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2)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22. 결국 연기였다(22/192)
#22. 결국 연기였다
2023.12.22.
클라우스 공작가의 주요한 투자처 중에는 취헨이 있었다.
만약 취헨이 아니라 엘뮤르가 거점 도시로 선정된다면, 클라우스의 재정은 휘청거릴 테다.
창 바깥을 바라보는 에시카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미래를 아는 건 꽤 좋은 일이야. 계획을 세울 수 있거든.’
이내 그녀는 황태자의 에메랄드 반지가 담긴 서랍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단지 변수라면…….’
브리기트에서도 그 정도로 순수한 에메랄드는 드문 상품이다.
훌륭한 세공과 훌륭한 재료, 감탄이 나올 만큼 귀한 반지였다.
물론 정복 전쟁을 위해 옛 영토를 되찾으며 엄청난 전리품을 가져오고 있는 황태자로서는 별거 아닌 물건일지는 모르겠지만.
‘……황태자 하나인가.’
황태자인 레스반 데온 루세인. 검은 머리칼과 차가운 금안을 가진 아름답고 강한 남자.
그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시카가 산 엘뮤르의 황무지는 수십 배의 수익을 남길 것이다.
그 돈은…… 클라우스를 사기에 충분할 것이고. 두 번째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에시카가 미리 엘뮤르를 샀다는 것을 알게 된 황태자는 그녀를 어떻게 여길까.
문득 에시카는 레스반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이다. 클라우스 공작가 역시 그러하고.”
그렇다고 제 일에 어깃장을 놓을까, 하는 질문에는 회의적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 속내는 모르겠다만.
어차피 클라우스는 그에게는 쓸모없는, 2황자 지지 세력이니까. 눈감아 줄지도.
“…….”
레스반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차갑고 기품 있고, 약간은 나른한 눈빛에, 고귀한 티와 야생의 매력이 함께 풍긴다.
책 속에서도 황태자는 행동만 묘사되어 있을 뿐 속을 모를 자였다.
‘고수들의 특징이기는 하지.’
과거의 영령도 그러한 편이었다.
고수들은 성격이 표독스럽고 포악하며 예민하고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런 괴인들만 고수가 되는지, 고수가 된 뒤로 그리 변하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
한편 집무실에서 업무의 처리에 열중하고 있는 칼리안은, 문득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다과를 든 유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을 묶은 채, 시녀복을 입은 유리의 얼굴은 다소 창백해 보였다.
“공작 전하.”
차와 쿠키를 내려놓은 유리는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쉬시면서 하세요. 건강이 염려됩니다.”
“글쎄…….”
잠시 서류를 덮은 칼리안은 유리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건강보다는, 계단에서 굴렀다던 그대의 건강이 더 염려되는 것 같은데.”
칼리안의 농담 같은 말에 잠시 유리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조금 얼굴을 붉힌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건강해요. 공작 전하.”
이내 유리는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걷는 유리의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잠깐.”
멈칫한 유리는 칼리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의 입꼬리 끝이 조금 올라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절뚝이지? 저번에 다쳤을 때로부터는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저…… 그냥, 넘어져서요.”
머뭇거리며 돌아선 유리는 칼리안의 시선을 피했다.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굳은 표정으로 유리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몸을 아래로 낮추었다.
“……공작 전하.”
저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칼리안의 얼굴은 정신이 아득할 만큼 황홀했다.
유리는 얼굴을 붉혔지만, 제 치마를 걷는 칼리안을 말리지 않았다.
유리는 칼리안이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있었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분명 흉이 져 있었다.
보는 사람이 흠칫할 만한 흉이 말이다.
“……이건…….”
과연 칼리안의 눈썹이 굳어졌다.
유리는 칼리안의 반응을 확인하고서야 그에게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일어선 칼리안이 유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번에 계단에서 넘어진…….”
“그냥 넘어진 상처가 아니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봐도 알 것이다.”
유리는 일부러 칼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슬프게 눈을 일렁였다.
칼리안은 그런 유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누가 유리의 다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어지간한 악의가 없고서는 사람을 이렇게 매질할 수는 없다.
유리 아네시스, 그녀는 꽃처럼 가녀리고 여린 여자였다.
때로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착하고…….
“……에시카인가?”
문득 칼리안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리에게 앙심을 품을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단 하나일 것이다.
