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62)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62. 그림자와의 이별(162/192)
#162. 그림자와의 이별
2024.04.24.
버들잎은 봄바람에 흔들리고, 연못 위의 연꽃은 동그랗게 피어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작은 꽃배에 봉침을 베고 누워 혼자 풍류를 즐기고 있던 화안공자 연망생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는데, 배가 미미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뱃머리 위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여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의 윤곽은 희고 또렷했으며 눈빛은 또렷했고 남장을 하였으나 몸의 여린 굴곡을 보아하니 여자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누구시오.”
“조용. 아무 일 없는 척 가만히 계시오.”
묻는 말에 대답은 해 주지 않은 그녀는 냅다 서늘한 살기를 내뿜더니 몸을 숙여 연망생의 발치에 누웠다.
그리고 협박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허튼 소리 하면 죽을 줄 아시오.”
머지않아 전각에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도망친 누구를 찾는 듯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의 시선이 연망생에게도 닿았다.
하지만 거리가 가깝지 않아 마치 연망생 혼자 나룻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배의 바닥에 한 사람이 더 누워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연망생은 제 다리께에 새우처럼 누워 움츠리고 있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보지 마시오. 눈치챈단 말이오.”
그녀는 목소리를 죽이고 화를 냈다. 제 발에 닿은 그 손가락은 섬섬옥수처럼 가늘고 예쁘다.
기녀들 중에서도 이렇게 예쁜 손은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사연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내 눈이 자꾸 보게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이요.”
연꽃 피어난 연못에서 꽃놀이를 즐기고 있던 연망생은 영령을 놀리듯 말했다.
정말 죽여 버릴까. 품 안의 단검이 떠올랐지만 여기서 피 냄새를 풍기는 것은 잡아가 달라고 저들에게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저들에게 잡히면 죽는 것이오?”
“닥치래도!”
영령은 애가 탔다. 천마잠형술을 쓰더라도 아버지의 수족, 귀살마귀 혈운풍의 시야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도망친 마인들을 찾는 데는 도가 텄으니 무공을 쓰지 않고 이렇게 숨는 것이 차라리 발각될 확률이 적을 터.
그런데 배 주인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미친놈이라니. 운도 더럽게 없다.
“말해 주지 않으면 떠들 거요. 객이 주인을 모르는 체하니 불청객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지.”
한량 같은 남자의 고개가 전각 쪽을 향하자 영령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망할. 죽지는 않아도 죽는 것보다 더한 꼴을 봐야 하오. 내가 그 꼴을 당하면 다 당신 때문이오.”
무림맹주의 수염을 다 뽑아 버린 덕에 하마터면 정사대전을 일으킬 뻔한 일 이후, 반성하며 폐관 수련을 한다고 벽곡단과 물만 가지고 자진해서 천잠고에 들어간 영령이었다.
제 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천마교주이기에 철저한 방비를 했으나 영령은 이레만에 그곳에서 탈출해서 십만대산을 내려왔다.
“흠…… 그렇다면 딱한 사정이구려.”
한량이 뚫어지게 영령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전각에서 영령을 찾던 자들은 그녀를 찾지 못하고 물러났다.
뱃놀이를 하고 있는 청년이 다소 의심스럽기는 했으나 객주에게 그의 정체를 은밀히 전해 들은 혈운풍은 굳이 수색하지 않기로 했다.
황궁과 얽혀서 좋을 것도 없으며, 황자가 영령을 숨겨 줄 이유도 없으니.
한편 전각의 수색조들이 물러갔음에도 연망생은 영령을 향해 장난을 걸었다.
“내 시를 하나 읊고 싶은데 들어 주겠소? 그대를 보고 떠올린 오래된 시인데.”
“저들이 가면 꼭 당신을 죽여 버릴 것이오.”
“당신 같은 미인과 뱃놀이를 하며 죽다니 그 또한 영광이지.”
“망할 자식!”
화를 내면서도 영령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나고 자라면서 이렇게 뻔뻔하고 파렴치한 인간을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사내들이란 독영 오라버니처럼 조용하고 무게가 있어야 멋있는 것인데, 이 한량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미인이니 어쩌니 지껄이고 있었다.
“뭐 하는 것이오!”
“그리 들으면 어깨가 배길까 하여 고쳐 주는 것이오. 어떻소, 편하지 않소?”
“제기랄……!”
그는 영령의 머리를 살짝 들어 제 허벅지를 베게 하더니 태연히 시구를 읊기 시작했다.
