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66)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66. 새 황제(166/192)
#166. 새 황제
2024.04.26.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이고, 서늘한 금빛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그의 그림자는 키만큼이나 커서 멀리 늘어져 있었으며 반듯하고 늠름한 자세에 그림자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레스반 데온 루세인, 그는 서른하나의 나이로 튜레시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황위를 물려받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으나 살아 있는 황제의 선위로 황제가 되었다는 점은 황가의 역사상 특별한 일이다.
그의 즉위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의 모든 백성들이 환호했다.
그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전설 같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구국의 영웅이기도 했다.
레스반의 즉위가 변방의 적들과 주변 왕국에게는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전쟁광이자 무자비한 수복자로 알려진 레스반의 이름에 우는 아기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으니.
“…….”
즉위식을 마치고 황제 내외는 선황을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선황을 태우고 갈 마차의 행렬은 매우 화려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마차 열 개에, 열두 명으로 구성된 기사단 셋과 수백의 병사들이 동행하니 말이다.
그는 수도 토레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 루펜으로 갈 것이며, 그곳은 너른 초원이 있고 날씨도 연중 온화한 편이었다.
그리고 바다와 접해 있어서 언제든 바다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라 노년을 보내는 데 썩 좋다고 알려져 있다.
“폐하.”
“레스반, 내 아들.”
황제는 주름진 손을 뻗어 레스반의 볼을 쓰다듬었다.
레스반의 검은 머리 위에는 튜레시안의 황제를 상징하는 화려한 관이 얹혀져 있었다.
“네가 태어나던 날 비와 바람이 유독 거셌고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쳤다. 어찌나 날씨가 안 좋던지 밤인지 낮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지.”
“…….”
“그리하여 너의 삶이 그리도 궂을까 걱정하였는데 현실이 되어서 늘 너를 보면 속이 복잡했었지. 자식의 고난에 즐거울 아비는 없으니.”
선황의 눈은 레스반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안에는 그들이 겪어온 수난의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반역과 레스반의 형제들의 피가 뿌려진 황궁, 노예로 떠돌다가 귀환한 레스반과 절치부심하여 이를 악물고 나라를 회복시켜 가는 부자.
소년의 몸으로 전장에 나서서 첫 영토 수복을 이루어 낸 레스반이 피범벅이 되어 황궁에 귀환한 일.
그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족쇄를 차고 걷듯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니.
그 과거를 떠올리며 눈을 한 번 깜빡인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구름이 개면 환한 해가 나타나듯 영원이 궂은 인생은 없으니, 이제, 너의 해가 떴구나.”
모든 과거의 실체는 흐려지는 것이며 오늘의 하늘은 푸르다.
폐황후로 인한 실책과 실패는 황제 혼자서 오롯이 책임지고 아파하는 것이니, 이제 그것마저 물러난 선황과 함께 유령 같은 과거가 될 것이다.
그 말에 레스반의 입가가 옅게 비틀렸다.
“비 갠 뒤의 하늘이 더욱 맑은 법입니다. 날이 궂지 않았다면 몰랐을 기쁨이죠.”
레스반의 말에 선황의 입에도 미소가 얹혔다.
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말하지 않아도 부자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내 선황의 시선은 에시카에게 향했다.
“……며느리. 내 며느리야.”
선황의 말에 에시카의 선명한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어 줘도 좋았을 것을, 하며 몇 번이나 후회했지만 이리 돌아서 만나게 된 것도 신의 안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시카 루세인, 한때 에시카 브리기트였고, 한때는 에시카 클라우스였던 그녀는 떼 지어 있는 무수한 닭들 중 유일하게 한 마리 불새처럼 독특했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군주가 품어야 할 여인은 비범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이 튜레시안을 통틀어 여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여인이었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비범한 제 아들과 천생연분으로 어울릴 만큼 비범한, 그런 여인.
“너는 타메론께서 이 나라를 위해 내려 준 백은의 양이다.”
선황의 말에 에시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제국민들은 백은의 양이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고 칭송했지만 에시카로서도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에시카가 ‘백은의 양’으로 불리우게 된 사냥제에서의 결정적인 계기는 사교의 세력들이 그녀를 백은의 양으로 간주하여 피 흘리게 하며 죽이려 했다는 것과, 그녀가 황금 사슴을 길들여서 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적들의 계략을 역이용해 한 방 먹여 준 것 뿐이니, 쉽게 말하자면 ‘조작’의 영역이다.
“……폐하.”
