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8)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38. 두 남자(38/192)
#38. 두 남자
2024.01.07.
“…….”
에시카는 잠시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짧은 묵색 검을 들고 있었다.
단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레이피어라고 하기에는 그보다 짧고 가벼우며 상당히 연약해 보이는 검은, 레스반의 장도와는 결이 달라 보였다.
“……아니요.”
레스반이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쉽군. 그런 방식으로 결말을 내도 흥미로울 텐데.”
만약 에시카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그녀가 응징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한 것일까.
“내게는 그치들도 도둑들과 별 차이가 없이 보이거든.”
레스반의 시선이 검을 향하고 있었다. 클라우스. 그 이름이 머리에 맴돈다.
에시카는 괜히 검을 쥔 손가락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그것을 뒤로하며 말했다.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레스반의 귓가에 흘러든다.
“이 검은…… 휘두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쥔 거예요.”
그 말에 레스반의 눈동자가 짙게 일렁였다.
그의 금안이 천천히 에시카의 눈을 향했다.
“제게 중요한 것들을.”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이곳은 무림이 아니며, 무력은 냉철한 이성과 정확한 판단의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레스반처럼 전쟁을 할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그저 그녀에게는 처음 영령의 기억을 되찾았을 때 갖게 된 목표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검은 그것들을 잊지 않고 고수하기 위한 일종의 깃발이었다.
물론 호신을 위해 검을 뽑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베기 위해 검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한참 동안 에시카를 바라보던 레스반이 입을 열었다.
“부디 그대가 잊지 않아야 할 것 중에, 나도 있었으면 좋겠군.”
나직한 목소리에 에시카는 손을 움찔했다.
슈페르트가 그녀에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에시카는 그의 짙은 눈을 보고 그날의 일을 물을 자신이 없었다.
‘그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항상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건가요?’
정말 그가 무언가 말하게 되면 답이 나오는 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그의 눈을 볼 때면 깊고 격렬한 운명의 파도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런 내가 피 묻은 손을 뻗어 돕겠다고 나서면, 그대는 기겁하고 도망칠까.”
“전하께서는…… 항상 제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에시카의 말에 답하듯 레스반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그는 검지를 들어 에시카의 턱 가까이 올렸다.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그의 손길이 닿지는 않았지만, 에시카는 짓누르는 듯한 기운을 느끼고 그의 형형한 눈을 바라보았다.
제게 시선을 이끈 레스반이 속삭이듯 말했다.
“응. 아주 막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늘 그대를 돕고 싶어 하기도 하며…….”
높은 콧대와 붉은 입술, 퇴폐적으로 달싹인다.
숨이 멎는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주 자주, 그대의 생각을 해. 하루에도 여러 번.”
“황태자 전하. 저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의 꿈을 꾸며 살아왔거든.”
그의 목소리가 에시카의 말을 끊었다.
그는 오늘도 에시카에게 묻고 있었다.
혹은 구애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답을 바라는 것일까. 답을 바란다고 하기에 그는 마치 독백하듯 말한다.
때로 깨우는 것 같기도 하고 타이르는 것 같기도 한다. 부드러운 협박 같기도 하고.
레스반을 바라보는 에시카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
붉은 노을이 깔리는 시간.
남자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게 바깥의 골목으로 도망쳤지만 팔도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이 탈골되어 비틀비틀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입을 열어도 목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 마녀 같은 여자가 무슨 수를 쓴 거지?’
검의 궤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쓰러지고 나서야 당한 것을 깨달았을 뿐.
‘어떻게든 그 망할 여자한테 복수를…….’
저처럼 신음 한번 내지 못하는 부하들 역시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꼭 하고 만다.’
그리고 그때 검은 그림자가 그의 시야로 드리웠다.
스르르- 날카로운 검날이 검집을 스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부릅떴을 때 그는 마지막 풍경을 보았다.
새카만 머리칼에 짙은 금안을 가진, 보는 것만으로도 서릿발이 느껴질 만큼 차가운 분위기의 남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리긋는 것을.
그는 검은 제복에 황족의 문장을 달고 있었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후환은 없는 것이 좋겠지.”
이윽고 레스반을 따르는 검은 옷의 남자들이 남은 사내들을 베었다.
