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7)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27. 첫날밤의 기억(27/192)
#27. 첫날밤의 기억
2023.12.27.
첫날밤, 에시카는 오랫동안 혼자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칼리안은 방에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많은 걱정과 기대로 날을 지새웠었는데…….
에시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끝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둔중한 문을 열었다.
칼리안을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향한 싸늘한 눈빛…… 마음에 걸려. 뭔가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면 말해 줘야겠어.’
그와의 결혼이 성사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뛸 듯 기뻐했다.
그런데 첫 단계부터 이렇게 답답한 상황이라니…… 한숨이 나왔다.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서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하인 하나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분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에시카의 물음에 하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공작 부인. 오늘…… 그…… 일이 너무 많으셔서,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기다리기보다는…….”
“아니요, 부인. 기다리셔야 합니다.”
“뭐? 왜?”
“그게…… 공작께서는…….”
눈알을 굴리던 하인은 말을 이었다.
“말없이 찾아오시는 여인을 싫어합니다.”
“……여인?”
에시카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여인이라고? ……혹시 나 말고…….”
생각하던 에시카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렇게 근사한 칼리안이 결혼 전에 애인 몇쯤 있었던 게 대수이겠는가.
그녀들이 말없이 찾아오는 것에 질색을 한 모양이다.
하인의 어색한 얼굴을 보면 말이다.
“그렇구나. 그런데…….”
잠시 수긍하는 것 같던 에시카가 말을 이었다.
“침실의 창문이 바람 불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나서 말이야, 들어가서 한번 봐주겠어? 난 그동안 잠시 여기 있을게.”
에시카의 말에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일이라면 물론입죠.”
그리고 이내 그는 문을 열고 신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에시카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좋았어.”
이래 봬도 브리기트가의 말괄량이 막내딸이었다.
하라는 대로만 하고 살면 프리하츠의 에시카 브리기트가 아니지.
하인을 따돌린 그녀는 기억해 둔 집무실로의 길을 떠올렸다.
그에게 찾아가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
칼리안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던 에시카의 볼이 붉어졌다.
그저 결혼식 첫날에도 정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몰래 보고만 오는 것이니 그의 불쾌감을 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아.”
에시카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명문가, 클라우스 공작가. 그의 부인으로서 보내게 되는 이곳에서의 첫날밤.
오로지 칼리안만 생각하고 프리하츠에서 먼 수도인 토레스까지 왔다.
그러니 오늘 밤에 적어도 그의 얼굴만은…….
“아읏…….”
문이 살짝 열린 집무실의 문밖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들린 야릇한 신음.
에시카는 발을 멈추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잘못…… 들은 거겠지?’
에시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두 발짝, 옮길 때마다 소리가 선명해졌다.
“흐음…….”
그것은 다름 아닌 가늘고 얇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다시 방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망할 호기심은 에시카의 등을 떠밀었다.
그 문 앞까지 도달한 에시카는 안의 풍경을 엿보고 어깨를 굳혔다.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 여자와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입맞추고 있는 남자.
격한 애정 행각 때문인지 바닥에는 벗겨진 붉은 구두가 보였다.
제국의 코르티잔(매춘부)들은 새끼발가락이 보이는 구두를 신었는데, 그 구두도 새끼발가락 쪽이 뚫려 있었다.
“……공작 전하.”
여자는 손을 뻗어 남자의 볼을 쓰다듬는 듯했고,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격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에시카는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칼리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첫날밤이라 당연히 저를 찾아 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런 여자를 안느니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나아.”
본 것은 칼리안을 무섭도록 닮은 넓은 어깨와 뒷모습일 뿐.
그저 그와 같은 머리 색과 같은 헤어스타일, 그리고 아까 입었던 같은 상의를 입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에시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의 입 주변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보지 않았으니, 없었던 일이다.
‘칼리안이…… 내가 좋아해 오던 그 남자가 그럴 리가 없어.’
빠르게 걷는 그녀의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안아 주세요…….”
에시카는 우뚝 멈추어 섰다.
자신의 그림자가 저 먼 앞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림자의 끝은 어둡고 짙어 알 수가 없었다.
눈발이 휘몰아치던 칼리안의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매춘부와 몸을 섞는 그의 거친 숨소리.
모든 것이 여기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신호를 주고 있었다.
늦었나, 아니, 늦지 않았을까. 아니, 늦었다. 너무 늦어 버렸어.