이전에 유리와 자신의 사이에 배신감을 느끼던 에시카…….
칼리안의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설마, 제게 관심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에시카는 칼리안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투로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유리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칼리안의 눈동자가 뭔가 깨달은 듯 흔들렸다.
일절 관심도 없는 남자 때문에 이 지경이 될 만큼 사람을 때릴 여자는 없을 것이다.
“유리, 제대로 말해 줘!”
불쑥 제 어깨를 잡는 칼리안의 눈빛에 유리는 흠칫했다.
칼리안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는 흥분인지 분노인지 모를 어떤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유리는 칼리안이 제대로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칼리안이 꺼려 할까 봐 이 잔혹한 흉터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에시카에게 자꾸만 오묘한 호의를 베풀고 있는 지금, 유리에게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저는…… 에시카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유리의 눈을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은 턱을 타고, 똑, 똑,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칼리안은 손을 뻗어 유리를 제 품에 안았다. 오랜만의 포옹이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유리의 몸은 여리고 작았다.
“……쉬이…… 괜찮아, 유리.”
칼리안은 제 품에 안긴 유리의 등을 토닥였다.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유리에게 다정했다.
이는 유리가 불쌍해서이거나, 혹은 유리를 좋아해서만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다 연기였던 거야. 에시카.’
갑자기 차갑고 무관심해진 에시카의 태도에 잠시 착각했었다.
그녀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물론, 일련의 일들을 보면 에시카도 억울한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그녀에게 과하게 교육한 정황은 분명하니까.
그러나 칼리안이 아는 에시카 클라우스는 그렇게 쉽게 사랑이 식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 태도는 내 관심을 끌어 보려는 것이었어.’
퍼즐이 맞추어지며 승리감이 칼리안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칼리안의 품에 안긴 유리 역시 속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칼리안이 에시카에 대해 분노할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에시카가 자신을 때렸다고 이렇게 가엽게 여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유리는 눈을 감으며 잠시 행복한 단꿈에 빠졌다.
**
“부인…… 큰일 났어요!”
창가에 서서 화원을 바라보고 있는 에시카에게, 셀라가 황급히 달려왔다.
어찌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던 셀라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녀들이 시녀장을 위해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시녀장 유리 아네시스가 공작 부인에게 크게 학대받았다는 소문이 저택 내외로 퍼진 사실은 셀라도 알고 있었다.
“고…… 공작 부인의…… 학대에…… 못 견디겠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끼어들어 부정했지만, 다수의 입은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아마 그녀들 전부가 알고 있을 것이다.
유리의 다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에시카가 아닌 리오나임을.
에시카는 오히려 3년 동안 하녀들에게 무시받고 당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이 단체 사직서 제출은 윗선에 의해 묵시적으로 합의된 쇼였다.
애초에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감히 하녀들 따위가 공작 부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사직서 제출이라니.
“그리고 대부인이 하녀들을 달래고 있을 테고.”
에시카의 말에 셀라는 흠칫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에 대해 에시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한 듯 초연한 눈빛이다.
“……부인.”
“셀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에시카의 질문에 셀라는 곧장 침을 튀겼다.
“어떻게 생각할 것도 없이 말도 안 돼요. 사직서를 제출한 하녀들도 분명 그렇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녀들을 학대하는 사람은 부인이 아니라 대부인이시라고요!”
셀라도 한때 다른 하녀들처럼 대부인의 곁에 있었던 때가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기품이 흘러넘치고 우아한 대부인이었지만, 가까이 모시는 자들은 그 실체를 알고 있었다.
손찌검은 기본이고 발로 걷어차이는 것은 예사. 변덕은 죽 끓듯 하여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도무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대부인의 직속 하녀들이 다른 하녀들에 비해 월봉은 높았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내쳐진 뒤에야 조금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부인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계획한 이유는 뭘까?”
에시카의 물음에 셀라는 다시 흠칫했다.
“……부인…….”
대부인에게 잔뜩 화가 난 듯한 얼굴의 셀라를 보던 에시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역시 이 클라우스 저택은 평화롭지 않다.
그리고 영령은 평화로운 환경보다는 평화롭지 않은 환경에 익숙했고 그러한 환경에 더 강했다.
“나를 무릎 꿇게 하기 위해서야.”
에시카의 입술이 달싹였다.
감히, 저들이.
“문제는, 내가 그 속내를 뻔히 알고 있다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