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the building owner RAW novel - Chapter (423)
회귀해서 건물주-423화(423/740)
424
거실에 앉아있는 현성으로선 주방에서 나는 소리로만 박범수의 움직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주방으로 들어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건 박범수가 정중히 거절하는 바람에 주방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박범수가 거절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건 바로 김치찌개를 오늘 처음으로 만든다는 거였다. 처음인 만큼 자신의 힘으로 혼자 만들고 싶다는 거였다.
처음이라 혼자 만들고 싶다는 말에 현성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거실에 앉아있던 현성은 박희철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맛이요. 김치찌개 말입니다.”
피식.
현성의 맛이라는 말에 박희철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곤 현성을 보며 바로 되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글쎄요,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좀…….”
“아무래도 그렇겠지?”
“물론 김치찌개라는 게 아주 어려운 요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요리도 아니니까요. 더군다나 범수 형님은…….”
“현성아.”
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희철이 현성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난 아무 상관 없네.”
“네?”
“아무 상관 없다고. 지금 그 맛이 뭐가 중요하냔 말이야. 난 그저 우리 범수가 이 아비를 위해 돼지고기를 사가지고 왔다는 게 중요하네. 거기다 이젠 그 고기로 김치찌개를 끓이겠다고 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럼 된 거지. 안 그런가?”
“…….”
역시 사람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사람의 입장을 모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현성은 그제야 박희철이 조금 전에 ‘아무 상관 없다’라고 했던 의미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제가 잠깐 잊었습니다.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그 맛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 소리면 충분한 거죠.”
달그락달그락!
주방에선 여전히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주방에서 박범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성아, 아버지 모시고…….”
현성과 박희철은 잠시 눈을 마주한 다음 고개를 끄덕인 후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아버지, 드셔보세요.”
박범수는 박희철이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가 음식을 만들어놓고 그 맛의 평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후루룩!
박희철은 얼른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국물을 맛보았다. 지금 박범수의 심정이 어떤지 너무도 잘 알기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그게 박범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순간.
꿀꺽!
역시 가장 긴장을 한 사람은 박범수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박희철을 바라봤다.
“어때요?”
“…….”
박희철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김치찌개 국물을 맛보았다. 그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건 잠시 후였다.
“음…… 좋구나.”
“진짜요?”
“그래, 맛있어. 근데 어떻게 이 맛을 네가 낸 거야? 혹시…….”
박희철이 두 번 맛을 봤던 이유는 익숙한 맛이 김치찌개에서 났기 때문이다. 그 익숙한 맛은 바로 아내인 신명순이 늘 끓여줬던 바로 그 김치찌개 맛이었다.
박범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한테 배웠습니다.”
“어머니한테?”
“네, 오늘 오전에 아침 장사를 끝내고…….”
박범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현성도 김치찌개 맛을 봤다.
‘뭐야?’
현성은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맛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짜거나 싱겁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맛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맛은 식당에서 먹는 김치찌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아니, 어쩌면 웬만한 식당에서는 낼 수 없는 깊은 맛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박범수의 설명이 끝났다. 결론은 아침 장사를 끝내고 오전 내내 김치찌개 끓이는 방법을 신명순한테 배웠다는 것이었다.
박범수가 이번엔 현성을 보며 물었다.
“너는 어때?”
“형님, 최고예요. 이걸 진짜 형님이 끓인 거 맞아요? 더군다나 처음이라면서요?”
“진짜 괜찮아?”
“네, 진짜 최곱니다. 웬만한 식당에서도 이 맛을 못 따라올 겁니다. 근데 혹시 쌀뜨물로 끓였어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아? 국물만 먹어보고 그걸 바로 알 수 있단 말이야?”
박범수는 신기하다는 듯 현성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제가 맛에 좀 민감합니다. 김치찌개에서 이 정도 깊은 맛을 내려면 쌀뜨물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혹시 새우젓도 넣었어요?”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형님, 혹시 감칠맛이라는 말 아세요?”
