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92)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91화. 시리게 가슴에 박히던 그 밤(192/192)
91화. 시리게 가슴에 박히던 그 밤
2024.01.30.
“처리했습니다.”
겉옷에서 희미한 화약 냄새를 풍기며 들어선 남자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보고했다.
고요하고 어두운 방 안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다.
침대 위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은발의 노신사는 보고하는 남자의 말에 미동조차 없었다.
잠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곁에 있던 비서를 향해 눈짓했다.
“잠시 커튼을 올리겠습니다.”
침대를 향해 알리듯 말한 후,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창으로 향한 비서가 천천히 커튼을 들어 올렸다.
은은한 달빛이 창가를 통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노신사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랜 잠에서 막 깬 듯 희미한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노신사의 낮은 숨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스산한 밤하늘에 어슴푸레한 저 달을 보면 지금도 그날이 떠올랐다.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났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던 그 날 밤이.
어린 손자의 울먹이던 눈동자가 시리게 가슴에 박히던 그 밤.
매몰차게도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그 어떠한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원망했을 테지.
해서 지금껏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겠지.
노신사는 훌쩍 자라 버렸을 손자가 몹시 그리웠다.
아들을 꼭 닮은 그 아이를.
어두워지는 노신사의 표정을 보며, 비서가 조용히 커튼을 닫았다.
말없이 지켜보던 남자도 정중히 예를 표한 후 소리 없이 방에서 나갔다.
노신사는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직접 자신을 찾아올 그 순간을.
* * *
총성이 울려 퍼진 에린즈 대저택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영국 10대 그룹 총수들이 모인 만큼 그 경호 또한 최상급으로 삼엄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침입했다는 사실은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고 말았다.
총성이 울리기 직전, 저격수의 위치를 확인했다는 데이브의 보고를 받고 그를 처리하라 명한 카일은 재빠르게 세희를 찾았다.
발코니로 사라진 세희를 찾아 들어서려는 순간 간발의 차이로 총성 들려왔다.
젠장.
머릿속이 하얘진 카일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날아오르듯 발코니로 향했다.
데이브가 이끄는 본팀에서 분명 저격수를 처리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총성이 들린 것이지?
“세희!”
발코니로 들어선 카일의 시야에 세희와 스칼렛, 두 사람이 뒤엉킨 상태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창백해진 카일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서 있었다.
“스칼렛, 스칼렛!”
뒤이어 들어선 에린즈 회장이 애타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쓰러져 있는 딸을 보며 경악한 에린즈 회장 역시 온몸에 힘이 빠지듯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난 괜찮아요. 넘어진 것뿐이에요.”
스칼렛에게 묻혀 보이지 않던 세희가 몸을 일으키며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하아.”
세희의 건강한 목소리를 들은 카일이 고통스럽게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즉시 달려간 카일은 두 무릎을 굽혀 그대로 세희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터질 듯 카일의 심장이 폭주하는 것이 세희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였다.
“카일, 저보다 이분 좀 살펴 주세요.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세희가 스칼렛을 가리켰다.
“소리가 날 때 너무 놀랐는지 그대로 기절했어요. 쓰러지면서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붙잡으려고 하다가, 그만 함께 넘어지고 말았어요.”
세희의 설명을 들은 에린즈 회장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맙소사. 맙소사.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에반스 부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총에 맞은 것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한 에린즈 회장이 비틀거리며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딸에게 다가왔다.
때마침 비서와 함께 에린즈가의 주치의가 도착했다.
“에반스 부인께서도 함께 진료를 받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어서 따님께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에린즈 회장이 발코니에서 나갔다.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죠.”
걱정스럽게 묻는 카일을 향해 세희가 환하게 웃었다.
“위험할 뻔했어.”
카일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요? 저요? 아니면 에린즈 양?”
카일은 대답 없이 세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저군요.”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던 세희가 오싹한 기운을 느낀 듯 몸서리쳤다.
“또 웨일런스? 그쪽인 거예요? 그래도 이곳에서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요.”
“예상은 했지만, 나 역시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낼 줄은 몰랐군.”
카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카일은 준비하고 있었군요.”
“걱정하지 마. 반드시 내가 지킬 거니까.”
그리고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거야.
하지만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카일이 홀 안으로 세희와 함께 들어서자 본팀의 대원들이 즉시 곁으로 다가왔다.
“잠깐 현장 좀 보고 올게. 세희, 당신은 이곳에서 기다려. 모든 보안팀이 내부에 모여 있으니 지금으로선 이곳이 가장 안전할 거야.”
“네. 조심해요.”
세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일은 데이브가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 * *
데이브는 총성이 울린 곳에서 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격수가 쏜 게 맞아?”
데이브를 보자마자 카일이 물었다.
총성을 이렇게나 크게 울리면서 저격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발각되기를 바라는 자가 아니라면.
보통의 저격수라면 소음기를 붙여서 흔적 없이 목표물을 처리했을 것이다.
“저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격수는 총을 쏘지도 못했습니다.”
데이브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저격수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겨눈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무슨 상황이지?”
“저격 직전 방해를 받은 것 같습니다.”
“방해?”
“이미 매복해 있던 누군가로부터.”
데이브의 설명에 카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매복이라니.”
“본팀이 저격수의 위치를 확인하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었습니다.”
카일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데이브를 불만에 찬 시선으로 한번 훑어보고는 즉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데이브의 말처럼 저격수의 곁으로 다가간 카일은 당황했다.
