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6)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76. 끝이 아닌 시작(176/192)
#176. 끝이 아닌 시작
2024.04.29.
“펠로페 후작의 군납 비리 내역에 대한 조사 내역입니다.”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던 레스반은 리하임 백작의 보고에 그것을 들고 살펴보았다.
읽어 내리는 중 미간 사이에 주름이 졌고 눈썹이 굳었다.
선황대에 있던 일이기는 했지만, 악질적인 방식으로 군수품을 횡령해 온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펠로페 후작저에서 압수한 비밀 장부의 내역과 동일했다.
“이 이름들은…… 여자들을 칭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금요일의 파티라 불리는 매춘과 난교 파티에서 주로 더러운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비리에 연류된 자들에게 여자를 공급하고 매춘을 알선해서…….”
리하임 백작은 말끝을 흐렸다.
조사하면서도 이들의 기행은 쉴새없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귀족의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하고 더러운 거래들, 그것이 펠로페 후작가가 쌓아 올린 명성의 전부였다.
“솎아 내지 못한 쓰레기들은 이번 참에 확실히 솎아내야겠지.”
보고서를 읽은 레스반은 차가운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리하임 백작에게 돌려주었다.
보고서를 돌려받은 리하임 백작은 몸을 숙여 황제의 명령을 대기했다.
“가벤 펠로페의 작위를 박탈하고 군령에 따라 횡령액의 열 배를 배상하도록 한다. 행여 그의 재산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 노역으로 이를 갈음하겠다.”
“존명.”
“또한 이에 연류된 자들도, 황명으로 같은 처분을 내리겠다.”
사교 사냥이 끝나며 귀족 가문들이 한 번 청소되었지만, 그때 휘말려 가지 않은 신심 없는 자들도 있었다.
가벤 펠로페는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묻히는 비밀은 없는 법, 리하임 백작은 큰 규모의 횡령을 발견해 보고를 올렸고 이는 마지막 청소의 시작이 될 것이다.
레스반은 결코 자비로운 황제가 아니었다.
“…….”
리하임 백작은 엄중한 황명을 품고 다시 한번 몸을 숙인 뒤 일어섰다.
그리고 그것을 이행하려 나가려던 차였다.
급히 시종 하나가 달려와 리하임 백작의 몸에 거의 부딪힐 뻔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폐하께 말씀 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
리하임 백작에게 사과한 시종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레스반에게 시선을 돌려 곧바로 보고했다.
“황후 폐하의 진통이 시작되셨습니다.”
그 말에 레스반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
여섯 시간의 진통이었다.
고통을 참는 일에는 익숙한 에시카였지만 처음으로 느껴 보는 출산의 고통은 꽤나 버거웠다.
온몸에 절로 식은땀이 흐르고 이를 악물게 되니…… 새로이 맛보게 되는 고통의 영역에 그녀는 이불을 꽉 쥐었다.
산파는 출산의 진행 사항을 계속해서 확인했고 시녀들은 긴장한 채 준비하고 있었다.
“…….”
밀려드는 진통 속에서도 에시카의 호흡은 일정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산파는 놀란 속내를 숨겼다
출산이 임박해서도 어떻게 이렇게 차분하고 평온할 수가 있을까.
보통 이 정도 진통의 간격과 강도면 다른 여자들은 울면서 몸부림쳤을 것이다.
“데운 물을 준비하세요. 아기가 곧 나올 것 같습니다.”
산파의 말에 시녀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에시카는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또렷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산파는 에시카를 보고 말했다.
“아기를 만날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황후 폐하.”
에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운 눈썹이 진통으로 인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드디어 해산의 시간이 다가왔다.
한편 레스반은 초조하게 문밖을 거닐었다.
튜레시안의 황궁 법도에 의해 해산시에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긴장을 풀어야 할 산모의 정신적 평화와 위생과 관련이 있었다.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군.’
레스반은 생각했다.
마치 수 초가 수 분과도 같았고 수 분이 수 시간과도 같았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분주하게 시녀들이 돌아다니는 소리만 들릴 뿐 비명 소리 한 번 들려오지 않았다.
그 고통을 어찌 참고 있는 것일까.
사내로서는 겪어 볼 수 없는 고통이다.
체감하기에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애-”
레스반의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갔다.
정적을 깨는 그것은 분명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파가 나와 레스반을 맞았다.
