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1)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71. 에시카의 기강 잡기(171/192)
#171. 에시카의 기강 잡기
2024.04.27.
“음…….”
에시카는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휑할 만큼 넓은 방, 서너 사람이 누워도 넉넉할 만큼 큰 침대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누워 있었다.
레스반이 이른 새벽에 바깥으로 나서는 소리를 들었었다.
에시카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그는 더 일찍 나가서 정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으으…….”
에시카는 손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풀어헤쳐진 앞섶의 리본을 다시 매기 시작했다.
시녀가 들어오면 어차피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으니 말이다.
“황후 폐하, 식사를 들여도 되겠습니까?”
배게에 치대어지느라 머리끝도 꽤 뻗쳐서 그것을 다듬고 있는데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시장해지기 시작한 터라서 에시카는 승낙의 사인을 보냈고, 머지않아 시녀가 트레이에 아침 식사를 담아 들고 왔다.
야채 수프와 빵, 그리고 과일 샐러드였는데 구성은 단촐해도 헤모스의 정성이 들어간 것답게 매우 냄새가 좋았다.
에시카는 속을 데우기 위해 스푼을 들어 접시 위에 올렸다.
“…….”
그리고 어느 순간 미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몇 초 동안 가만히 있던 에시카는 트레이에 스푼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에게 명령했다.
“잠시 나가 있거라.”
“예?”
“나가 있으래도.”
“예…… 알겠습니다.”
시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갔고, 에시카는 침대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잊어버린 운기 조식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몸의 기를 순환시켜 이질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용도였다.
영령이었을 적에도 이것은 여러 번 해 보았으니…….
“…….”
에시카가 눈을 감자 속눈썹이 눈 아래에 빗살 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의 이마와 코는 둥글고 오뚝했으며 닫힌 입술은 차분한 인상을 주었다.
여리지만 뼈대가 강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기운이 넘실대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 분이 지난 뒤 푸른 기운은 다시 갈무리되듯 그녀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에시카는 천천히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또렷하게 모양을 드러낸 눈매 안 푸른 눈동자는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시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고, 이내 그것을 제 아랫배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
식사가 끝났고, 시녀는 반이나 남긴 에시카의 접시를 보며 갸웃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황후가 된 에시카는 황태자비였을 때에 비해 할 일이 많았다.
황제위에 오른 레스반만큼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신정의 주관권자로서 에시카는 책임 있는 주요 신관들과의 대화를 위해 황궁 신전으로 향했다.
사교의 소굴이나 다름없던 그곳은 이제 완전히 청소되었고, 정교를 믿는 신관들이 모든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고귀하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에시카가 웅장한 회의장에 들어가자 사제복을 입은 신관들이 황족에 대한 예를 인사로 표했다.
마치 타고난 황족처럼 에시카의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녀의 표정은 고고해서 몇몇은 내심 감탄했다.
대다수의 신관들은 에시카가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상인 가문 출신의 이혼녀라고 해서 속으로 은근 깔보았다.
신전을 드나드는 귀족들이 그런 말을 하니 동조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 대한 인상이 뒤바뀐 때는 사냥제 이후였다.
사교가 ‘백은의 양’으로 경계하는 인물이 그녀였다니. 대다수는 놀라워하면서도 이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공공연히 드러났던 사교의 뿌리인 폐황후가 점차 뿌리가 뽑혀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그들은 정말 그녀가 백은이 양이 아닐까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오늘 그대들을 모은 것은 신전의 재정 논의를 위해서요. 각 신전의 헌금과 기여금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의견을 전달했음에도 그 누구도 참여하지 않더군.”
“…….”
“하여, 얼굴을 보고 다시 말하려 그대들을 불렀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에시카는 태연하게 상석에 앉아 말했다.
몇몇 이들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장 깊은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
정교의 수장들은 에시카 루세인, 새 황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종교적인 차원의 구원자이기는 했다.
신전을 잠식하고 있던 사교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아 소탕해 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백성들에게 ‘백은의 양’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 역시 신전의 권위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황후는 어디까지나 외부의 인물에 불과하다. 그들은 파릇파릇 돋아난 새로운 신정의 주관자에게 제 목줄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송구하지만 황후 폐하.”
