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3)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73. 편한 발걸음(173/192)
#173. 편한 발걸음
2024.04.28.
달 밝은 밤, 선황 오리아트는 침상에 누워 연신 기침을 콜록거렸다.
그의 옆에는 근심한 얼굴의 황의들이 서 있었고 그가 아끼던 시종 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료를 보던 황의는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보통 의지의 사람이었다면 무너지다시피 한 이런 육체로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급보를 보냈습니다.”
오리아트는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창 바깥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숨이 점점 차오르고 있어서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곧 도착하실 것이니, 조금만 힘을 내십시오. 폐하.”
오리아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 자신이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죽음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레스반과 아스티아를 제외한 모든 황자와 황녀들이 20년 전에 모두 죽었다.
그들을 낳은 자신의 반려 역시, 그날 숨을 거두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원망했으나, 그는 제국의 황제였고 나라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 선봉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레스반이 기꺼이 서 주었고 끝내 치욕을 씻어 내고 복수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제 타메론 경전의 명계로 가더라도, 먼저 떠나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 바르게 설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미련이 남는 것이 있다면…….’
생명이 깜빡이듯 눈가가 경련하고 달의 모양새가 일그러졌다.
수 초 뒤 초점이 다시 맞았지만 오리아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한 걸음 더 다가온 죽음의 신호라는 것을.
‘그래.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도 있는 것이지.’
오래된 나무 표면처럼 마른 입술에 쓸쓸한 미소가 고였다.
죽음의 장에서 선조들을 만난다면 조금 난감할 것 같기는 하다.
이 나이에 손자 소식 한번 듣지 못하고 가다니…….
루세인 황가의 후계가 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일었다.
오리아트는 눈을 반쯤 뜬 채 가쁘게 숨만 내어 쉬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들과 며느리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으나 이미 시야는 천천히 점멸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
단지 레스반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폐하.”
귀하게 얻은 며느리의 목소리도 들렸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되었다, 하고 오리아트는 눈을 감았다.
심장은 천천히 멈춰 가고 있었고 온몸에 도는 피의 속도도 느려지고 있었다.
“제가 회임을 했습니다. 폐하.”
그리고 그때, 유일하게 살아 있는 청력을 통해 들려오는 에시카의 목소리.
캄캄해진 세상 속, 광활한 우주를 향해 첫 발을 내디디던 오리아트는 발을 멈추었다.
그는 어둠과 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루세인 황가의 후손이, 황후의 배 속에 있습니다. 편히…… 떠나십시오. 아버지.”
문득 오리아트는 제 손을 들어 그것을 보았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들의 손이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오리아트의 주름진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마지막 길에, 너희가 크나큰 선물을 주는구나.’
삶을 등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은 미련.
그것마저 훌훌 털어 버린 오리아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이제 완전히 멈추었고 촛불처럼 마지막까지 일렁이며 살아 있던 청력도 안온한 어둠에 잠기듯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오리아트는 자신이 떠나고 통곡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제가 걸어야 할 길의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둘러싸인 검은 우주에 둥근 통로가 보였고, 그곳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20년 전에 죽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오리아트를 기다려왔다는 듯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늙은 왕의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그가 달리기 시작하자 훈풍이 그를 감싸고 그들을 잃었을 때의 젊은 모습이 된 오리아트는 더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가 마침내 그들에게 도착하자, 모두가 팔을 뻗어 그를 안았다.
오리아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선황의 눈을 타고 귀 쪽으로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선황의 최후를 본 시종들과 신하들은 크게 통곡하였고, 레스반은 손을 뻗어 에시카의 어깨를 감싼 채 굳은 얼굴로 선황의 얼굴를 보고 있었다.
목숨이 위중하다는 것조차 마지막 순간까지 알리려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이를 듣게 되어 에시카와 급히 달려온 지금, 선황은 야속하게도 유언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가 그리도 듣고 싶어 하는 소식을 가져왔으니, 그것을 듣고 편히 떠나셨을까.
레스반은 착잡한 표정으로 선황의 얼굴을 보았다.
“…….”
에시카 역시 잔잔한 파동이 이는 복잡한 눈으로 선황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선황과 첫 대면을 했을 때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었으니 재혼에는 문제가 되는 것이 없을 테고, 2황자의 결혼 날짜보다는 일찍 잡아야지. 레스반이 명색이 황태자인데 말이야.”
“…….”
“나는 황태자를 말릴 생각이 없네.”
각오했던 황가의 반대는, 선황의 강력한 뜻 덕분에 직면할 일조차 없었다.
그가 에시카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복수에 대한 뜻도 그리고 지금의 행복도 모두 성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편히 떠나십시오. 아버님.’
그녀는 들리지 않게 입술을 달싹여 속삭였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며 고인에 대한 예를 취했다.
여기저기에서 울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 울음 소리는 하루 뒤에는 토레스와 제국의 온 지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오리아트는 지략이 뛰어나거나 특별히 유능한 황제는 아니었으나, 제국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제국을 다시 세운 황제였다.
어려운 시기에 굴하지 않고 꺾이지 않고 나아가던 선황의 지구력과, 그로 인해 맞게 된 풍요를 모든 제국민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뒤늦게 도착한 아스티아가 달려와서 차갑게 식은 오리아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서도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릴 때 따로 커서 부녀의 정은 없었지만, 아스티아는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리지 않았다.
아스티아에게는 아이가 있었고 아이들을 잃었던 황제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을지,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하고 동정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에시카는 천천히 손을 제 아랫배로 올렸다.
그리고 선황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더 건네었다.
‘당신의 소원이었던 이 아기, 잘 지켜내겠습니다.’
그것이 에시카가 오리아트를 위해, 그리고 레스반과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밝은 달은 쓸쓸함과 울음 소리로 찬 침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늘 밤, 유폐된 브레이튼에게도 소식이 들릴 것이지만 그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선황의 장례 기간, 일주일 중 5일 동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제국민들은 비통해했고 신전에 찾아와 선황을 기렸다.
황궁 안 선황의 기념비에도 그를 기리는 흰 꽃다발들이 무수히 놓였다.
외국에서도 조의를 표하는 손님들이 다녀왔고, 카모스에서는 이파르를 호위하던 기사 레온이 이파르 대신 와서 조의품을 건네었다.
오늘은 장례 기간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회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황후 폐하.”
언젠가 에시카와 검을 맞댄 적 있는 그는,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에시카에게 축하를 건네었다.
“루세인 황가의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에시카는 수수한 회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제 임신 초기인지라 그녀의 배는 평소처럼 홀쭉했다.
에시카는 찻잔을 든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원래 제가 행사를 주관해야 했지만, 폐하의 뜻이 완강하셔서 이렇게 손님맞이밖에 할 수가 없네요.”
에시카는 선황의 장례를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레스반은 그녀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정무에 바쁜 그인데 장례마저 직접 주관하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 에시카의 배 속에 움트고 있는 새 생명 때문이었다.
레스반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무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황후 폐하를 소중히 여기셔서겠죠.”
레온의 말에 피식 웃은 에시카는 문득 떠오르는 남자에 대해 물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아…… 그게…….”
에시카의 물음에 레온의 표정이 문득 살짝 어두워졌다.
몇 초의 정적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종…… 아니, 가출하셨습니다. 헤노모스도 잔뜩 가져가셨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니까요.”
레온의 한숨 섞인 그 말에 에시카는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 짙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파르는 뭔가에 매여 있기에 너무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이기는 했다.
절대고수들은 죄다 괴인이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괴인이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리고 그때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와, 다가오는 레스반의 모습이 보였다.
에시카는 눈썹을 움찔 움직였고, 레온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