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67)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67. 빈말의 무게(167/192)
#167. 빈말의 무게
2024.04.26.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대관식의 에시카도 아름다웠지만, 레스반에게는 다소 수수한 지금의 모습이 더욱 꿈결처럼 여겨졌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유혹하듯 살랑이는 것 같은 은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있고 살갗이 은은히 보이는 흰 드레스는 시선을 빼앗는다.
붉은빛과 노랑빛이 뒤섞인 전등석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더 깊어 보이게 했고 몸의 고혹적인 분위기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도 그녀의 향기를 느끼게 했다.
에시카의 피부는 매끈한 도자기 같았고 고운 손와 곱게 닫힌 입술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목울대를 일렁이게 했다.
역시 정복으로 환복한 레스반은 에시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서 있던 에시카를 마주 보며 입술을 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은.”
그는 에시카의 얼굴을 향해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지문이 살짝 닳은 남자다운 단단한 손가락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볼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있었다.
“제가 한 말의 무게를 알고 꼭 그것을 지켜야 해.”
타이르는 듯한 레스반의 낮은 목소리에 에시카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이렇게 깊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때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가 없다.
뇌쇄적이고 형형한 금안에 빨려들어 생각이 비어 버리는 느낌이다.
“…….”
미묘한 거리에서 머물던 레스반의 손이 에시카의 볼을 감쌌다.
그의 손은 다소 차가웠고 피부에 닿자마자 아찔한 느낌을 주었다.
“황후의 말은 황실에 대한 신뢰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말이지.”
“…….”
“비록 그것이 빈말일지라도.”
레스반의 입술이 비뚜름히 비틀렸다.
에시카의 볼을 훑던 손은 이제 에시카의 말랑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마치 소중한 전리품을 보듯, 혹은 궁지에 몰린 쥐를 어찌할까 고민하는 고양이의 표정처럼 다채로운 빛이 그의 눈동자에 맺혀 있다.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그럴 리가, 단지…….”
레스반은 즐겁게 입술을 달싹였다.
“선황께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거야.”
그제야 에시카는 아까 선황을 배웅할 때의 일을 떠올렸다.
마차의 출발을 잠시 지연시킨 선황은 황제 부부에게 후사를 당부했다.
떠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에 에시카는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확신을 주지 않으면 마차 출발이 한없이 지연될 것 같았다.
루펜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질 테고, 그러면 그렇잖아도 건강이 좋지 않은 선황의 몸도 더욱 피로할 것이다.
“머지않아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에시카의 말에 선황의 얼굴에 화색이 퍼졌다.
“그래, 머지않아, 언제? 내 목숨이 석 달 정도 남았다던데 그 안에 소식을 줄 것이더냐?”
물론 기뻐하면서도 그는 철저하게 기한을 상정했다.
마치 에시카가 걸려든 것을 기뻐하듯 말이다.
임신이 어디 오롯이 인간의 뜻으로 되는 것이던가.
에시카는 이 다급한 독촉에 조금 난감했지만, 그래도 선황을 마음 편히 보내기로 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야수와도 같은 눈빛으로 레스반이 에시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이었다.
“황의에게 석 달 안에 임신이 되는 방법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
그 선명한 눈빛에 에시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 했지만 레스반의 단단한 손이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주 합방하라고.”
이제 피임 성분이 있는 영양제를 주던 황후도 없었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위협 받을 염려는 없었다.
적들은 이제 전부 사라졌으니 말이다.
에시카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따끔거리며 뜨거워졌다.
시도 때도 없이 자주라니…….
“나는 그대의 신뢰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황의의 말에 충실히 따를 예정인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지?”
이미 에시카를 제 몸 안에 가두다시피 한 레스반의 물음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였다.
에시카는 물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빠져나갈 곳이 없었으니.
“……!”
레스반은 그녀의 몸을 들어 침대 위로 눕혔다.
침대는 이전에 에시카가 쓰던 침대보다 훨씬 넓었고 더욱 푹신했다.
“폐…….”
레스반에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시카의 입술이 막혔다.
하루 종일 참아왔던 갈구의 호흡이 얽히며 입 안을 정복해 왔다.
마침내 튜레시안의 정상에 오른 남자. 제국의 새로운 황제 레스반 데온 루세인.
그는 오로지 에시카만을 지독하게 원하고 있었다.
화려한 수가 놓인 얇은 드레스가 침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시카는 일렁이는 눈으로 레스반을 보며 말했다.
“황제가 되셨으니 체통을 지키셔야죠, 너무 여인에게 빠져있는 것도 안…… 읏…….”