여기저기에서 피가 튀었지만 레스반은 눈썹 한번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 온 그에게 이런 건 구경거리도 되지 않았으니까.
사내들을 처리한 남자 중 파닉스라고 불리는 남자가 잠시 무릎을 굽혀 검시하더니 레스반에게 보고했다.
“엄청난 솜씨로 성대를 끊어 놓았습니다. 이런 건…… 본 적이 없습니다.”
파닉스는 정말 놀란 눈치였다.
인체의 구조를 매우 잘 알지 않는 이상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성대만을 별 출혈도 없이 갈라놓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공작 부인은…….”
“방금 보고 생각한 것은 잊어.”
혈향이 담긴 바람과 함께 나직한 레스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스반의 짙은 금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존명.”
고개를 숙이는 파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썩 좋은 날이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적당하다.
그러니 더욱 아쉽지 않을 리가 없다.
방금 죽은 버러지들이 가게 밖으로 도망쳐 나오지 않았더라면 느긋한 산책을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레스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감돌았다.
**
‘나에 대한 꿈이라.’
레스반을 만날 때마다 어려운 문제가 하나씩 늘어 가는 느낌이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 하세츠에서의 인연. 그리고 꿈까지…….
그의 눈을 보면 물결치듯 어떤 운명이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피할 수 없는…….
“부인.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세요?”
에시카가 돌아오자마자 셀라는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청사의 병사들이 시녀장을 데려갔어요.”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간 에시카의 입술 끝이 옅게 비틀렸다.
주인의 반응에 셀라는 더욱 즐겁게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죄를 지은 것 같아요. 얼굴이 새하얗더라고요. 대부인께서 조금 예뻐해 주신다고 그렇게 콧대를 높이 세우고 부인을 핍박하더니, 잘된 일이죠.”
“그랬구나.”
짧게 대답한 에시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있잖아요, 사실 시녀장이 부인의 시녀로 저택에 왔을 때……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여자가 부인의 험담을 꽤나 많이 한 것 같아요.”
“무슨 험담?”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은발과 뚜렷한 청안.
운기조식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욱 부드러워진 피부와 섬섬옥수까지…… 누가 보아도 양귀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셀라는 말을 이었다.
“부인이 철이 없다, 사치스럽다…… 그리고 부인의 성격이 나빠 부인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기가 힘들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공작 전하께서…… 앗, 죄송해요.”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달은 셀라는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에시카의 입술에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괜찮다. 계속하거라.”
“……하지만.”
“괜찮대도.”
“공작 전하께 사랑받지 못한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못된 여자예요. 친구를 그런 식으로 험담하다니.”
셀라가 은색 머리카락을 차분히 빗질하기 시작했다.
“유리 아네시스는 원래 그런 아이야.”
겉으로는 웃는 낯을 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행동을 한다.
착한 척 약한 척을 하며 상대의 등에 단검을 찔러 넣고.
어릴 적부터 그걸 뻔히 겪어 왔으면서도, 그 본성에 대해 눈치채지 못하고 이 저택에 들였던 제 과거를 떠올리니 우스워지는 에시카였다.
“야망은 크고 질투심은 강하지만…….”
거울 속의 아름다운 제 모습을 바라보던 에시카의 입술이 이어 달싹였다.
“그만한 능력은 안 되는 아이이지.”
그러니 제 무덤을 점점 파고 들어가는 것이겠고.
그 길의 끝에 필시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셀라의 빗질을 받고 있을 때 문밖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
칼리안은 에시카가 저녁 식사를 수락할 줄 몰랐기에,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주방장 헤모스를 불러 음식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다.
한스에게도 불편한 것이 없도록 신경 쓰라고 했고 말이다.
칼리안 역시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깃을 단장했다.
그리고 한발 먼저 다이닝 룸에 도착해 에시카를 기다렸다.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고 에시카가 들어왔다.
“…….”
에시카를 본 칼리안의 눈동자가 짙게 일렁였다.
여자를 볼 때 외모에 혹해 본 적 없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에시카의 미모는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아니,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그녀는 걸어가면 누구든 몇 번 뒤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은발과 청명한 푸른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부드러운 피부…… 차분한 표정에서는 기품이 흐르고 발걸음 역시 그러하다.
길게 뻗어 있는 흰 목선을 보자 그는 오묘한 감각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오늘 밤을 같이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