“曾經滄海難爲水 除却巫山不是雲 (증경창해난위수 제각무산불시운)”
‘창해를 본 후에는 강물이 물 같지 않고, 무산의 구름을 보고 나면 다른 것은 구름처럼 보이지 않네.’
영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목소리는 장난을 치던 때와 다르게 청량했으며 어디선가 은은한 비파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며 희미한 연꽃 향이 코끝에 담기고 그의 눈에 담긴 물결은 일렁였다.
“取次花叢懶回顧 半緣修道半緣君 (취차화총라회고 반연수도반연군)”
‘많은 꽃을 보아도 즐겁지 않은 이유는, 반은 도를 닦았기 때문이고 반은 내 마음속 당신을 그리기 때문이라네.’
시를 읊던 남자가 고요한 눈으로 영령을 보았다.
그의 눈매는 깊었고 영령을 보며 위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붓으로 그은 듯 유려했다.
**
그날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 버렸었지.
서슬 퍼런 마기를 풍기는 놈들 사이에서 자라온 영령에게 그는 꽃 피고 달 밝은 봄밤의 수려한 경치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세상에는 이렇게 곱고 나긋나긋한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었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지만 처음으로 싹튼 사랑은 영혼과 몸을 휘감는 덩굴이 되어 있었다.
냉궁에서 시간을 죽이며 서책을 들여다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 영령의 황제가 제게 바친 시는 당나라 시인 원진의 시 離思(리사)였다는 것을.
그는 당대의 명기이자 여류 시인인 설도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원진은 경조윤(京兆尹) 위씨와 결혼하였으며 첩도 여럿 들였고, 설도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에시카는 무릎을 숙여, 제 앞에 죽어 엎어진 칼리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다 감겼으며 그 입술 사이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에시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장이 이제 끝을 맺어 간다.
두터워진 구름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빗물이 얼굴에 닿아 흘러내리고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칼리안의 차가운 손에도 이슬 방울이 툭, 툭, 흘러내렸다.
“에시카.”
그녀의 앞에 선 레스반이 에시카를 바라보자 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제 막 복귀한 레스반의 경갑옷 위로 흙먼지가 끼어 있었다.
에우니브스를 정복하자마자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었다.
그의 눈매는 짙었으며 눈동자는 에시카의 감정을 살피는 것처럼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태자비를 해하려는 자를 즉결 처분하는 것은 당연하였으나, 그는 에시카와 칼리안의 인연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의 생이 아닌 이전의 생에 이어진 그 애증의 악연을 말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에시카는 레스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주세요.”
레스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에시카의 속을 가장 빠르게 알아차리는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도 쉽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비에 젖은 늑대처럼 레스반은 가만히 있었다.
제가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는 여자가 다음 명령을 내릴 때까지.
그것이 서로의 가슴을 아프게 할 만한 것이 아님을 바라며.
“……손수건이요.”
어떤 전쟁터에 나설 때보다 더 날카로운 신경을 세운 채 서 있던 레스반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레스반은 에시카를 보았다.
잠시 시선을 아래로 하고 있던 에시카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레스반과 눈을 맞추었다.
어두운 풍경 속에서도 그 푸른 눈에는 빛이 있었으며 그 안은 식지 않은 온기로 차 있었다.
에시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는 레스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레스반은 울컥, 가슴이 덜컹이는 것을 느꼈다.
사랑이란 약자가 되는 일이니. 이는 남녀를 구분치 않으며, 과거와 미래를 구분치 않는다.
그녀가 길게 늘어뜨린 그 그림자를 외면하였으나 그것은 간혹 레스반을 잡고 늘어지고는 했다.
한낱 지나갈 뿐이었던 것임에도 그녀가 얼마나 그것을 힘껏 쥐고 있었는지 알았기에.
마냥 독점하고 싶었으나 그녀를 사랑하기에 차마 그 창백한 그림자를 강제로 검으로 떼어 낼 수는 없었다.
“…….”
거세어지는 빗물이 레스반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물방울이 코와 턱을 타고 흘렀다.
에시카의 마음을 확인한 레스반은 감정을 자제할 수 없었다.
그 격랑은 그가 지금까지 조금이나마 불안해하던 것들을 깨어 부수며 해일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그는 곧장 에시카의 어깨 뒤쪽으로 손을 밀어넣으며 그녀의 목뒤를 받치고는 제가 갈구하던 그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입술에 휘감기고 호흡이 얽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