여린 살결에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그는 황후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시카는 레스반을 달래듯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었지만 그는 제 뜻대로 행동했다.
귀를 막은 독재자가 되기라도 할 다짐인 것처럼.
“폐하. 레스반, 폐하.”
레스반의 숨결은 차가운 축의 입술과는 다르게 뜨거웠다.
그 괴리는 흥분점을 자극하는 하나의 요소였으며 에시카의 눈썹은 비를 맞는 마른 땅처럼 끊임없이 움찔거렸다.
은사와도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침구에 비벼져 사르륵대며 흐트러진다.
“잠깐만요…….”
에시카가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에시카가 뜨겁게 느끼는 살결을 매만지고 입맞추며 그녀를 괴롭혔다.
이토록 탐구적이며 장난스러운 면모를 대관식 내내 어떻게 숨기고 있었을까 의심될 정도로, 그의 자극은 끊이지 않았다.
“쉬이.”
레스반은 저를 끊임없이 밀어내려는 에시카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제가 바라던 곳에 고개를 파묻었다.
절대 고수의 몸은 단단하여 제가 치울 수 없다는 것을 에시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몇 번이나 눅진해서 점점 그럴 힘을 잃어 가고 있었고 말이다.
“여기는 이제 내 방이야, 에시카.”
에시카와 결합하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가물거리는 천장을 보며 에시카는 제가 제 무덤을 팠음을 깨달았다.
한낱 정과 동정심 때문에 신세를 망친 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물론 신세를 망치지는 않겠지만 그렇잖아도 달군 쇠 같던 레스반을 좋은 핑계로 자극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윽, 레스반……!”
“개인적인 차원으로는 회임이 늦게 되었으면 좋겠군.”
욕정이 섞인 바람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회임이 늦어질수록, 그 핑계로 그녀의 방에서 매일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뜨겁게 황의의 말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업보의 한 갈래일지도 모른다.
레스반은 하나의 생에 더해, 이번 생에서도 에시카를 만나기 전까지 수절하며 살아왔으니.
원래 늦게 든 바람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 황실의 웃어른은 없고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에 올랐으니 에시카는 그를 오롯이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잠깐, 잠깐요.”
하나의 뜨거운 열기가 지나간 뒤 에시카가 실색하여 말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내일의 정무가…….”
“에시카.”
레스반의 넓은 어깨와 가슴, 이마 어디에도 땀 한방울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에시카의 호소를 무력하게 몰아가고 있었다.
“벌써 황후 노릇을 하느라 머리는 애쓰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대의 몸은…….”
레스반의 짙은 금안이 에시카의 눈동자 속을 꿰뚫어 보았다.
“이렇게 착실히 반응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전의 에시카는 레스반이 혹사시킨 날이면 다음 날 피로해하고는 했지만 힘을 되찾고 나서는 밤의 일 때문에 몸살이 날 리는 없다.
미미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레스반을 보던 에시카는 홱 뒤돌아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뒤를 레스반이 강하게 감싸안았다.
이내 그의 손길이 에시카의 몸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에시카의 발끝이 다시 움찔대기 시작했다.
레스반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에시카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에시카.”
그리고 고개를 틀어 돌린 에시카의 입술에 짙게 입을 맞추었다.
숨이 오가고, 방의 분위기도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다음 날 에시카는 레스반이 나가자마자 생각했다.
조만간 암시장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정력부처럼 혈기를 들끓게 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 반대의 것도 있을 터이니…….
“으으…….”
레스반은 날이 밝자마자 멀끔한 얼굴로 정무를 보러 나갔다.
이제 그는 튜레시안 제국의 황제로서 이전보다 더욱 많은 일을 맡을 것이다.
그리고 에시카는…….
“황후 폐하, 들어도 되겠습니까?”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시카는 이제 황후로서의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잘 먹고 잘사는 마음 편한 인생이라는 당초의 목표에는 살짝 빗나갓지만, 권력과 재물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니…….
목표는 그럭적럭 성취한 것으로 치기로 했다.
“들거라.”
황후의 신방에 시녀가 들었고, 문밖에 많은 하녀들이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드레스를 갈아입고 치장을 한 뒤 오늘의 일정대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시녀 뒤로 들어온 하녀는 헤모스가 정성스레 만든 맛있는 아침 식사도 가져왔다.
“간밤 무탈하셨는지요.”
“……뭐, 그렇다.”
에시카는 스푼을 든 손을 살짝 떨 뻔했지만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은 내공의 작용으로 작은 막에 뒤덮여 있었고, 안의 잡다한 소리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저…… 황후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에시카가 식사를 하는 도중, 경험 많은 시녀는 입을 열었다.
“칼리안 클라우스 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