“감칠맛?”
박범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감칠맛이라는 뜻을 모르는 듯했다.
그러자 현성은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우마미(うま味)라는 말은 아시죠?”
“우마미? 어, 알지.”
“일본어로 우마미가 바로 한국말로는 감칠맛을 말하는 겁니다. 음식물이 입에 당기는 듯이 맛깔스러운 맛을 바로 감칠맛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대표적인 발효 식품이 바로 새우젓과 간장이거든요.”
“아…….”
박범수는 새로운 걸 알았다는 듯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현성의 눈에 식탁 위에 있는 메모지가 들어왔다. 그 메모지 맨 위에는 ‘김치찌개 끓이는 방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성은 씩 웃으며 물었다.
“이거 혹시 형이 적은 거예요?”
“어? 응,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는데 아무래도 기억을 못 할 거 같아서 적었어.”
현성은 그제야 박범수가 끓인 김치찌개 맛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메모지에는 빽빽하게 김치찌개를 끓이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물론 그 메모 내용에는 쌀뜨물과 새우젓 그리고 간장이란 단어가 적혀있었다.
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형님, 어쨌거나 대단하십니다. 이 레시피만 가지고 이렇게 완벽한 맛을 만들어 내다니 말입니다.”
“난 그냥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만…….”
현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아니다.
단순하게 레시피만 있다고 해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물론 만들 수는 있다. 중요한 건 그 맛이다. 얼마나 제대로 그 맛을 살려내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 김치찌개야말로 최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은 박범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곤 바로 말을 이었다.
“형님, 특별한 재주를 가지셨군요?”
“특별한 재주?”
“네, 그 얘기는 앞으로 차차 더 하기로 하고 어서 먹읍시다.”
현성의 말이 끝나자 박희철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우리 범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지는 나도 미처 몰랐네. 범수야, 수고했다. 어서 먹자. 현성이 말처럼 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박희철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만연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심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커피를 한 잔씩 들고 거실에 앉았다.
현성이 박범수를 보며 먼저 물었다.
“형님, 혹시 일본에서도 요리 자주 하셨던 겁니까?”
“거기는 완제품이 많아서 요리라고 할 거까지는 없고 주로 데워 먹는 정도야. 물론 어쩌다 내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해먹을 때도 있었지만 거의…….”
박범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현성은 다시 물었다.
“그럼 한국에 와서는요?”
“별로…… 내가 주방에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지. 새어머니가…… 아니, 어머니가 주로 다 해주셨으니까.”
현성은 박희철을 바라봤다. 박범수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현성이 바라보자 박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범수의 말이 맞는다는 얘기였다.
현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이 처음이라는 얘긴가요?”
“물론, 그 전에 라면은 몇 번 끓여봤지만, 찌개를 끓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런데 그건 왜 자꾸 묻는 거야?”
“중요하니까요.”
“중요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런 게 있어요. 이유는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죄송한데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혹시 요리를 하실 때 즐거우신가요?”
현성의 시선은 당연히 박범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박범수한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고민이 많던 현성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박범수의 답변이 이어졌다.
“글쎄다, 즐거운지는 잘 모르겠고 싫지는 않아. 뭐랄까…… 하여간 집중은 잘 되더라.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한 거야?”
“아, 그런 게 있어요. 그 설명은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나중에 확정되면 설명드리겠습니다.”
“확정…….”
박범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현성을 바라본 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박희철한테 물었다.
“아버지, 그분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그분?”
“네, 저를 테스트한다고 했던 분 말입니다. 어제 안 오셨으니 오늘은 오실 거 아닙니까?”
“아, 아…… 그분.”
박희철은 대답을 하며 현성을 힐긋 바라봤다. 그리곤 빙긋 웃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이분이다.”
“네?”
“그분이 이분이라고.”
“아니,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분이 이분이라니…….”
박범수는 황당하다는 듯 현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희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너를 책임질 사람이 바로 여기 있는 현성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현성이가 내는 테스트에 통과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아버지…….”
