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5)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6. 물벼락(5/192)
#6. 물벼락
2023.12.06.
‘그 얼굴을 보아도 이제 가슴이 동하지 않구나. 대화를 나누고 싶지조차 않아.’
방에 들어온 에시카는 기지개를 한번 켠 뒤 침대에 누웠다.
골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흘러가는 조각구름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칼리안 클라우스를 처음 만나고, 그에게 반하게 되었던 순간이 머릿속에 지나간다.
전생에서 황제를 만나게 된 영령의 그 나날도 함께, 겹쳐 지나간다.
‘결과는 파국이지. 속 빈 강정이 뭐라고 참으로 어리석었다.’
에시카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제 이 몸의 인생은 이 몸의 것이야.’
푸른 눈동자 안에 서늘한 총기가 담겨 있었다.
비록 과거의 힘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눈앞의 상황을 똑바로 판단할 지식과 경험이 있다.
상황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달라질 것이다.
탁-
문득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에시카의 눈앞에 보인 여자는 넷이었다.
앞에 있는 세 여자는 대부인 직속 하녀들.
대부인의 권세를 등에 업고 공작가를 쥐락펴락하는 여자들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반응이 매우 즉각적이군.’
그리고 그 뒤에는 이번에 시녀장 감투를 쓰게 된 유리가 서 있었다.
그녀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비틀린다.
양동이에 차가운 물을 잔뜩 가져온 세 하녀는 그것을 에시카를 향해 끼얹었다.
촤악- 촤아악-
차가운 물이 에시카에게 끼얹어졌다.
곱게 빗었던 머리는 물에 완전히 젖었고 그녀의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양동이를 비우고 나서도 턱 끝과 소매 끝에서 한참 동안 물이 줄줄 떨어졌다.
유리는 하녀들 앞으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나와 에시카의 앞에 섰다.
그리고 턱 끝을 치켜들고 말했다.
“대부인께서, 네게 시원한 냉수를 가져다주라고 명령하셨어.”
유리의 입술 끝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건방진 행동을 고치는 데는 향긋한 차보다 시원한 물이 더 효과적이라며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서 즐거운 조롱이 느껴졌다.
“그런데…… 꼭 물에 젖은 생쥐 꼴이네?”
유리의 말에 뒤의 하녀들이 소리를 내며 웃어 댔다.
에시카의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유리는 엉망이 된 에시카의 모습에 속이 통쾌했다.
허울뿐인 부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칼리안과 함께 차를 마시지?
게다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는데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일을 보고하며 대부인의 심기를 살살 긁었다.
일부러 얼음장 같은 물을 길어 와 끼얹었으니 정신이 나갈 지경일 것이다.
에시카는 눈 앞을 가린 젖은 머리칼을 천천히 넘겼다.
“…….”
에시카의 푸른 눈과 시선을 마주친 유리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차가운 물세례에 겁에 질렸거나 울고 있을 줄 알았던 눈에는 조금의 감흥도 없었다.
유리는 모를 것이다.
천영령은 어릴 적부터 얼음골에서 수십 일을 지새며 수련했었다는 사실을.
아직 허약한 몸이지만, 이 정도에 눈썹 한 번 움찔할 리가 없는 정신력의 그녀이다.
“……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머리카락을 앞에서 뒤로 넘겼다.
유리의 뒤에 선 하녀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에시카의 반응에 흠칫한 모습이었다.
원래 괴롭힘도, 괴롭힘당하는 자의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다.
그러나 에시카는…….
“……끝난 거니?”
태연한 표정으로, 아니,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유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한껏 올라가 있던 유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너…….”
“대부인께, 냉수는 잘 마셨다고 전해 줘.”
에시카의 입술이 달싹이며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비 며느리가 직접 가져다주다니, 영광이네. 많이 친해졌나 봐?”
이내 에시카의 눈길이 유리 뒤의 하녀들에게 향했다.
‘예비 며느리’라는 말에 유리의 손이 움찔 움직였다.
“너 그게 무슨……!”
“하녀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는 거야? 네가 그랬잖아. 클라우스의 며느리가 될 거라고.”
“……!”
아직은 대부인의 귀에, 유리가 칼리안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대부인의 지독한 모성애 때문에 에시카가 그리도 괴롭힘을 당했는데.
보석을 바쳐 막 시녀장이 된 유리가 눈에 거슬리기라도 한다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유리가 뒤를 보자, 제 뒤를 따랐던 하녀들이 서로 오묘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에시카는 입술 끝을 올린 채, 당황하는 제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이런 말을 꺼낸 거야?’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시카, 멍청한 저 애가 이런 상황에 그런 치밀한 계산까지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으득,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내 에시카는 유리 뒤의 하녀들로 시선을 옮겼다.
