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43)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43. 지독한 회피주의자(43/192)
#43. 지독한 회피주의자
2024.01.12.
유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조사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함께 지내기에 꽤나 익숙해진 조사관에게 그녀는 애원하듯 물었다.
“저……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건가요? 클라우스 저택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요?”
이곳에서 조사관 덕분에 나름대로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답답했다.
조사관은 눈썹을 찡그린 채 서류를 몇 번 뒤척이더니 그것을 접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에게 물었다.
“클라우스 공작이 정말 당신 편이라는 말, 맞소?”
“그게 무슨 의미죠?”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서 말이지.”
조사관은 깃펜을 몇 번 책상에 두드리며 그녀를 보았다.
볏짚색의 금발과 흔치만은 않은 붉은 눈동자.
아름다운 몸과 새가 조잘거리는 듯한 목소리.
모든 것이 범상한 여자는 아니지만 유리가 주장한 것이 꼭 진실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청사로 도착한 우편물을 보면 말이다.
“칼리안 클라우스 공작에게서 항의서가 왔더군.”
유리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칼리안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
에시카 따위가 설마 칼리안을 유혹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애가 탄 나머지 같이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에시카에게 알리겠다는 편지까지 썼는데.
항의서라니…….
“죄수의 편지를 전달하지 말아 달라면서, 공명정대한 수사를 당부하더군.”
“말도 안 돼요!”
유리는 책상을 탁 치며 일어섰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혼탁한 배신감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물론 유리도 칼리안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배경과 부에 빠져든 것이었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밤을 보낸 다음 날, 그래도 자신을 다정히 안아 주는 남자였으니까.
어쩌면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요. 어쩌면 에시카 그 악마 같은 여자가 수를 썼다든지…….”
“하지만 분명 클라우스 공작이 보낸 것이 맞소. 그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조사관님!”
유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동정심을 자극하는 그 모습에 조사관이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갔다.
“항상 저를 믿어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눈물이 다시 툭 떨어진다.
쇄골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조사관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수년의 감옥살이를 해야 할 죄였지만, 조사관을 구슬려 죄를 축소하고 일 년까지 형량을 줄여 낸 그녀이다.
클라우스 저택에, 어떻게 해서라도 꼭 돌아갈 것이다.
**
“부인…… 정말 괜찮으세요?”
유리의 편지가 칼리안의 책상에 올려지기 전 에시카는 한스를 통해 그녀의 편지에 대한 필사본을 받아보았다.
“어떻게 공작께서는 그런…….”
그녀의 곁에서 편지 속의 내용을 보았던 셀라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공작 전하께서는 그런 사실을 숨기시고 어떻게 부인께 그렇게 태연하신 척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부인께서는 이 일을 왜 따지시지 않는 거죠?”
셀라의 눈에 분노와 절망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에시카는 셀라와 달리 초연해 보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을 글자로 본다고 딱히 심경의 변화가 생길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겉으로 초연하다 해도 속으로 타들어 가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리라 생각하며 셀라는 속이 상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공작의 외도에 대해 비난했다면, 그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더라도 내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지. 또 자신을 합리화했을 테고 위로를 얻기 위해서 어쩌면 유리에게 손을 뻗었을지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게으르고 멍청한 적들을 이간질하는 오래된 계책 중의 하나란다.”
“부인, 설마…….”
셀라라면 볼 것 없이 남편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떻게 친구와 바람을 피울 수 있냐고.
그러나 에시카는 칼리안의 성품을 꿰뚫고 있었고, 훨씬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하나이고 적은 셋이니, 그 손을 맞잡지 못하게 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지.”
에시카의 입술 끝은 차분하게 비틀렸다.
“유리 그 아이는 성급해.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자만하고 있지. 그리고 칼리안은 말이야.”
이것 역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잘 들어, 셀라. 어떤 사내들은 그렇단다. 가지기 어려운 것에는 그토록 애타게 손을 뻗으면서…….”
에시카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가진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
“믿지 못할 인간이군요.”
전생의 누군가를 떠올린 에시카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그러니 그런 자를 위해 인생을 내거는 것은 멍청한 짓이야.”
한 번의 생을 내던져 얻어 낸 교훈이었으며.