박범수는 황당할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이제 고작 군대를 막 제대한 학생일 뿐이다. 나이로 따지자면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그런 어린 학생이 자신을 책임진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박범수는 다시 물었다.
“아버지, 농담하지 마시고…….”
“농담?”
박희철은 박범수의 말을 끊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곤 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범수야, 지금부터 이 아비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사실은…….”
박희철은 그동안 현성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희철의 설명이 길어지자 박범수의 표정도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박희철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희철의 설명이 끝나자 현성을 바라보며 바로 물었다.
“지금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맞아?”
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범수가 다시 물었다.
“진짜 지금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너란 말이야?”
“네.”
“내가 알기로 거기는 삼우토건이 개발을 한다고 들었는데…….”
“3년 전에 저와 계약을 맺은 건설 회사입니다. 앞으로 1년 더 공사를 할 거고요.”
“…….”
박범수는 무슨 생각인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박범수가 현성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요리에 대해서 자꾸 물었던 거야?”
“물론입니다. 일단은 형님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근데 하나 물어도 돼?”
“네, 말씀하세요.”
“나를 믿어?”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현성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박범수 또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조금 전의 표정과는 달리 진중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
“믿지 않았습니다.”
“…….”
“지금까지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솔직히 지금까지는 형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과연 형님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거든요. 근데…….”
현성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러자 박범수가 궁금하다는 듯 현성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옆에 있던 박희철의 시선도 현성을 향해 있었다.
그때 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그 믿음이 생겼습니다.”
“조금 전에?”
“네, 형님이 점심 준비를 할 때 말입니다.”
“혹시 김치찌개?”
“물론 그것도 있지만 제 마음을 움직인 건 다른 거였습니다.”
박범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른 거? 그게 뭐야?”
“그건…….”
“메모지입니다.”
“메모지?”
박범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현성을 바라봤다.
그 메모지에는 아까 오전에 어머니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 한 자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토시 하나까지도 적으려고 노력을 했었다.
작은 종이에 많은 내용을 적으려다 보니 그 내용은 자신 외에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네, 그 메모지를 보면서 형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마음?”
“네, 그렇습니다. 어떡하면 하나라도 더 적으려고 이쪽저쪽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걸 보면서 이 정도의 열성과 마음이라면 뭘 하든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박범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린 현성이 고작 메모지 하나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까지도 읽어낸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순간엔 어떡하든 아버지를 위해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런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음으로 느낀다? 그것도 이제 고작 스물네 살짜리가…….
박범수는 현성을 보며 물었다.
“메모지 하나로 그걸 느낀다고?”
“물론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저는 메모지에서 형님이 아버님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느꼈습니다.”
“그래서 425나에 대한 믿음이…….”
“네, 맞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든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음…….”
여전히 쉽게 이해가 안 가는 박범수였다.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장 궁금한 걸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넷이요.”
“스물넷…… 그래,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게 바로 그거야. 이제 고작…….”
그때였다.
박범수를 지켜보던 박희철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범수야.”
“네? 아, 네…….”
“사람이 말이야, 때로는 나이가 단지 숫자에 불과할 때가 있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이로 모든 걸 평가하지 말란 얘기야. 지금 네가 볼 때는 어린 현성이가 메모지 하나로 너의 마음을 안다고 하니까 이해가 안 가는 거 같은데 그런 판단은 잘못됐다는 거야.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나이가 꼭 중요한 건 아니란 얘기야.”
박희철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나 혼자만의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현성이는 남들하고 다르다고 생각한다.”
“네? 그건 또 무슨…….”
“내가 지금까지 현성이를 6년째 지켜봤지만 나는 어리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단다. 어쩌면 창피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때는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고 느낀 적도 많다면 믿겠니?”
“그건 솔직히…….”
박범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박희철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걸 이해한다는 건 쉽지는 않을 게다. 그 문제는 일단 그렇게 넘어가고 어쨌건 중요한 건 현성이 너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하니 그걸로 만족하자.”
