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9)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19. 오래된 꿈(19/192)
#19. 오래된 꿈
2023.12.19.
암흑가에 위치한 아지트에서 회의를 끝낸 레스반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릴 때, 그는 오묘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은발을 높게 묶은 하녀가 무기점에 들어가고 있었다.
둥근 이마와 오뚝한 코, 볼은 조금 붉었고 활기찬 얼굴이었다.
레스반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꿈틀 움직였다.
가까이 맡지 않아도 그때의 향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얀 목선의 형태와 맑고 선명한 푸른 눈.
그녀였다.
“…….”
치명적인 독과 가시가 있는.
그러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과거의 인연으로 비롯된, 자신의 오래된 꿈의 주인인 그 여자.
“황태자 전하.”
뒤에 선 부하 파닉스가, 멈추어선 레스반에게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볼일이 있으십니까?”
“먼저 들어가거라.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겼으니.”
레스반의 명령에 그는 뒤로 빠졌다.
레스반의 시선은, 하녀가 들어간 무기점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입가가 옅게 비틀렸다.
**
“애인?”
레스반은 저도 모르게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
하녀는 푸른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네. 그이에게 선물을 주려고 제작을 맡겼어요.”
“…….”
“기사님도 검을 사러 오셨나요?”
어색하게 미소 짓는 하녀의 얼굴에 레스반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반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이런 반응에는 영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다.
고운 눈썹 사이를 조금 더 좁히게 하고 싶은 충동이라든지.
여느 소년처럼 말이다.
“아니, 그저 그대를 보고 멈추어 섰을 뿐.”
레스반의 말에 에시카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둘 사이에 오랜 정적이 머물렀다.
시원한 바람이 불자 레스반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에시카는 그의 금안 안에 든 생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레스반이 눈썹을 찡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차를 마시고 싶군.”
“……네?”
에시카는 다소 당황스러운 빛을 눈동자에 담고 되물었다.
레스반의 짙은 눈의 표면에 에시카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의 웃음기는 불안을 자극한다.
“애인에게 검을 선물한다니. 영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
“그대가 하녀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채었어.”
에시카는 레스반을 따라, 반쯤은 제 의지와 무관하게 찻집에 들어갔었다.
“왜 그런 귀여운 거짓말을 했는지 궁금해지는군. 클라우스…… 공작 부인.”
그가 살짝 얼굴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당황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실수의 대가였다.
무림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가족이 가족에게, 같은 무림인 연인끼리 검을 선물하고 받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검을 선물한다는 것은 ‘적의’ 혹은 ‘관계의 단절’을 뜻했다.
그런데 애인에게 검을 선물한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황태자는 에시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
잠입과 은닉을 수도 없이 했기에 연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지만…….
이미 제 정체를 아는 자에게 굳이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안다는 것도, 숨겨보았자겠지.
에시카의 말에 레스반은 입술 끝을 올렸다.
“그대가 입은 하녀복에도?”
그의 금색 눈이 에시카의 쇄골 가까이 달린 프릴로 향했다.
노골적이어서 무례할 수도 있는 시선이었지만 누구도 고귀한 황태자인 그가 다른 생각을 한다고 생각지는 못할 것이다.
에시카 역시, 이미 들켜 버린 걸 더 감추려 들지는 않았다.
“그렇습니다.”
“클라우스의 집안 사정이 보기보다 복잡한 모양이군. 공작 부인이 하녀 옷을 입는다니.”
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고 그것을 입으로 넘겼다.
그의 목울대를 보며 에시카는 생각했다.
‘오늘은 재수가 없어.’
운이 따르지 않는 날이 있다.
“그렇다면.”
레스반의 입술이 달싹인다.
“밤중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수에 들어간 것도 그 사정에서 비롯되었나?”
그 말에 에시카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 레스반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거짓말로 얼버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하께서는 클라우스 공작가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고수들은 대부분 감이 좋다.
애당초 감이 좋지 않은 자는 그만한 무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그리고 눈앞의 레스반 데온 루세인은 제국 최고의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침착한 에시카의 말에 레스반의 눈이 나른한 기운으로 빛났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이다. 클라우스 공작가 역시 그러하고. 그대의 남편 칼리안 클라우스는…….”
‘칼리안’이라는 이름에 에시카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을 여유로이 감상하며, 레스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의 충성스러운 공작이지. 그러니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마땅한 일.”
아니다, 황위의 방해꾼일 뿐이다. 레스반은 수도 천도에 앞장서며 훗날 클라우스를 주요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설마 제게 클라우스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실 생각인가요?”
에시카의 차분한 물음에 레스반은 옅은 웃음기를 띠었다.
잠시 후 레스반이 입을 열었다.
