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4)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74. 임신 초기(174/192)
#174. 임신 초기
2024.04.28.
온몸에 생채기가 난 레온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땅을 박차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괴물은 너무도 단단하고 강대했지만, 꼭 그를 베고야 말리라는 강한 의지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이앗! 윽!”
하지만 검을 휘두르기도 전 절묘한 발차기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에서 몇 바퀴는 뒹굴며 매캐한 흙먼지를 만들었다.
꾹 쥔 레온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은 이미 몇 발치나 멀리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고, 만약 이것이 실전이었으면 제 목은 여러 번 떨어졌을 것이다.
괴물의 동작은 화려하지 않았고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처럼 절도가 있었으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헉…… 헉…….”
황궁 대련장, 검을 떨어뜨린 레온은 가쁜 숨을 내어쉬고 있었다.
그의 턱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 뒤에야 그는 제 앞으로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괴물, 아니, 괴물 같은 실력의 남자.
“……헉…… 헉…….”
유려한 턱선과 예술 작품처럼 반듯하게 잘 생긴 이목구비.
서늘한 눈매 속 지루한 빛을 담은 황금안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카모스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술 실력을 가졌다는 자신이지만 절대 이길 수 없는 소드마스터의 강자. 레스반 데온 루세인.
“…….”
레온을 내려다본 레스반은 돌아서서 에시카를 힐끗 보았다.
깔끔하고 오만한 금안의 시선과, 차분한 푸른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는다.
회색 드레스를 입은 에시카는 의자에 앉아 레스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백색 부채가 들려 있었는데, 연무장의 흙먼지가 밀려들 때마다 부채로 얼굴을 가려서인지 먼지가 부채살 사이사이 껴 있었다.
“……헉…… 헉…….”
그러니까 숨을 거칠게 내어 쉬고 있는 레온이 갑자기 이곳 대련장에 온 경위는 갑작스러웠다.
황후와의 티 타임에 나타난 레스반이 대련을 해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소드 마스터와의 대련은 기사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게서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으니 말이다.
소드 마스터에 이르지 못하는 그는 어쩌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대련장에 갔다.
하지만 대련에서 레스반은 검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검은…… 그러니까, 레온의 공격을 지루하게 막아낼 때만 몇 번 쓰고 말았다.
그는 주먹과 다리를 주로 사용했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전쟁광답지 않게도 말이다.
그 긴 팔과 다리로 절도 있게 몸을 틀어 가며 레온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물론 레스반의 잘난 얼굴은 어느 순간에도 무미건조했기에, ‘신나다’는 표현은 그에게 두들겨 맞은 레온이 느꼈던 개인적인 감상이다.
“…….”
레온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깨달음은커녕……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어질어질거렸다.
“제가 졌습니다.”
어차피 더 덤벼 보았자 레스반의 머리털 하나 건들지 못할 것임을 레온은 이 대련에서 똑똑히 알았다.
레스반은 고고한 그의 검술을 보여 줄 생각은 없는 것 같고 더 버텨 보았자 두들겨맞기나 하겠지.
“…….”
그의 말에 레스반이 장식용으로나 들고 있던 것 같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레온 역시 흙바닥에 뒹굴고 있는 불쌍한 제 검을 집어 들어 챙겼다.
그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다시 카모스로 돌아가는 날이었으니까.
그들의 모습을 응시하던 에시카는 웃음 섞인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손님 대접이 너무 박한 거 아니에요?”
그날 밤 에시카의 침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그녀가 말했다.
전등석의 명도를 조절한 레스반은 그녀의 곁에 누워 제 넓은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방 안은 캄캄했지만 은은한 달빛이 들어와 너무 어둡지는 않았다.
“…….”
말이 없는 레스반을 바라보던 에시카는 작은 웃음을 섞어서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인 건 아는데…….”
그녀의 손이 레스반의 넓은 가슴에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레스반의 심기를 건드리듯 가녀린 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레온한테 말이에요.”
레온은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달랑거리는 검집의 궤적이 눈에 밟힌다.