마치 단서를 빨리 발견하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흘려 놓고 사라진 방해꾼의 흔적 때문에.
“이자는?”
주검이 아닌 살아 있는 저격수를 본 카일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마취 탄입니다.”
“하, 마취 탄?”
“또한 이것은 근처에서 발견된 신호탄입니다. 신호탄은 정확히 공중으로 발사되었습니다.”
추가로 이어지는 데이브의 설명에 카일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에린즈 회장의 협조를 구해 본팀까지 보안팀에 투입시켰다.
덕분에 빠르게 저격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격수를 처리하기도 전에 먼저 울린 총성.
게다가 저격수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수수께끼라도 내듯 흘리고 간 단서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지금의 정황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카일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까?
카일의 얼굴 위로 어두운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 *
스칼렛이 깨어난 것도 보지 못한 채 회원들 앞에 불려 나온 에린즈 회장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저격이라니.”
흥분한 누군가가 외쳤다.
영국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이 모인 최상위층의 특별 행사였다.
그런 자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다니, 모두가 한목소리로 에린즈 그룹의 자격을 박탈하라며 제명을 요구하고 나왔다.
진작 자리를 뜨려 했던 이들조차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하고자 에린즈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대 그룹의 모임에서의 제명은 투표에 의한 만장일치에 의한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보안 시스템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저급한 수준이라니.”
“이런 그룹이 무슨 재계 3위라니요. 허.”
“도대체 순위의 기준이 뭡니까? 당장 제명시킵시다.”
무섭게 몰아치는 각 그룹의 총수들이었다.
오늘의 소동은 순식간에 에린즈 그룹의 명예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다릴 것이 뭐가 있습니까. 바로 투표에 들어가시죠.”
“그럽시다.”
에린즈 회장은 묵묵히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임 의장의 지휘 아래 바로 투표 준비가 이루어졌다.
카일이 자리를 비웠기에 투표권의 행사는 세희에게 주어졌다.
“죄송하지만, 제 남편이 현장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자리가 처음인 세희는 당혹스러웠다.
“에반스 부인께서 행사하시면 됩니다. 에린즈 양과 함께 발코니에서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반스 대표가 설마 반대 의견을 내겠습니까?”
의장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론이 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그 정해진 규칙을 보여 주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모두의 앞에 투표용지가 놓이고 다들 친필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었다.
세희는 다시 한번 문 쪽을 살폈다.
정말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
카일도 저 사람들처럼 제명을 요구하는 찬성의 의견을 냈을까?
세희는 사실 에린즈 회장 역시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이곳 에린즈 저택에서 세희를 향한 저격이 벌어지면 자신이 지목될 게 뻔한데, 명예와 실익을 추구하는 에린즈 회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세희가 이내 자신의 이름과 그룹명을 투표용지에 유려한 영문 필기체로 기재했다.
세희에게 투표 행사권을 말하던 의장이 직접 투표용지를 천천히 거둬갔다.
그리고 한 장씩 발표하기 시작했다.
의장은 찬성과 반대를 먼저 알린 후, 그 의사를 표한 그룹을 밝혔다.
그렇게 여덟 번째 그룹까지 모두 에린즈 그룹의 제명에 대한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그룹은 에반스였다.
의장이 투표용지를 펼치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세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용지를 들여다보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부인. 혹시 영어를 읽으시는 것이 어려우십니까?”
의장이 점잖게 물었다.
“아니요. 저는 영어를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세희가 답했다.
남자가 곧 인상을 구겼다.
아무래도 자신이 원하던 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카일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아…… 다행히 에반스 그룹의 대표가 돌아왔군요.”
남자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그가 즉시 카일이게 다가가더니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표용지를 카일에게 돌려줬다.
마치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이.
“이미 결정한 투표권을 이런 식으로 정정해도 되는 겁니까?”
카일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대표가 직접.”
“제 아내가 에반스를 대표해서 결정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제 뜻입니다.”
카일의 단호한 태도에 의장의 미간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흐음, 반대 의견이 하나 나왔습니다. 에반스 그룹 대표 이세희.”
모두가 웅성거리며 세희를 쳐다보았다.
그 소리에 감격에 마지못한 에린즈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놀란 표정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만장일치로 합치되지 못한 본 안건은 부결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불편한 의장의 목소리에 못마땅한 시선들이 한순간 세희에게 몰렸다.
곁에 선 카일의 날 선 시선에 대놓고 질타를 하진 못했지만, 불쾌감을 가득 담은 시선들은 피할 수가 없었다.
투표가 끝나자 모두가 빠르게 에린즈 대저택을 떠났다.
맨 마지막에 투표 진행을 맡았던 의장이 세희에게 다가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관례대로 주최 측의 티타임 제안도 받아들이셔야겠군요. 어쩌다 이런 목숨을 건 위험한 모험을 하시게 되셨는지. 행운을 빕니다. 에반스 부인.”
의장의 목소리는 정중했고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건네는 인사는 최악의 내용이었다.
이내 의장은 그를 향해 날아드는 카일의 서늘한 시선에 걸음을 옮겼다.
“제가 지금 실수한 거죠?”
세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나는 늘 세희, 당신의 의견을 존중해.”
카일이 세희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미안해하는 세희를 향해 카일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에린즈 회장이 다가왔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던 그가 세희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카일.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게. 오랜 과거의 일이라도 말일세.”
그리고 카일을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순간, 카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