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44)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44. 구해 준 대가(44/192)
#44. 구해 준 대가
2024.01.13.
레스반의 손바닥에 손을 올린 에시카는 마차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스르륵, 끌리는 드레스 자락의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오늘은…….”
에시카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전하에게서도 피 냄새가 나는군요.”
레스반의 짙은 금안 표면에 그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레스반의 입술 끝 서늘한 미소가 짧게 스쳐 지나갔다.
“내가 피를 묻히지 않았으면, 필시.”
레스반은 에시카의 가볍고 여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의 손이 물들었겠지.”
그의 말에 에시카는 손에서 천천히 제 손을 빼내었다.
지난번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리는 것 같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의 꿈을 꾸며 살아왔거든.”
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릿한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회의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그녀는 이내 레스반이 쓰러트린 시체들 쪽으로 다가갔다.
운 나쁜 인간들 같으니라고. 레스반과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이 중 몇 놈들 정도는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시카는 심장이 뛰는 와중에도 살짝 몸을 굽혔다.
완벽한 검기의 흔적은 에시카의 심장을 뛰게 했다.
“…….”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스반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눈 뜨고는 못 볼 장면이었음에도 에시카는 허리를 깊게 숙여 시체들의 상흔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정확하면서 파괴적이에요. 대단하네요.”
이 세계나 저 세계나 검술이야 비슷한 방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기의 종류가 다른 것처럼 검술의 결도 달랐다.
약자라 불리는 것들의 검술이야 무림이나 이곳이나 구분이 가지 않겠지만.
그 차이는 강자의 흔적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레스반 데온 루세인, 외부에 흐르는 기운보다 더 강한 남자였다.
“…….”
레스반은 진지하게 검상의 형태를 관찰하는 에시카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굳은 가지런한 눈썹과 학구열 가득한 푸른 눈.
오뚝한 코와 꾹 닫힌 입술…… 뭔가를 가늠하듯 움직이는 흰 손가락까지.
시체들 앞에서 이리도 태연하게 진지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그녀 하나뿐일 것이다.
문득 그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어느 소녀의 푸른 눈동자.
한참 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레스반은 기절한 놈의 뒷덜미를 잡아 마차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파들파들 떨고 있는 마부에게 살기를 담아 협박했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서 황태자의 명령으로 이자를 구금시키라고 전하라.”
명백히 귀로 흘러드는 레스반의 음성에 마부는 더욱 하얗게 질렸다.
전쟁귀라 불리는 그 악명 높은 황태자라니.
아까 사내들 열 명이 순식간에 쓰러질 때도 눈을 의심했었다.
“예…… 아…… 알겠습니다.”
레스반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마부는 채찍을 찰싹 때렸고,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호젓한 길에 남은 것은 쌓인 아홉 구의 처참한 시체들과 레스반, 에시카뿐이었다.
에시카는 레스반에게 물었다.
“황궁에서 조사하실 예정이신가요?”
“황실 직속 조사단에 일임할 것이다.”
황실 직속 조사단은 없는 죄도 만들어 내기로 악명 높은 자들이다.
“……클라우스의 제대로 된 약점을 잡으실 수도 있겠네요.”
“역시 그대는…… 이미 범인을 알고 있는 것이로군?”
시원한 바람이 에시카의 은빛 머리카락을 살랑이게 하고 있었다.
에시카는 차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반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편히 살고 싶을 뿐이라면서 왜 이혼하지 않는 것이지?”
낮은 목소리가 에시카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이렇게 직설적일 줄이야.
위험한 빛의 눈은 에시카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에시카는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대답해야 할 것인가.
“저는 클라우스 저택이 마음에 들어요. 그곳의 풍광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이 제 구미에 맞죠.”
“…….”
절반 정도의 진실이라면 괜찮겠지.
말장난이라도 들은 듯 레스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거예요. 저를…… 방해하실 건가요?”
그리고 이어 흘러드는 다음 목소리.
레스반은 에시카를 응시했다.
에시카의 눈은 맑고 명량했다. 그리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감흥이 든다.
그리하여 이렇게 뒤를 쫓고 있는 것이겠지.
“클라우스가 마음에 든다는 대답보다는 훨씬 나으니, 그럴 리가.”
기다림은 길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짧게 말을 흘린 레스반은 제 말에 올랐다.