두 번째의 제가 같은 절벽 위에 서 있을 때 전생을 자각하며 뼈에 새긴 교훈이었다.
“나는 그저 그가 나에게 눈을 돌리게 했을 뿐이고, 유리에게 다소 질리게 했을 뿐이란다.”
슈페르트를 통해 죄수들에게 클라우스가의 소식을 흘려 넣었다.
공작 부부의 사이가 아주 좋다는 등의, 유리를 조급하게 할 만한 것을 말이다.
마침내 참지 못한 유리의 협박 편지를 받은 칼리안은 이미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이제 칼리안은 그녀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책 속 유리와 지금의 유리는 달랐다.
에시카가 변했으니, 그녀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구렁텅이에 빠지는 방향으로 스스로의 발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칼리안은 제게 매달리는 여자를 아주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그가 호감을 가졌던 유리는 제게 고분고분한 유리일 뿐이었다.
유리는 돌아올 것이다. 이것도 에시카가 놓은 덫 중 하나이니까.
그리고 유리가 뭘 가지고 있건, 유리가 제게 매달리고 울거나 따지기 시작한다면…….
“…….”
에시카는 칼리안의 경멸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받아 왔으니까.
그리고 그가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은 말이지, 사실은 아주…….”
에시카는 그 불길에 부채질 몇 번을 해 줄 생각이 있었다.
자신의 적들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지독한 회피주의자야.”
비틀린 미소가 그녀의 입술에 고였다.
**
다음 날 에시카는 아침이 밝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작저를 나섰다.
친정에서 슈페르트의 이름으로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집안에 일이 생겼으며 이에 대해 급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시 서부 광장 번화가 쪽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달그락, 달가닥, 마차 바퀴가 굴러가며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에 탄 에시카는 창밖에서부터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눈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히히힝-
마차가 멈추어선 것은 서부 광장 번화가에 이르기 한참 전이었다.
열린 창문 새 느껴지는 바람을 느끼며 에시카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오늘 일어날 일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클클클.”
“마차 안의 저 여자입니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진 길목에 약속한 듯 열 명 정도의 남자가 나타났다.
“욕보인 뒤 죽이라 하셨다. 얼굴은 건드리지 마……. 알아볼 수는 있어야 그분께 돈을 받으니.”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의 명령에 시퍼런 단도를 사내들이 클클거리며 웃어 보였다.
에시카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창틀을 잡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슈페르트의 필체가 아니라는 것은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그리 정교하게 흉내 낸 데는 이유가 있었겠지.
‘정말이지, 한가하게 쉴 새가 없구나.’
이제 저들을 족쳐서 제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차분히 들으면 된다.
청부업자라도 해도 수준은 저번 무기 가게에서 상대했던 놈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하지만 몸을 완전히 일으키기도 전, 에시카는 눈썹을 꿈틀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 한 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짙은 기운과 존재감…….
툭, 그가 말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저들의 뒤에 있다.
“오랜만이네, 귀족 년이랑 놀아 보는 건 말이지. 클클클.”
“고귀하신 부인께서 무슨 죄를 지어서 우릴 만났을까. 이야기 좀 해 보자, 까꿍.”
마차의 문을 여는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곧장 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큭.”
“억.”
그나마 단말마의 비명이라도 지르고 저세상으로 가는 자들은 제가 죽는지는 알 것이다.
하지만 몇몇은 제가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허윽…… 으억…….”
“으허어어억…….”
오 초, 그보다 아주 조금 짧은 시간이었다.
열 명의 사내 중 아홉이 목숨을 잃었고 한 명만 살아 주저앉아 있다가 기절했다.
아마도 증언 확보용으로 살려 둔 것이겠지.
그리고 짙게 피어오르는 혈향 사이, 햇살을 밭아 조금 옅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짙은 금안으로 마차 안 에시카를 응시하는 그가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긴 검을 따라 피가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야차 같은 모습을 보니 왜 전쟁광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저리 사람들을 베어 넘긴 와중에도 황족다운 고고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검집에 검을 넣은 그는 마차 앞으로 걸어와 문을 열었다.
에스코트하듯 내미는 하얀 장갑을 낀 손, 금안에서 흘러드는 짙은 시선에 에시카는 어쩐지 가슴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안녕, 에시카.”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