“여인을 통해 정보를 훔쳐 낼 만큼 내 소식통이 허술하지는 않아. 나는 그저…….”
레스반의 금안에는 황태자인 자신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앉아 있는 에시카가 비추어 보였다.
저번에 부딪혔을 때의 어색한 연기를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날 정도이다.
하녀인 척을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을 터이니.
“그대가 궁금했을 뿐이야.”
레스반의 말에 에시카의 눈은 잠깐 일렁였다.
그러나 그녀는 큰 동요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은 정무가 바쁘지 않으신가 보군요. 일개 신하의 부인에게 호기심을 가지시다니요.”
알아낼 생각 하지 말라는 방어적인 태도. 조금은 무례하게 들리기도 한다.
“나는 본디 비뚤어졌어. 얻어 낼 것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자에게는, 뭔가 더 얻어 내고 싶어져. 누구이건 상관없이 말이지.”
에시카는 레스반이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나 이미 자신의 성격에 대해 상당히 간파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특히 이런 눈빛이라면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지.”
그러니 더 속여 보았자 어려운 일이고 말을 섞어 보았자 손해이다.
“원하신다면 담소를 나눌 여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정이 복잡한 여자보다는 이야기하실 맛이 나겠지요.”
레스반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글쎄. 이야기할 맛이라.”
창밖을 향하던 그의 지루한 시선이 에시카에게 향했다.
레스반의 저음이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고마운 대답이지만 사양하지. 그대만으로 충분해서.”
그의 금안에 일순간 흉포한 빛이 꿈틀대었다.
일순간 에시카는 등을 따라 삐죽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레스반이 그저 스쳐 갈 인연이 아니라면……?
이 자리는 어쨌든 최대한 빨리 파하는 것이 좋겠다.
“……저는 시간이 늦어서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어쩔 수 없군.”
오랜만에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고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지러웠다.
레스반은 다행히 쉬이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짤랑- 문에 달린 종이 한 번 울리며 두 사람은 차례로 나갔다.
하지만 원숭이도 때로 나무에서 떨어지듯 에시카도 실수를 한다.
찻집을 나서는 계단에서 발을 잘못 디뎠는데 레스반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아 지탱해 주었다.
“…….”
노을을 등진 레스반의 얼굴과 옅게 일렁이는 금안, 그 풍경은 에시카의 뇌리에 꽤 짙게 남았다.
**
결국 어두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에시카는 공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클라우스 공작가에는 워낙 하녀가 많고, 대부인의 변덕으로 해고당하고 새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녀는 의심 없이 새로 옮긴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든 하루였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으려 할 때, 에시카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돌렸다.
“…….”
문 옆 벽에, 칼리안이 등을 대고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썹이 굳은 에시카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칼리안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세게 쥐어 잡은 그 악력에 에시카는 눈썹 사이를 좁혔지만 칼리안의 보랏빛 눈동자는 들끓고 있었다.
“어딜 나갔다가 이 밤중에 들어왔지?”
그의 입술 새에서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놓으세요.”
에시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칼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먼저 말하시오, 어딜 다녀왔는지! 하녀로 변장까지 하고 누굴 만나고 왔는지!”
그가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누굴 만나고 왔냐니, 무슨 뜻이에요?”
“최근 태도가 변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이렇게 몰래 기어 나가서 밤늦게 몰래 들어오는 것을 보면.”
칼리안의 서늘한 눈매 속 눈동자에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만나는 자가 있는 거 아닌가?”
그 분노는 아마 의심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불륜을 의심하는 거군요.”
칼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에시카는 칼리안의 그런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죽건 말건 관심도 없던 작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바깥에 나갈 때 한 번이라도.”
“…….”
“혹은 늦게 들어올 때 한 번이라도 저에게.”
에시카는 차가운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어디에 다녀왔는지, 누굴 만났는지 이야기해 준 적 있으십니까?”
에시카의 말에 칼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칼리안은 정말 그녀가 이런 반격을 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에시카는 더욱 진절머리가 났다.
영령으로서의 기억을 되찾기 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칼리안이 사흘 동안 돌아오지 않자 에시카는 밥도 못 먹고 그를 기다렸었다.
돌아온 칼리안을 닦달하자 칼리안은 친구 결혼식에 갈 때도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하냐며 되레 화를 냈었고 그녀는 쩔쩔매며 칼리안의 기분을 풀기 위해 오히려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 늦었다고 화를 내다니.
“게다가 공작께서…… 제게 불륜을 의심할 자격이 있으신가요?”
유리 아네시스, 칼리안은 그녀에게 알렛 반지를 선물했었다.
그리고 에시카에게 신경 끄라는 듯한 경고를 했었지.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었던 칼리안의 입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과 나는……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