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2)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72. 아주 중요한 이야기(172/192)
#172. 아주 중요한 이야기
2024.04.28.
군대가 하나의 나라를 점령한다 하더라도, 패전국 군주의 노예들을 다 잡아 죽이는 일은 없다.
주요 부하들의 목만 베고, 나머지는 살려 두는데 이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관 놈들은 그 뜻을 전혀 모른 채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아남은 줄만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에시카가 다리를 꼬고 관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에시카의 충격적인 말에 회의장에는 깊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신관들의 얼굴은 흑 빛이 되어 있었다.
젊은 황후를 길들여 보려 했건만 사실 자신들이 그 발아래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타…… 타메론이 두려우시지 않습니까. 그…… 그런 거짓을……!”
눈치 없는 신관 하나가 말을 더듬으며 에시카에게 항변했다.
에시카는 그 말에 입술 끝을 올리며 대답했다.
“아아, 타메론의 뜻이라…… 폐황후가 자주 쓰는 말이었지. 처형장에서조차 타메론의 이름을 외치다가 장렬한 번개에 온몸이 불태워졌어.”
폐황후의 마지막 모습을 본 신관들은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참으로 그것은 신벌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그 일 이후로 제국민들은 백은의 양 에시카에 대해 더 강한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그녀가 이 자리의 신관들을 가리키며 사교의 세력이라고 매도한다면,
흥분한 제국민들의 돌팔매가 자신들을 향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대도 폐황후의 뒤를 잇고 싶은 모양이로군.”
에시카의 살벌한 말에, 방금 항변했던 신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에시카의 태연한 얼굴은 사람의 안면이 아닌 것 같았다.
폐황후는 에시카를 마녀라고 지칭했다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 아닙니다.”
이러다가 폐황후를 따르는 자로 몰려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황후 페하.”
처음에 신전의 독립성을 주장했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 모인 신관들 중 가장 발언권이 큰 자였다.
그의 목덜미에서는 아까부터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이곳을 나서는 순간 에시카는 황군들을 들이닥치게 할 수도 있었다.
현숙하고 온화한 황후라면 신관들을 몽땅 잡아 죽이지는 않겠지만 에시카는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들이 사교의 잔당들이라며 뒤집어씌운다면 누가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폐황후와 사교의 만행이 알려지고 온 제국민이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명령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곧장 이행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황후 폐하께 결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교가 소리 높여 말하자, 다른 신관들이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라 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황후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목숨 줄을 틀어쥔 채 협박하고 나서야 곧장 말을 들어먹는 신관들의 모습에 에시카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비틀렸다.
비열한 인간들과의 관계는 동물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가 가늠되지 않았을 때는 알랑거리며 건방을 떨다가, 몸집이 크고 이빨이 날카로운 적 앞에서는 깨갱하는 것이 말이다.
고개를 숙인 채 긴장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에시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근 들어 생긴 신체의 변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꼬고 있었던 다리에 근육이 배기는 기분이었다.
“용서는 그대들의 성의를 보고 결정하기로 하지.”
그리고 회의장의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고개를 숙인 와중에도 모두의 시선이 에시카를 향해 있었다.
마냥 아름답고 젊은 황후였던 그녀를, 이제 모두가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괴물 보듯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경외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특효약이리니.
문을 닫은 에시카는 한 번 피식거리고는 움직였다.
**
“……그래.”
집무실에 앉아 서류에 서명을 하던 레스반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시종의 보고를 들었다.
눈빛은 짙은 와중에도 그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시종은 보고를 끝내고 고개를 한 번 숙인 뒤 바깥으로 나갔고, 레스반은 즐거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에시카, 아름다운 그의 악녀.
신전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소식은 들었다.
오늘 신관들을 참석하게 해서 회의를 열었다길래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설득할까 기대했는데…….
협박이라니.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그녀답다.
이러니 매번 원하지 않을 수 없지.
에시카는 무력하고 약한 것들은 돌 보듯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때로 가상한 자비를 베풀 듯 변덕스럽게 그것들에 손을 내밀고는 했다.
그러나 악하고 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비가 없었다.
세상 최고의 악당은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듯, 그 존재조차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한 그녀의 성정이 레스반은 못내 사랑스러웠다.
