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46)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46. 부부의 의무(46/192)
#46. 부부의 의무
2024.01.15.
방에 들어온 에시카를 위해 셀라가 세숫대야 같은 양철통에 따뜻한 물을 담아 왔다.
그리고 그녀의 발을 담그게 하고 씻기기 시작했다.
“아아, 따뜻해요. 그 골방에 계셨을 적에는 그 망할 것들이 얼음 같은 찬물만 줬었는데…….”
오늘은 일을 크게 하지 않고, 레스반에게 맡긴 뒤 저택으로 돌아왔다.
에시카가 멀쩡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누군가는 속이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제 계획이 어디까지 실패했는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잡초를 뽑을 때 윗부분만 뽑지는 않듯 뿌리가 딸려 나오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까 명령한 건 한스에게 가져다주었니?”
“네. 그것을 받아 본 집사의 표정이 굳던데…… 뭐였나요?”
에시카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이건 리오나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두 번째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황궁 서고, 일부 직계 황족들과 그들이 허가한 손님만 접근이 가능한 그곳에는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되는 자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패망한 국가들에서 모은 자료들도 있었다.
스미첸이라든지.
“당분간 집사는 공작가를 떠나 있을 거야. 대부인에게는 취헨의 차관 협의를 위해 출장을 간다고 보고하고.”
“……그렇다면 이 따뜻한 물도 당분간 못 쓰는 건가요?”
셀라의 표정이 굳었다.
에시카에게 제공되는 모든 것들은 한스의 소관하에 있었다.
한스는 칼리안과 에시카가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너무 그녀를 학대하면 칼리안의 반감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리오나의 완급을 조절하게 했고.
추가적으로 비밀리에 에시카를 위한 물품들을 잘 챙겨 주었다.
“곧 여름이야, 셀라. 따뜻한 물은 필요 없어.”
가을쯤에는 서부 거점에 대한 황실 계획이 발표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적들의 눈물로 손을 씻을 계획은 중반부에 이르렀다.
에시카는 골방에서 썩은 빵을 먹고 얼음물로 목을 축이던 그 시간을 잊지 않았다.
똑똑-
제 방문 앞에 서 있는 칼리안은 새카맣게 잊었을 테지만 말이다.
“열어라.”
그의 시종이 문을 열자, 취기가 얼굴에 가득한 칼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셀라는 황급히 족욕을 멈추고 대야를 든 채 시종과 함께 방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칼리안은 에시카에게 다가와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술 냄새에 에시카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칼리안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부인이 생각나서 잠자리에 들 수 없었소.”
칼리안에게서는 열기가 느껴졌다.
“요즘은 정말……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많이 달라졌소.”
에시카는 입꼬리 끝을 비틀며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님께서 저를 항상 주의하라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그 말에 조금 흠칫한 칼리안은 끌어안았던 에시카를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남자가 큰일을 하려면 아무리 부인일지라도, 여인 하나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분이잖아요. 집안의 일은 어머님께서 하시니 공작께서는…….”
에시카는 검지를 뻗어 칼리안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정무를 가장 중요히 여기시라고.”
그 작은 터치가, 칼리안에게는 그녀가 부리는 심술이나 애교처럼 느껴졌다.
눈을 일렁이며 에시카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게는 하나의 의무가 더 있소.”
칼리안은 두 손을 들어 에시카의 어깨에 올렸다.
칼리안은 절대 리오나의 말에 대해 틀렸다고 반박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말도 맞고 다른 주장의 말도 맞는 것이다.
“……당신에게서 내 뒤를 이을 후계자를 보는 것.”
칼리안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선연한 정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 밤의 일은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실 것이오.”
칼리안의 말에 에시카는 속으로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리오나의 속을 조금도 모른다.
리오나는 에시카를 죽여 없애고 싶을 만큼 싫어하며, 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취헨의 성공을 발판 삼아 에시카를 쫓아낼 요령이었다.
그리고 클라우스 공작가에 어울리는 진짜 명문가의 여인을 들여 칼리안에게서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의 후계자를 보고 싶어 하겠지.
물론 그렇더라도 리오나가 새 며느리에게 잘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에시카.”
칼리안이 거친 목소리로, 헐떡이는 듯한 눈빛으로 에시카를 불렀다.
영령의 기억을 되찾기 전 에시카가 지금의 칼리안과 마주했다면 그와 불타오르는 사랑이라도 했을 것이다.
칼리안의 얼굴이 점점 에시카에게 다가갔다.
그의 높은 콧대와 붉은 입술에 그녀의 숨결이 거의 와닿았을 때.
“……!”
일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칼리안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에시카는 잠시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고 잔잔한 눈으로 쓰러진 그를 바라보았다.