“황제 폐하, 경하드립니다. 황후 폐하께서 무사히 황녀 전하를 분만하셨습니다.”
레스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녀의 배 속에 어떤 성별이 있건 축복받을 일이었지만 내심 조금이라도 바라는 성별이 있다면 여아였다.
여아여야 조금이나마 더 에시카를 닮았을 것 같았다.
그녀를 닮은 딸이라, 상상만 해도 기쁜 생각이 드니…….
그런데 내심 바라던 그 일이 일어났다.
레스반은 웃음기를 감출 수 없었다.
“…….”
혹여 아들이 아니라 황제가 실망할까 걱정했던 산파는 레스반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냉철한 황제 폐하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실 수 있는 분이었다니. 놀라울 정도이다.
“그럼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레스반이 에시카의 침실 안에 들어가자, 정리를 마친 시녀들이 그에게 몸을 숙였다.
레스반의 시선은 곧장 침대 위에 파리하게 누워 있는 에시카로 향했다.
그녀의 이마에는 아직도 땀이 맺혀 있었고 그 옆에는 흰 천에 싸인 아기가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아기의 얼굴이지만 레스반은 틀림없이 에시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송송 난 은빛 머리털도 그녀의 색이었으며, 처음 마주한 이 순간부터 반짝이는 후광이 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고생 많았어. 황후.”
레스반은 에시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기력이 빠진 듯한 에시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뼈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맞추어지는 과정도 그저 시원할 뿐이었는데, 이건 조금 지독하더군요.”
에시카는 보통의 여자들처럼 출산을 했다.
어쩌면 골반뼈를 움직여 조금 수월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통을 억지로 누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배 속 아기는 에시카와는 달리 너무도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였으며 혹시 뭔가 잘못하여 해가 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순리에 따르는 모든 과정을 이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련된 몸 때문에 굉장히 순산인 것은 산파가 보증하는 사실이다.
“그래도 이렇게 아기를 낳아 품어 보니…….”
에시카의 시선이 제 옆의 아기에게 향했다.
머리카락도 얼마 없고 눈썹도 드문드문 나 있는 작은 생명체는 간간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벅차오르네요.”
이 순간 느끼는 감정에 대한 대한 가장 간결한 표현이었다.
그녀가 한때 여러 번 바랐으나 한 번도 하지 못한 것.
열 달 동안 그때의 불안을 종종 떠올리면서 최선을 다해 지켜 낸 것.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랑의 결실이 지금 제 옆에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성취감이었다.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한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 것만큼 위대한 성취는 없었다.
마치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자신만 한 것처럼 그녀는 벅차올랐다.
“……에시카…….”
레스반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아기를 안았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아기는 너무도 작아서, 어떻게 이렇게 무력한 생명체가 살아 있는지 의심될 지경이다.
지금껏 한 번도 갓난아기를 안아 본 적 없는 레스반에게 아기는 참으로 신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에시카와 마찬가지로…….
“사랑스럽군.”
아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에시카처럼 제 배 속에 열 달을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기의 작은 몸이 레스반의 황금안에 톡 박혀 들어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애정의 각인처럼 말이다.
눈을 감고 있던 아기가 천천히 눈을 뜨고 레스반을 보았다.
“…….”
아기의 눈은 레스반을 닮은 찬란한 금안이었다.
막 태어난 아기라서 앞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마치 아빠가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기 황녀는 레스반을 보고 있었다.
그 빤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한때 세상이 늘 자신을 시험하며 제 편이 아니었다고 여긴 때도 있었지만 에시카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그가 가장 받기를 원했던 선물이었으며, 그녀로 인해 얻은 아기 역시 그러하다.
“……고마워. 에시카.”
아기를 품에 안은 레스반은 짙고 다정한 눈빛으로 에시카에게 말했다.
서슬 퍼런 황제의 애정 표시에 흠칫한 시녀들과 산파들이 시선을 주고받더니 온전한 세 가족만의 시간을 위해 바깥으로 잠시 물러났다.
“……저도요.”
에시카에게도 레스반과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벅찬 선물이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의 보물들을 바라보는 에시카의 입술에도 미소가 얹혀 있었다.
고통과 분노와 좌절과 복수의 시간은 모두 흘러갔고, 이제 기쁨의 시간만이 남았으니.
시작되는 아침의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