그리하여 또 밤이, 함께 있는 시간이 그리워진다.
늙고 건방진 신관들에 대해 툴툴대고 비웃으며 고운 눈썹을 일그리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누가 들어 보면 미쳤다고 혀를 끌끌 찰 정도로, 그는 에시카에 미쳐 있었다.
오후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바깥의 풍경이 어둑해지고서야 그의 정무가 끝났다.
레스반은 또 에시카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다.
에시카는 매일같이 제 살결에 코를 묻는 자신을 다소 귀찮아하는 것 같았지만 레스반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튜레시안의 황제였고 가장 고귀한 이였으며, 두 생을 이어 오로지 그녀에게만 묶여 자제하고 있던 욕구를 이제야 해방했는데 물러설 리가 없다.
“…….”
시녀가 황제의 입장을 알리고, 레스반은 에시카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코끝으로 에시카의 향기가 흘러들었다.
특별한 향유를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시카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향이 났다.
에시카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레스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신전 회의장에서 깽판을 친 일과는 무관하게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이다.
레스반은 곧장 침대 옆에 걸터앉아 에시카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전쟁광 황태자로 불리웠던 레스반의 평판은 황제가 된 지금에도 크게 나아진 것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망하면서도 두려워했고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풍기 문란의 유흥을 즐기는 귀족들은 황명으로 그런 추잡스러운 것들이 금지되고 난 뒤, 혹시 과거의 일로 발목이 잡힐까 덜덜 떨고 있었다.
레스반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은 레스반이 이토록 제 아내에게만은 다정하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에시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랑에 빠진 보통 남자처럼 단내가 났다.
“오늘은 어땠지?”
그는 에시카의 눈을 보고 하루를 물었다.
레스반을 빤히 보던 에시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 들으셔 놓고, 왜 항상 다시 듣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남의 입으로 듣는 것과 그대의 입으로 다시 듣는 것은 다르지.”
“저라면 시종에게 황후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말라고 하겠어요. 긴장감을 떨어뜨린다고.”
레스반은 가까이 얼굴을 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황제는 그럴 수 없어.”
황제는 이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손안에 넣고 보고 있어야 한다.
오늘 에시카가 회의장에서 신관들을 몇 마디로 제압한 일도, 정치의 영역이었으니.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반영되어야 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칫…….”
에시카는 그녀답지 않게 피식 바람을 빼며 볼멘소리를 했고, 레스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어쩌지. 이대로 눕혀서 방금의 소리를 더 내어 보라고 위협할까, 장난스러운 욕정이 그의 눈동자에 깃든다.
눈치 빠르게 그의 눈빛을 알아챈 에시카는 손을 들어 레스반의 가슴을 밀었다.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밤에는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
레스반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무릎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것이 점차 허벅지로 올라가리라는 것은 뒤를 안 봐도 예정된 사실이다.
에시카는 손을 뻗어 무릎에 얹은 레스반의 손 위를 덮었다.
레스반이 눈썹을 살짝 굳히며 에시카를 바라보았다.
늘 혀용했던 사탕을 빼앗기기라도 한 소년처럼.
“진지하게 들으세요, 중요한 것이니까.”
“와인이라도 가져올까. 우리의 중요한 이야기는 발코니가 더 어울리는데.”
“아뇨. 그냥 이대로 이야기할래요.”
에시카는 시선을 살짝 내리며 눈을 일렁였다.
에시카는 지키고 싶은 것이 많지 않았다.
이전 생부터, 그러한 것들은 죄다 빼앗겼었기에.
그리하여 겁이 없는 그녀였지만 이제 다시 무언가를 잃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
에시카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느낀 레스반이 장난기를 빼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에시카의 무릎에서 손을 치운 채 짙은 눈으로 에시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봐, 에시카. 들을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
그 눈동자가 에시카의 속을 꿰뚫는 것 같았다.
두근, 두근. 에시카의 심장이 빠른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잠시 아래를 향하던 에시카의 흔들리던 시선이 레스반과 마주쳤다.
그 푸른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또렷했지만 긴장감이 차 있었다.
“……저…….”
그리고 흰 얼굴에는 그녀답지 않게 약간의 홍조가 올라 있었다.
에시카가 입술을 달싹였다.
“……배 속에 새 생명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