혈도를 짚어 기절시킨 것이었다.
그녀는 감흥 없는 눈으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은 높이 떠 있고, 선선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
칼리안의 방문 앞에 서 있는 유리는 주먹에서 피가 날 정도로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아래, 깨진 접시와 치즈, 과일들과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칼리안에게 가져다주려던 것들이었다.
얼굴을 조금 숙인 그녀의 눈썹 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고, 차분하던 입술은 어찌나 악물었던지 핏기가 없었다.
“…….”
오늘은 공작저로 돌아온 첫날이었다.
칼리안 클라우스는 얼핏 냉정해 보이는 성정이나 유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언제나 잘 보듬어 주었다.
감옥에서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급한 감도 있었다.
그러니 오늘은 서로 간에 쌓인 오해를 풀어 보려 했었는데.
“……에시카…….”
오늘 밤 칼리안은 자신의 방에 없었다.
한스의 후임에게 그가 어디에 갔냐고 묻자 불경스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로 차갑게 대답했다.
“공작 부인의 방에서 밤을 보내고 계십니다.”
칼리안이 에시카와 밤을 보낸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석 달간 청사에서 지내는 동안 칼리안과 에시카가 여러 번 동침을 했다는 건가?
유리는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에시카가 아이라도 갖게 된다면…… 유리는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다.
적장자를 가진 부인이 있는데 누가 그녀에게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럴 순 없어…….”
에시카는 멍청하고 어리숙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하녀만도 못한 신세여야만 했다.
에시카가 대부인에게 학대당하고 칼리안으로부터 냉대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희열을 느꼈었던가.
제게 없던 모든 것을 가졌던 에시카 브리기트가, 허울뿐인 공작 부인 에시카 클라우스가 되어 망가져 가는 모습은 유리의 큰 기쁨이었다.
이제 그녀가 기를 써도 가지지 못했던 클라우스를 제가 가짐으로써, 최후의 승리자는 결국 유리 아네시스가 된다는 것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너진다고?
“절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거야.”
유리의 붉은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만에 하나 그년이 외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너 따위의 증언은 믿을 가치도 없어. 네가 정말 그년을 끌어내리기를 원한다면 증거를 찾아 가져와.”
대부인은 유리에게 차갑게 일갈했었다.
**
칼리안은 눈을 떴다.
제 방의 침구와는 다른, 조금 까슬한 침구가 피부에 닿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윗몸을 일으켰다.
뭔가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아프고 속도 메스껍다.
차가운 바닥에서 밤새 누워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곳은…….”
에시카의 방 안이다.
열린 문으로 햇살과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고, 흰 커튼이 살랑거리며 나부끼고 있다.
칼리안은 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에시카의 방에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저녁 식사 때, 에시카를 멀리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속이 조금 상해 술을 연거푸 마셨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무작정 그녀의 방으로 왔다.
드레스를 맞추던 어머니의 방에서, 자신이 아름답냐고 묻던 에시카는 그 순간부터 그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
참고 참다가 들른 것이었다.
그리고 에시카에게 입을 맞추려 했던 것 같다.
머릿속이 조금 어지러워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과음했던 건가.”
확실히,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다.
칼리안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걸을 만은 했다.
에시카의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아침에 산책이라도 나간 것인가, 칼리안도 곧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기다리던 시종에게 칼리안은 말했다.
“부인의 침구를 저택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언제 나갔지?”
칼리안의 기침을 기다리던 시종은 곧바로 대답했다.
“공작 전하께서 나오시기 한 시간 전에 나오셨습니다. 산책을 하신다더군요.”
역시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칼리안은 그녀가 갔다는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술을 먹고 정신을 잃는 추태를 보이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시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소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요즘의 그는 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작 전하.”
문득 정원으로 들어서는데, 드레스를 입은 유리 아네시스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멈추어 선 칼리안에게 다가가 밝게 인사를 했다.
한껏 꾸민 듯한 금발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화장을 한 듯한 볼은 조금 붉었고, 눈은 반가움에 살짝 젖어 있었다. 입가는…… 긴장한 듯 살짝 굳어 있었고 말이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다.
“긴 시간 뵙지 못해서 너무 섭섭…….”
“지금은 내가 바쁘다.”
그러나 칼리안은 유리의 말을 단번에 끊었다.
귀찮다는 듯한 어조가 묻어나자 유리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유리 아네시스는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돌이었지만, 보석에 눈이 먼 이에게는 그저 하찮은 돌일 뿐이다.
칼리안은 유리의 얼굴을 살피지도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 공작…… 전하?”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말을 더듬었지만 칼리안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뭔가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버린 사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