흙먼지에서 여러 번 굴러서 바지도 엉망이 되어 있었지.
“아까 저에게 이파르 왕세자의 이야기를 해서 심술부린 건 아니죠?”
그 말에 레스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할 법도 한데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얼굴을 기울여 에시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볼에도, 입술에도 한 번씩 맞추었다.
사실상 에시카의 말이 맞다고 실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에시카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레스반을 장난스럽게 힐난했다.
“너무해요, 그렇다고 그렇게 두들겨 패다니…….”
레온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제가 먼저 물어본 거라고요. 그냥 별다른 뜻 없이.”
별다른 뜻 없었다는 에시카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레스반은 살짝 굳히고 있던 눈꼬리를 미미하게 내렸다.
이파르의 이야기를 하며 입안 가득 미소를 물고 있던 에시카의 모습에 가슴속에 뱀이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레스반이었다.
얼굴만 반들반들한 놈을 에시카가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지만, 영 눈에 거슬렀던 전적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레스반은 비스듬히 시선을 맞추어 에시카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이파르의 부하들은 좀 얻어맞아도 되니, 그대가 신경 쓸 필요 없어.”
“…….”
“주인을 잘못 섬긴 탓이지.”
레온이 들으면 발끈할, 다소 뻔뻔한 소리였다.
피식, 웃은 에시카는 레스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연 레스반이 그녀의 입에 제 호흡을 불어넣었다.
뜨거운 숨이 입 안을 감싸고 그녀의 말랑한 입술을 희롱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열기가 짙어지면 안 되었다.
“……음…….”
에시카는 뜨거워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레스반의 단단한 가슴을 조금 밀어냈다.
레스반의 황금안에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욕정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자제해야 할 때라는 것은 알았다.
에시카의 홀쭉한 배 안에 소중한 생명의 씨앗이 싹트고 있으니…….
황의는 당분간 부부 관계를 피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레스반은 눈썹을 굳힌 채 그녀의 가슴께에서 손을 뗐다.
그 표정은 얼핏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눈앞의 사탕을 놓치는 아이처럼…… 허기진 마른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이다가 포기한 듯 다시 다물린다.
에시카는 태연하게 레스반의 팔을 베고 천장을 보았다.
레스반도 천천히 에시카로부터 시선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들었다.
“잘 자요, 폐하.”
레스반은 그 말에 응답하듯 에시카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에시카는 레스반에게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평화롭고 행복한 밤이 지나고 있었다.
**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물은 턱 끝까지 차오르다가 기어이 코를 덮었다.
에시카는 발버둥쳤지만 그럴수록 늪 안으로 끌려들어갈 뿐 나오지 못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에 잠식되어 비명을 지르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시카, 에시카! 정신 차려!”
에시카는 땀에 젖은 채 눈을 떴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얼굴이 굳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레스반과 그 뒤의, 익숙한 모양의 천장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에시카.”
레스반은 젖은 그녀의 볼을 감싸며 선득한 눈으로 물었다.
에시카는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다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꿈을…… 무서운 꿈을 꿨어요.”
무력하게 물에 잠기는 꿈을 꾸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숨은 막혀 오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레스반…….”
에시카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레스반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 에시카를 바라보는데 에시카가 끙끙 앓는 것이 보였다.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아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지만 안색은 더 안 좋아졌고 미간에는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갑자기 팔을 뻗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에시카를 지켜보던 레스반의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그래서 황급히 에시카를 깨웠던 것이다.
“이제 괜찮아. 내가 있어.”
레스반은 나직한 목소리를 흘리며 그녀에게 안도를 주었다.
악몽을 꾸었다고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꼴이람, 에시카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그렇게 레스반을 꼭 안고 안정을 찾고 있던 에시카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그리고 황급히 그를 밀어내었다.
일순간 잊고 있던 무언가가 생각난 것이다.
그녀의 속눈썹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기, 아기가 괜찮은지 확인해야겠어요.”
이내 그녀는 급하게 손으로 아랫배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