토레스에서 가장 큰 신전을 주관하고 있는 주교가 입을 열었다.
“역사를 보았을 때 황족께서 신전의 재정에 포괄적으로 관여하셨던 일은 없었습니다. 신전은 신전의 독립적인 재정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의 말에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가 아닌 정교를 믿는 그들에게 에시카는 지금까지 아군이었으나, 그녀가 자신이 참견하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참견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에시카는 신관들의 반응을 보다가 태연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에 연로한 신관 한둘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황후가 되었다고 오만하기 그지없군.’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고귀한 자리에 앉았다고는 하나 그녀의 외양은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일 뿐이었으니.
사내들이 주축이 된 집단은 그런 여자들을 얕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에시카는 여유로운 듯 미소까지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한 생각으로 그 어떤 신전도 재정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단 말이오?”
회의장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마치 항의라도 하듯 어느 신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는 새 권력자를 길들이는 방식이기도 했다.
사교의 교리로 미쳐 버린 폐황후에게는 먹혀들지 않았지만, 현재의 황후가 머리를 쓰는 사람이라면 결코 제멋대로는 하지 않으리라고 신관들은 믿고 있었다.
새 황후로서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참으로 유감이군. 나는 본디 신의 뜻이 제국에 남아 있다고 믿었으나…….”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에시카의 성정이었다.
귀족과 황족 중 최소한의 도덕적 제약이 없는 이는 없으니, 뒤로는 엉망진창인 인생을 즐기더라도 겉은 교양 있고 선한 척하고 다닌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본능 아니던가. 평판은 중요하니까 말이다.
“오늘 그대들을 보니 그렇지 아니한 것 같군.”
에시카의 말에, 신관 하나가 눈썹 끝을 올리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황후 폐하.”
“제국민들의 대다수는 나를 백은의 양으로 알고 따르고 있소.”
에시카의 말에 신관이 다소 불손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은의 양은 충실히 타메론의 뜻을 따를 뿐이지, 신전의 재정에 관여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른 신관들이 입술을 비트는 것이 보였다.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이것도 그들이 에시카에 대해 무지하다는 하나의 증거였다.
“풋.”
에시카의 입술에서 성마른 웃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성스러운 신전 회의장에서 피식거리며 웃는 에시카의 모습에 몇몇 신관들은 불쾌한 안색을 가리지 않았다.
에시카의 웃음은 교활해 보였으며 그녀의 푸른 눈은 악당처럼 빛나고 있었다.
웃음을 그친 뒤 에시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상상은 나를 재미있게 해. 하지만 어쩌지?”
에시카는 손을 들어 턱을 괴며 좌중의 그들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나는 그대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협박하고 있는 거야. 사교의 세력을 한 번 더 뿌리 뽑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이야.”
수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몇몇은 아둔하여 에시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말을 꺼내 에시카를 자극한 신관을 포함한 일부의 인원은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에시카를 바라보았다.
에시카의 눈은 차가운 즐거움에 차 있었고, 그 입술에 자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살아 숨쉬는 채로 벌레들에게 제 몸을 뜯어먹히고 있던 그대들이 예뻐서 내가 그대들을 살려 주었다고 생각하나?”
에시카의 말에 몇몇 신관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 잡아 죽이기 귀찮아서 조금은 놓아주었더니 은혜를 몰라보는군.”
회의장의 분위기는 소름 끼치는 살기로 뒤덮였고,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에시카는 최소한 순진한 선인의 축에 드는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폐황후, 그 미친 여자…… 어쩌면 그 미친 여자보다도 더 막강한 기운의 여자다.
그랬기에 폐황후를 잡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것임을, 그들은 이제야 실감했다.
“화…… 황후 폐하, 어째서.”
“이미 나는 타메론의 충실한 선지자가 되어 버렸는데 내가 이 손가락으로 그대들을 가리켜 사교의 잔당이라고 지적한다면.”
에시카는 손가락 끝을 들어 올리며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제국민들은 나를 믿을까. 아니면 그대들을 보호하려 같이 화형대에 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