“…….”
에시카의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더 현명하고 강인한 여자라면,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시카는 그저 발이 땅에 박힌 것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그만한다고 하면…… 우리 가문의 평판은 박살이 날 거야…….’
아버지와 오빠들은 에시카에게 잘 돌아왔다고 어깨를 토닥여 줄 테지만, 더 이상 자랑스러운 브리기트의 사랑받는 딸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실패는 되돌릴 수 없어…….’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설레는 마음은 깨어진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는 가슴으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칼리안을…….’
심장에 수백 개의 못이 박힌 기분이었다.
자신이 오래 짝사랑하던 상대로부터, 평생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았으니까.
‘……그래도 칼리안이 좋은걸. 그의 곁에 있고 싶은걸.’
에시카는 한참 뒤에야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방향조차 구분치 못했지만, 그래도 걸었다.
당장이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너무 가슴이 아파…….’
“…….”
에시카는 눈을 떴다.
제 방의 천장이 보였다.
골방에 있다가 돌아온 이곳.
“…….”
침대에서 일어난 에시카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간만에 그날의 꿈을 꾼 모양이었다.
평생 잊지 못한, 결혼식 날 말이다.
그녀의 입술 끝이 씁쓸하고 차갑게 비틀렸다.
**
저녁 무렵, 머리를 빗고 있는 에시카에게 셀라가 다가왔다.
여동생의 일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은지라 그녀는 이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평생 에시카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한 셀라였다.
그녀가 바꿀 클라우스 공작가의 풍경이 기대되었으니 말이다.
“부인…….”
셀라의 손에는 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에시카에게 내밀었다.
“아까……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불러 세우셨어요.”
그 말에 에시카의 눈썹 끝이 꿈틀 움직였다.
에시카는 쪽지를 셀라에게서 건네받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부인의 하녀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잠시 무엇을 생각하시는 듯하더니…….”
셀라는 아까의 일을 회상했다.
황태자는 일이 주에 한 번 정도는 클라우스 저택에 들렀다.
전쟁과 관련된 병력과 물자들을 점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공작과의 면담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문득 셀라의 앞에 멈추어 서더니 말을 걸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두 번 접은 쪽지를 제게 건넸다.
셀라는 그 형형한 금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었다.
튜레시안의 전쟁광…… 그 무시무시한 분이 어떤 연유로 부인께 쪽지를 가져다드리라는 것일까.
“부인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말이지?”
“네. 부인께서는 황태자 전하와도 안면이 있으신가요? 정말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뻔했어요. 사람의 기운이 어떻게 그렇게 흉흉한지…….”
셀라는 파르르 떨며 오한이 드는 듯한 몸짓을 했다.
뭐, 보통 여자들이야 무서워할 만도 하지.
에시카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쪽지에는 펜으로 눌러 쓴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고 가려 했는데, 숨지 말고 다음에는 직접 나와서 환대하길.]쪽지의 내용을 본 에시카의 눈썹 끝이 굳었다.
‘왜 갑자기 시비야?’
그저 두어 번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지 친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황족이 오면 그 가족들까지 나와 환대하는 것이 예의이기는 하지만…… 리오나는 늘 에시카에게 나오지 말라 했었고 제가 칼리안의 옆에 서서 황족을 맞았다.
하녀복을 입고 나온 저를 보고 그런 사정쯤은 짐작했을 텐데.
게다가…… 서로 얼굴 보아 좋을 이유가 없다.
“부인……. 불길한 내용은 아니겠죠?”
황태자에게 제대로 겁을 먹은 듯한 셀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쓸데없는 이야기야.”
“네? 그분이요?”
매일 전쟁에 바쁘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요즘은 꽤나 한가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에시카는 손끝으로 내공을 움직여 쪽지를 태웠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게 변하는 쪽지에서 다른 글자가 드러났다.
“……?”
재가 되어 종이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에시카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하세츠]“…….”
“부인?”
갑자기 눈썹이 굳는 에시카의 모습에 셀라는 걱정하는 목소리를 냈다.
에시카는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재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쪽지, 애초에 에시카가 쪽지를 내공으로 태울 것을 예상해서 만든 것이다.
게다가 찰나의 순간 드러난 하세츠라는 글자는 동체 시력이 좋아야만 볼 수 있다.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 거지. 아니면 그냥 장난?’
하세츠……. 분명 알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그 지명을 떠올리니 문득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