법임을 알고 있는 현성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박민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프라이팬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안 익었냐?”
“아니요, 거의 다 익었어요. 김치전은 원래 겉이 좀 바삭해야 맛있으니까…….”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현성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형, 건배해요.”
“오케이, 빗소리도 좋고 거기다 막걸리에 김치전까지, 오늘 분위기 완전히 죽인다. 자, 마시자.”
박민석은 앞에 놓인 막걸릿잔을 높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럴 바에야 오늘 같은 날은 괜한 걱정을 하지 말고 차라리 즐기는 게 낫다는 생각에 현성도 잔을 높이 들었다. 두 사람의 술잔은 허공에서 기분 좋게 부딪혔고 그렇게 두 사람은 빗소리를 들으며 나름의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민석의 입에서 갑자기 엉뚱한 얘기가 나왔다.
“어떻게 될까?”
“네? 뭐가요?”
“총선 결과 말이야. 네가 생각하기엔 이번에 과연 여당이 몇 석이나 먹을 거 같냐?”
일이라는 게 원래 꼬이려면 이상한 데서 꼬인다. 하지만 반대로 또 일이 풀리려면 엉뚱한 곳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때도 있다.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1988년 4월 26일, 바로 13대 총선이 치러진 날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날짜가 앞으로 6일 남았다는 거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결과를 이미 현성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총선 결과?
그런 건 관심도 없다. 어차피 현성에겐 이미 과거의 역사일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그 결과를 잘만 활용하면 앞으로 박민석이 자신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게끔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목적은 하나, 어떡하든 박민석의 졸업여행을 못 가도록 막는 것이고.
현성은 빙긋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 1당은 민정당이 당연히 가져가겠지만, 과반은 절대로 못 넘을 겁니다.”
이미 87년 대선에서 3김이 대통령 후보를 각자 낸 후 대선에서 패배함에 따라 다음 총선에서 민정당이 1당이 되리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민정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엔 ‘여소야대’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역시 예상대로 박민석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사실은 조금 전에 말을 하면서 일부러 ‘절대로’라는 말을 강조했었다. 그 이유는 박민석이 이 총선 결과에 관심을 많이 보일수록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현성은 확신한다는 듯 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제가 볼 때는 100% 과반을 못 넘는다고 봅니다.”
“100%? 글쎄…… 국민들이 아무리 그래도 여당을 찍어주지 않을까? 대통령 선거하고는 또 다른 문제니까 말이야.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여소야대는 한 번도 없었잖아, 안 그래?”
“내기할래요?”
유치하지만 현성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떡하든 박민석의 졸업여행을 막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민석이 재밌다는 듯 바로 반응을 보였다.
“내기?”
“네, 재밌잖아요. 그래야 총선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고요. 어쨌거나 저는 이번엔 처음으로 투표하는 거거든요.”
“아, 그렇구나. 너는 이번이 처음이지?”
“네, 그렇다 보니까 솔직히 궁금해요. 제 예상이 얼마나 맞을지 말입니다. 사실 제 판단으로는 지역구 224석 중에서 100석도 못 가져갈 거 같거든요.”
현성은 박민석의 관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구체적인 숫자까지 언급했다. 실제로 민정당은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87석만을 가져가게 된다. 전국구까지 포함해서 125석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거두게 된다.
이로써 민정당은 13대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하게 되지만,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해 1950년 총선 이후 38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하게 된다.
즉, 노태우 정부의 향후 정국 운영이 험난해질 것을 예고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득표율에서 통일민주당에 4.5%가 뒤졌던 평화민주당은 의석수에서는 오히려 11석을 앞서 제1 야당이 됨으로써 양 김의 대결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 예상된 선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성과 달리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민석으로선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몇 석? 지금 100석이라고 그랬어?”
“네, 100석이요. 제 판단으로는 과반은 고사하고 100석도 못 넘어요.”
“아무리 그래도 100석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저번에 TV 보니까 150석이 목표라고 하던데…….”
“그건 걔들 희망사항인 거고요.”
“뭐? 희망 사항…… 하하.”
박민석은 어이가 없는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러자 현성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같이 웃었지만 서로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잠시 후.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운 현성은 박민석을 보며 물었다.
“형은 어느 정도 예상해요?”
“솔직히 나도 민정당이 과반은 좀 힘들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역구에서 110석은 넘을 거 같다.”
“음…… 좋아요. 그럼 일단 전국구 빼고 지역구만 90석으로 해요. 90석 넘으면 형이 이기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기는 겁니다.”
어차피 결과를 알고 있는 현성이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 토탈 125석으로 하고 싶지만 그건 오히려 나중에라도 박민석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87석에 근접한 90석으로 내기를 제안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자 박민석은 아무 말도 안 하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허……!”
“왜요? 도저히 이건 아닌 거 같습니까?”
“이젠 100석도 아니고 90석?”
“사실은 제 나름대로 이번 총선에 대해서 분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저도 너무 황당해서 무시했었는데 아무리 다시 계산을 해봐도 90석을 못 넘는 겁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형이 총선 얘기를 하기에 장난삼아 내기를 하자고 했던 겁니다.”
현성은 일부러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목적은 하나, 박민석의 호기심 유발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에 황당해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박민석이었다.
“진짜야?”
“네.”
“좋다. 그 정도로 얘기하는데 못할 것도 없지. 조건이 뭐야?”
“조건이요?”
“그래, 내기를 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드디어 걸렸다. 현성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