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20)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20. 낯선 여자의 향기(120/192)
#120. 낯선 여자의 향기
2024.03.29.
석양이 질 무렵 메르힌 부인은 에시카에게로 향하는 발을 재촉했다.
부푼 꿈을 안고 수도에 상경했던 때만큼이나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사업은 나날이 부흥하고 있었고, 남편도 그녀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다.
처음에는 노선을 잘못 탄 것이 아닌가 불안해한 적도 있었지만, 에시카와 협업하며 나오는 모든 성과들은 그런 걱정을 잊게 해 주었다.
황태자비 전하는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메르힌 부인은 정말이지 평생 그녀와 우정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녀의 손에는 공방에서 제빵사들이 최선을 다해 만든 케이크 박스가 들려 있었다.
제국 디저트의 새로운 유행을 이끌어 갈 그것은, 동방에서 온 찻잎으로 만든 녹차 케이크였다.
“……따라와, 내 방으로 가지.”
그래, 우연히 낯익은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 황태자 레스반 데온 루세인의 목소리였다.
발걸음을 멈춘 메르힌 부인은 기둥 너머의 광경을 보고 흠칫 몸을 숨겼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게 하는 황태자, 레스반이 한 여자와 마주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 위, 처음 보는 여자가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여자의 금발은 석양에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얇디얇은 그녀의 옷은 바람에 사르르 흔들렸다.
“…….”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멀리 있어서 레스반의 눈 속에 담긴 감정까지는 읽어 내지 못했지만, 제 손 위에 여자의 손을 올리게 한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방금 들은 말, 그 말이 메르힌 부인의 귓속에서 맴돌았다.
“내 방으로 가지.”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오며 여자의 발을 가린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새끼발가락이 드러나는 구두가 보였다.
메르힌 부인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황태자가 초대한 저 여자는 코르티잔이 틀림없었다.
귀족을 상대로 몸을 파는 고급 매춘부.
심지어 그런 매춘 파티를 즐기는 남자 귀족들의 모임까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문란하게 산다고 해도, 에시카의 안목으로 선택한 황태자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끝내 화가 끓어오른 메르힌 부인은 두려움도 잊고 황태자에게 따지기 위해 기둥 뒤에서 나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드레스 자락에 발이 걸려 앞으로 그대로 자빠지고 말았다.
충격이 몸을 강타하고, 들고 있던 케이크 박스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몸의 충격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이었다.
‘그분이 어떤 상처를 가지고 계신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제국에서 에시카의 이혼 사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에시카의 친구와 바람을 핀, 그 뻔뻔한 칼리안 클라우스.
그 과정에서 에시카가 받았을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강인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메르힌은 같은 여자로서 에시카가 겪는 불의에 분노했고 그녀를 응원했다.
“……흑…….”
메르힌 부인은 절뚝이며 일어섰지만, 황태자와 아까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저 뒤로 멀어져 가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꼭 연인처럼 보였다.
메르힌 부인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를 어떡해야 하지.”
**
“그래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지었군요.”
메르힌 부인의 사연을 들은 에시카의 입가에는 미소가 고여 있었다.
“뭐…… 확실히 고민될 만한 일이죠.”
친구 남편의 수상한 행적을 목격했을 때, 그것을 친구에게 말해 주냐 마느냐의 문제는 여자들을 고민하게 한다.
말해 주는 것이 옳기는 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몰라도 될 진실이 있으니, 말해 주었다가는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을 알고도 이혼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생각해 보자.
만약 그 사실을 몰랐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할 수 있겠지만, 사실을 알고 나서는 원치 않는 진실의 문을 마주해야 했다.
“부정하거나, 그 사실을 알게 해 준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을 테고요.”
화가 난 채 자신을 찾아왔던 아리아 하인즈를 떠올리는 에시카였다.
에시카는 담담한 표정으로 포크로 녹차 케이크를 떠서 먹었다.
메르힌 부인은 여전히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누군가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겠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메르힌 부인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에시카를 보았다.
“고맙다고.”
에시카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오듯 눈에 물기가 서렸다.
에시카는 빙긋 웃으며 메르힌 부인에게 말했다.
“진실은 덮는다고 덮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 있죠. 특히 백년해로하는 부부 사이에서는요.”
“……맞아요. 황태자비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메르힌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힌 부인의 남편은 그녀에게 반했을 때 구두 안에 깔창을 잔뜩 넣었다. 자신의 약점인 작은 키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 깔창을 깔고 결혼 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침대에 들어오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니.
“그리고…… 저는 황태자 전하와의 결혼 생활만큼, 우리의 우정도 소중히 여겨요.”
에시카가 메르힌 부인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만약 그런 것을 보고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메르힌 부인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거예요.”
“황태자비 전하…….”
“내 동생이 되겠다고 하더니, 남편의 수상한 행적을 보고도 숨긴다면 그건 옳지 않죠.”
“……네.”
메르힌 부인은 자신이 고민했던 부분을 긁어 주는 에시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에시카는 현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현명한 이 분을 두고 황태자께서는 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여요.”
에시카는 메르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메르힌 부인의 선의도,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했던 맹세도 믿는답니다.”
“……아…….”
“물론 이런 제보를 알게 된 이상 정당한 확인 절차는 필요하겠지만요.”
에시카가 녹차 케이크 조각을 또 입에 넣었다.
메르힌은 흔들리지 않는 에시카의 모습에 감탄했다.
만약 자신의 남편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울고불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시카의 표정은 너무도 태연하고 여유로워, 존경심까지 들게 했다.
에시카는 그러니까, 그녀 자체만으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랑은 에시카에게 삶의 한 부분일 뿐 그녀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메르힌은 한참 동안 에시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절대 에시카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에시카의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태자비 전하, 녹차 케이크의 맛은 어떠신가요.”
그리고 오늘 용건에 대해 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에시카는 입을 열었다.
“풍미가 좋아요. 하지만 조금 더 달콤하면 좋을 것 같네요. 크림을 더 얹는다던지.”
“네, 그럼 그렇게 제작하도록 주문할게요. 황태자비 전하.”
**
방으로 들어온 레스반에게서는 분명 여자의 향유 냄새가 났다.
그것은 간혹 칼리안에게 가까이 따라붙었을 때 그에게서 나곤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후각이 예민한 에시카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연히 레스반을 맞았다.
“오늘도 에릴 퓨즈라는 작자와 예법 수업을 했나?”
그는 에시카의 책상 위 타메론 경전을 힐끗 보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툭, 툭, 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그것은 손쉽게 풀려 레스반의 쇄골을 드러냈다.
에시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평소와는 다른 단답이었다.
에시카의 눈을 마주한 레스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오늘은…….”
그가 뻗은 손은 에시카의 볼을 감쌌다.
손바닥의 차가운 감각이 살갗을 타고 신경으로 흘러들었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혹은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군.”
“그러긴 한데, 그보다 더 먼저 제게 할 말이 있지 않으신가요?”
“…….”
“전하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궁금해요.”
에시가의 받아치는 말에 레스반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글쎄, 특별한 일이라. 그다지.”
확실히 레스반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그런 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에시카의 일에 대해서는 꽤 민감했다.
그녀가 불편해할 만한 것들은 속속들이 알고 미리 조치했고, 신경 쓰일 만한 것들도 없게…… 조금 과할 정도로 처리했다.
“다른 때와 같았어. 그대는 어땠지?”
레스반은 에시카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지만 에시카는 가슴 한구석의 오래된 흉터가 찌릿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느끼기를 원하지 않았던 통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