“…… 네.”
박범수는 다른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얼핏 생각해도 지금 당장 이해하고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희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 그럼 이제 준비해볼까?”
“네? 준비요?”
“그래, 이젠 그동안 공부한 네 실력을 보여줘야지. 들어가서 종이하고 펜을 가지고 오너라.”
“아…… 그거요.”
박범수는 그제야 생각난 듯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박희철이 현성을 보며 말했다.
“고맙네.”
“네? 제가 뭘…….”
“역시 자네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나는 그저 김치찌개가 맛있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에도 아들 녀석의 마음을 읽다니…… 하여간 고맙네. 그리고 잘 부탁하네.”
“아버님도 참…….”
현성은 박희철을 바라보며 씩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후.
커다란 달력을 들고 나타난 박범수.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은 피식 웃었다.
“무슨 종이가 그렇게 큽니까?”
“시험 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국민교육헌장이랑 애국가 그리고 조선의 왕들을 다 적으려면…….”
“네? 누가요?”
현성은 박범수의 말을 끊으며 바로 물었다.
그러자 박범수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다시 되물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누가 그런 시험을 본다고 했냐고요?”
“어? 그건…….”
박범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박희철을 향했다. 어차피 3년 동안 자신을 가르친 사람은 박희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엔 박희철이 황당하다는 듯 현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박희철이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테스트한다는 게 그거 아니었는가?”
“아니요,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어? 이상하다, 난 분명히…….”
피식.
현성은 웃고 말았다. 물론 처음에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었다. 그 이유는 박범수가 워낙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로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제일 황당한 건 박범수였다. 아버지의 지시로 3년 내내 달달 외우다시피 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헛수고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그때 현성의 말이 이어졌다.
“자, 그럼 이제부터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테스트? 어, 어 그래.”
박범수는 어쨌건 테스트를 본다기에 달력 뒷면을 펼친 후 현성을 똑바로 쳐다봤다.
꿀꺽.
긴장하기는 박희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때 현성의 입이 열렸다.
“1번!”
“…….”
“아버님의 성함을 쓰세요.”
“응? 지금 아버지의 성함이라고 그랬어?”
“네.”
현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박범수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박희철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2번은 어머님의 성함입니다.”
“…….”
박범수는 어머니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어머니라면 두 분이 계신다. 친어머니, 그리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새어머니.
‘누구를…….’
잠시 고민하던 박범수는 신명순이라는 이름을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어차피 친엄마인 ‘유영숙’이라는 이름은 가슴에 묻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확인한 현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3번, 큰 형님의 이름을 적으세요.”
“큰형? 민석이 형 말이야?”
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민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박민석이라는 세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자, 이번엔 형님의 이름을 적으세요.”
“뭐라고? 내 이름을 적으라고?”
“네.”“아니, 왜 내 이름을……?”
박범수는 고개를 들어 현성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테스트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적으라고 하더니 그다음엔 또 미국에 있는 형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당연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테스트를 받는 입장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적었다.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다.
문제는 마지막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범수 본인의 이름을 적으라고 하니 이건 뭔가 싶었다. 아무리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한두 살도 아니고 서른다섯이나 먹은 자신한테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현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야 완성이 되니까요.”
“완성?”
“네, 가족의 완성이요.”
“…….”
박범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 현성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가족?’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말이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집에 가고 싶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그렇게 10대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면서 지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고.
그때부터는 머릿속에 가족이란 말은 이미 잊은 후였다.
세상은 어차피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보니 사람에 대한 정 같은 건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가족까지도.
그렇게 대학까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한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이곳이 일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것이 교포 2세와 동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몇 년은 사업체가 조금씩 성장하는 맛에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 화근이었다. 투자를 늘리고 규모를 키웠는데 나라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업자는 어느새 자기 몫을 챙겨 떠난 상태였고 쓰러지는 사업체의 부채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2년을 더 버텼지만 더 이상 버틴다는 게 의미가 없었다. 결국은 모든 걸 포기하기로 했고 더 이상 미련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전화를 했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야 말로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 전화를 끊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다시 온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조건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게 3년 전이었다. 그렇게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아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엔 김치가 사람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3개월이 지나니 그다음부턴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입맛이 변하고 말았다.