“에밀리아, 애니, 루사. 너희 셋이 오늘 한 일에 대해서도 잘 기억해 두겠다. 윗사람을 모시는 태도가 참으로 훌륭하니…….”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에 굳어 있던 하녀들 역시 흠칫했다.
“내가 언젠가 꼭…… 상을 내리도록 하지.”
공작 부인이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클라우스 공작 부인은 파리한 몰골에 매일 보석을 휘감거나 치장하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 꼴을 못마땅해하던 대부인이 자신을 내쫓겠다고 하자 빌고 빌어 이 지저분한 골방에서 반성하기로 하며 방을 옮겼지만, 사람이 쉽게 변할 리가.
그러나 지금 물에 흠뻑 젖은 공작 부인의 눈빛은…….
‘오한이 드는 것 같아.’
섬뜩하기 그지없다. 눈에는 잔잔한 살기가 흐르고 입가는 비틀려 살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마녀 같지 않은가.
하녀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가…… 가자.”
꾹 쥔 주먹을 부르르 떤 유리는 휙 돌아섰다.
그 뒤를 세 하녀가 따랐다.
위풍당당하게 들어왔던 그들의 발걸음은 초조한 보폭으로 변해 있었다.
**
“부인, 마른 옷을 가져왔는데…… 옷이…….”
셀라는 에시카의 앞에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죄송하지만 하녀의 옷밖에 구할 수 없었습니다.”
에시카는 말없이 옷을 갈아입었지만 셀라는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에시카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생각했다.
자신이 시집올 때 가져왔던 호화로운 드레스들에 대해서.
원래 그녀가 배정받은 방은 넓고 햇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클라우스 공작 부인의 지위에 어울릴 만큼 화려한 방이기도 했었고.
하지만 대부인은 일일이 꼬투리를 잡아 에시카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칼리안도 전혀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하니 에시카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끝내 대부인은 이런 식으로 사치스럽게 행동하며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거면, 이혼을 하라고 최후통첩을 내렸고…….
에시카는 볕도 들지 않고 인적도 드문 골방에 스스로 이사를 왔다.
드레스와 장신구들도 격식을 차려야 할 때의 두 벌을 제외하고는 몽땅 대부인에게 맡기고 말이다.
두 벌 중 한 벌을 유리가 실수라는 핑계로 망쳐 버렸으니 에시카는 단벌 숙녀인 셈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옷 역시 대부인의 뜻일 터.’
귀족 여성이 하녀의 옷을 입는 것은 참으로 굴욕적인 일이다.
그러니 에시카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젖은 옷을 입고 옷이 마를 때까지 벌벌 떨든지, 아니면 참혹한 굴욕을 느끼며 천한 하녀들처럼 하녀복을 입든지.
“어때, 셀라?”
옷매무새를 정돈한 에시카는 셀라가 가져온 하녀복을 입고 셀라에게 물었다.
셀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시카를 보고 조금 놀랐다.
“부인…….”
흔한 하녀복조차 에시카의 특별함을 가려 주지는 못했다.
자세에서부터 흐르는 고고한 기품은 특별하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확실히 아름답다.
‘대체 공작 전하께서는 왜 부인을 아껴 주시지 않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부인의 몸에 꼭 맞는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부…… 부인께서 하녀복을 입으시기에는…….”
“아니, 진짜 하녀 같냐고.”
“그럴 리가요! 부인께서는 고귀하신 공작 부인이신……!”
에시카가 고운 눈썹 사이를 구겼다.
“어찌하면 그럴듯한 하녀처럼 보일 수 있냐고 묻는 거다.”
흠칫한 셀라는 대답했다.
“……하녀들은 머리를 묶고 다니니, 묶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대답을 원했어. 난 실용적인 게 좋거든. 모양새만 예쁜 쓰레기들은 질색이란다. 그런 것들은 지난 삶에서 질리도록 입었으니…….”
에시카는 사악한 눈빛으로 미소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가져다준 이 옷과, 머리를 묶으라는 조언. 아주 마음에 든다.”
“가…… 감사합니다.”
에시카는 거울 속에 비춘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생은 새옹지마, 활동하기에 좋은 날개옷이 생겼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화를 내고 절망하는 공작 부인의 모습을 예상하고 지레 겁을 먹었던 셀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에시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갈래로 머리를 틀어 묶는 그녀는 정말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클라우스 공작가로 향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