에시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떠나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자신을 신뢰하는 선황에게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저는…….”
“내가 어릴 적 푸른 용과 함께 노닐었다는 설화를 제국민들은 진심으로 믿는다. 실상은 온순한 뱀 한 마리를 키웠을 뿐임에도.”
웃음기를 띤 선황의 말에 에시카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제국의 울타리가 신성한 수호 아래 있다는 호사만으로도 제국민들은 희망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니, 본래 황족은 신성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에시카는 한참 동안 선황을 바라보았다.
선황이 하는 말의 속뜻이 그녀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오리아트 루세인은 무능한 황제가 아니었다.
전국민이 하나의 신을 믿는 제국은 신정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질 우려가 크며, 황정이 신정의 위에 머물기 위해서는 황족이 신의 사랑을 받는 신성한 존재라는 미화가 필요하다.
균형이란 이름으로 황후를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실상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에시카는 생각했다.
비록 결과는 황후의 반역으로 실패했지만 에시카는 황후에게서 물려받은 강력한 신정의 주관권으로 신전들의 위에 군림한다.
이제 백은의 양으로서 제국민들에게 칭송받는 그녀를 거스를 수 있는 신관은 없고 말이다.
이러한 에시카의 존재는 황제가 된 레스반에게도 그 입지를 단단케 하는 힘이 될 것이다.
“폐하의 깊은 뜻, 숙지하겠습니다.”
에시카는 미소를 띤 채 선황에게 대답했다.
선황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언제나 똑똑한 아이이지. 내 평생을 돌아보아도 너를 며느리로 들인 것만큼 잘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에시카에 대한 깊은 신뢰가 선황의 눈동자 안에 서려 있었다.
이제 황제는 뒤돌아서서 마차들 중 가장 화려하고 안락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기사에게 막 출발 신호를 보내기 전, 뭔가 떠올랐는지 멈칫했다.
마차에 탄 선황은 창문을 통해 황제 내외에게 신호했다.
눈썹을 꿈틀 움직인 레스반은 에시카와 함께 몇 발작 가까이 다가갔고, 그런 둘을 보며 황제는 소리를 낮추어서 속삭이듯 말했다.
“좋은 소식이 들리거든 곧바로 연락토록 하거라.”
선황의 표정은 진지했고 에시카는 괜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어떤 아버지들에게 후계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
반역하여 사형 당한 폐황후의 방은 폐쇄되었고 에시카는 황궁 내에서 새로운 방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기존에 쓰던 황태자비의 방보다 두 배는 넓고 화려했으며, 튜레시안 제국의 황후에게 걸맞은 방이었다.
시녀들 둘과 여러 하녀들이 에시카에게 붙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관식을 위해 장식했던 머리 핀의 개수는 마흔 개를 넘어갔고, 그녀가 입은 드레스에도 무수한 핀과 떼어 내기 어려운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속눈썹은 또 얼마나 많이 붙여야 했던가.
본디 눈썹이 풍성한 에시카였지만 원래 그처럼 거대한 황궁 행사에서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정치적 관례이기도 했으니, 에시카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하녀들은 금가루가 반짝이는 에시카의 눈 주변을, 화장수를 이용해 조금씩 지웠다.
폐황후 시절에는 그 심기를 거슬릴까 옷 벗기는 것조차 살 떨리는 과정이었는데, 그녀가 조금 화내면 매를 맞고 황궁에서 내쫓기는 것이고, 많이 화내면 동쪽 폐허에 묻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시카는 하녀 하나가 실수로 머리카락을 두 가닥이나 뽑았다가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었음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이나 하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그리하여 하녀들은 무거운 에시카의 옷과 화장을 벗겨 내는 일을 그녀가 바라던 대로 신속히 끝낼 수 있었다.
“예, 황후 폐하.”
화장을 지우고, 화려한 레이스가 있긴 하지만 꽤 가벼운 흰 드레스를 입은 에시카는 개운한 느낌으로 기지개를 켰다.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 그냥 진기를 내뿜어서 옷이고 화장이고 태워서 벗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었는데 그랬다가는 새로운 마녀가 황후가 되었다는 괴담이 돌겠지.
“나가 보거라.”
에시카의 말에 그들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여자들이 나가자 방은 더욱 드넓어 보여 조금 허전하기까지 했다.
‘오늘은 할 일이 많겠지.’
에시카는 캄캄한 창을 보며 잠시 레스반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황제로 책봉된 대관식일까지 자신에게 올 여유는 없…….
“황제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 에시카는 눈썹을 움찔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