유년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10대의 시절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랑 목욕탕도 가고 낚시도 다니고 장날이면 시장에 나가 짜장면도 먹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시간을 채우다 보니 어느 순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제는 그런 아버지와 김치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처음엔 실패했지만 두 번째는 보란 듯이 성공한 김치전을 먹으며 이게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얼핏 생각났던 사람이 미국에 있는 형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 현성의 ‘가족’이란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던 말이다.
박범수는 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가족이라고 그랬어?”
“네, 가족이요. 이제 형님의 이름까지 적어야 완성이 되는 겁니다. 4번을 완성해야 그다음 문제가 나갑니다.”
“그다음 문제?”
“당연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테스트인데 사람 이름만 4명 적고 끝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박범수는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적기 시작했다.
“다 적었습니까?”
“응, 다 적었어.”
“그럼 이제 그 이름 옆에 형님과의 관계를 적으세요.”
“관계?”
“네, 관계요. 설마 관계라는 말을 모르는 건 아니지요?”
씨익.
박범수는 현성을 보며 웃어 보였다. 그리곤 이름 옆에 순서대로 적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나]현성이 다시 물었다.
“다 적었습니까?”
“보다시피…….”
그나마 다행인 건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한글은 제대로 쓴다는 것이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응? 갑자기 뭐가?”
“네? 아, 그런 게 있습니다.”
“사람이 싱겁기는…… 그리고 오늘은 내가 입장이 입장인 만큼 참는데 다음부터는 그런 말투 안 참을 거야.”
“네? 무슨…….”
현성은 황당할 뿐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희철을 바라봤다. 혹시나 박희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박희철 또한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았다.
현성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물었다.
“형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사람은 원래 내 눈의 들보는 못 보는 법이야.”
“네? 들보요?”
들보라는 말에 현성은 더 황당했다. 일본에서 20년을 넘게 산 박범수의 입에서 ‘들보’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들보라는 말은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나무를 말하는 것이지만 조금 전 박범수가 말한 ‘들보’는 성서에서 나오는 말이다. 물론 그 뜻은 자신의 잘못이나 흠 정도로 해석하면 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을 그가 썼다는 것이 황당할 뿐이었다.
“내가 3년 동안 나름대로 공부 좀 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현성은 그제야 박범수의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그 말뜻을 모르고 쓴 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결국은 현성 자신이 그에게 실수를 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고.
그때 박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나보고 뭐라고 그랬어?”
“네?”
“그런 게 있다고 그랬지? 내 말이 틀려?”
“아…….”
현성은 그제야 박범수가 무슨 말을 지적하는지 알았다. 그건 바로 조금 전에 박범수가 글씨는 엉망이어도 한글은 바로 쓰기에 고맙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그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었었다.
현성은 그렇다고 일부러 설명하기도 애매해서 ‘그런 게 있다’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말이 박범수한테는 거슬렸던 것이다.
이제야 알아챈 현성은 어쩔 수 없이 박범수를 보며 그 이유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잘못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현성의 설명이 끝나자 박범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런 이유였어? 난 또 나를 무시하는 줄 알고, 그러면 됐고, 자, 이제 다음 문제는 뭐야?”
“…….”
현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하는 박범수를 보며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분명한 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박범수는 3년 동안 많은 공부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잠깐 생각을 하던 현성이 입을 열었다.
“거기에 적힌 네 사람을 뭐라고 하죠?”
“날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요? 어서 말해 보세요.”
“이거야 원…… 가족, 됐지?”
“맞습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여기서 문제는 끝이었다. 어차피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현성의 입에선 엉뚱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자, 5번 문젭니다. 가족이란 무엇인지 논술하시오!”
“…….”
박범수는 입을 다문 채 그저 멍하니 현성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