잠깐이나마 레스반의 서늘한 금안에 즐거운 빛이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
레스반은 에시카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에시카의 손이 닿자마자 그녀를 말 위로 끌어 올려 제 앞에 앉혔다.
등을 감싸는 그의 단단하고 큰 가슴에 에시카의 몸이 잠깐 움찔했다.
“기습당했던 여자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지.”
뒤에서 옅은 웃음기가 섞인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해 준 대가도 받아야 할 테고.”
**
들어간 지 석 달 만에 청사에서 나온 유리는 쏟아지는 햇볕에 눈을 잔뜩 찌푸렸다.
조사관이 최대한 조율해 주었지만 1만 링이나 되는 벌금이 나왔다.
브리기트 남작가에서는 적당히 무마할 생각이 없이 비싼 변호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1만 링은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3년은 대부인의 비위를 맞추어야 얻을 수 있는 급료가…….
“망할 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결국 비싼 이자를 내고 은행에 빚을 져야만 했다.
에시카를 떠올리며 유리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그러고는 납작한 제 배를 한 번 쓰다듬었다.
붉은 눈동자에 사악한 생각들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유리는 눈썹에 힘을 준 채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청사는 토레스의 변방에 있어서 공작가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마차를 잡아 타야 했다.
칼리안에게 마차를 보내 달라는 편지까지 보냈는데…… 그는 그것도 모른 척한 듯, 클라우스의 마차는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작저에 돌아가기만 한다면, 필시 그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녀가 대로변에 나왔을 때였다.
바람과 함께 말 한 필이 빠르게 유리의 앞을 지나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유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쑥 내밀어 말의 뒷모습을 보았다.
제복 같은 옷을 입은 어깨와 망토, 그리고 그 앞에 분명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에시카?!”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나지만 흔들리는 은발과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와 함께 말을 타고 있는 여자는 분명 에시카였다.
놀란 유리는 한참 동안 굳은 표정으로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에 미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대낮부터 외간 남자와 말을 타는 공작 부인이라니.
가문이 뒤집힐 일이었다.
만약 남자가 칼리안이었다면 유리가 바로 알아봤을 테지만, 분명 칼리안은 아니었다.
딱 벌어진 어깨와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기사일지도 모른다.
“더러운 것,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워?”
유리의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
클라우스 공작가의 대외 활동은 오로지 대부인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에시카는 공작 부인이 되고서도 한 번도 황궁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조금 어색한 시선으로 웅장한 황궁을 훑어보았다.
클라우스 공작저도 화려하다고는 하지만 황궁의 손톱만큼도 미치지 못한다.
삼엄한 황군들의 경비는 물론이고 찍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엄숙한 하녀와 시종들이 동상처럼 레스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족과 눈이 마주치면 참살하는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들은 황태자가 여자를 데려왔음에도 말 한번 걸지 않았다.
‘혹은 의외로 익숙한 일일지도.’
레스반 데온 루세인, 제국의 황태자.
전생의 독영을 떠올릴 만큼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무공은 이전의 자신보다도 월등하다.
아직 황태자비는 없으나 만나는 여자는 있을지도 모른다.
중원의 황제들은 처첩을 수십, 수백 명씩 두었다. 제국도 황제가 정부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하니…….
“…….”
에시카는 순간 눈썹을 움찔했다.
워낙 크기에 다른 복도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문이 닫히고야 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잠시 헛생각을 하느라 묻지 못했다.
“나가거라.”
방 안의 시종에게 명하자, 시종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재빨리 방 바깥으로 나갔다.
레스반의 방으로 생각되는 이곳은 참으로 넓고 화려했다.
대부인과 칼리안의 방을 합쳐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침대와 테이블이 있었고 수십 자루의 검이 거치된 거치대도 보였다.
에시카를 마주하고 있는 레스반은 재킷을 벗었다.
“…….”
레스반의 짙은 금안을 바라보며 에시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지금 사내의 방 안에 단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킷을 벗은 레스반은 짙은 눈으로 에시카를 응시하며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위에서부터 툭, 툭 풀렸다.
에시카의 사고는 문득 정지했다.
이내 그의 단추가 다 풀리고 셔츠가 벗겨지자, 조각한 듯한 상체가 드러났다.
초콜릿 같은 가슴과 복근은 둘째치고 넓은 어깨에서 이어지는 팔뚝의 잔근육은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