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52)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52. 아내에게 기회를 구걸하다(52/192)
#52. 아내에게 기회를 구걸하다
2024.01.21.
콜록- 콜록-
황제의 침상에 탁한 기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잠시 입을 가린 손수건에서는 벌건 피가 묻어 나왔다.
튜레시안의 17대 황제 오리아트 하일 루세인, 올해로 70세의 그에게는 본디 여러 아들딸이 있었으나 이제는 아들 둘이 전부였다.
20년 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외국과 손잡고 나라를 전복했을 때 그의 자식들은 황후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처참히 사라졌다.
간신히 자리를 피한 오리아트와, 행방불명이 되었던 레스반을 제외하고 모두가 적들의 손에 죽었던 것이다.
이후 나라를 재건하며 레스반을 되찾고, 새 황후를 들여 황자를 하나 낳았다.
공식적으로는 2황자로 불리는 그 아이는 현재 열아홉 살의 성년으로, 총명하기는 하나 그 기량이 황태자인 레스반에게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콜록, 콜록.”
문이 열리고 딱딱한 발소리를 내며 레스반이 다가왔다.
죽은 황후를 닮은 검은 머리칼과 튜레시안 황족의 상징인 선명한 금안, 그리고 오리아트의 전성기를 훨씬 능가하는 강자의 기운.
“오늘은 어떠하십니까.”
“며칠 살지 못할 듯하다.”
“석 달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레스반의 말에 황제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도 클클 웃었다.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으나, 괜한 호들갑을 떠는 2황자보다는 이리 초연한 레스반을 대하기에 더 마음이 편했다.
오리아트는 이미 대부분의 정무를 레스반에게 넘기었다.
레스반이 지속해 온 10년간의 승전으로 군대는 목숨을 걸고 레스반을 따랐으며, 모든 제국민이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너는 끝끝내 불효할 생각이더냐. 아니면 병영에서 들려오던 그 뜬소문이 사실이더냐.”
황제는 눈썹을 조금 굳히며 물었다.
“네 백인대장 하나를 방에 들여 바지를 벗겼다더군.”
레스반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입술을 달싹였다.
“정복지의 여자들을 희롱하기에 성기를 잘라 개에게 던져 줬을 뿐입니다. 그놈은 사자 밥으로 먹였고. 으드득, 으드득, 잘 씹어먹더군요.”
적나라한 묘사에 황제는 눈을 찌푸렸지만 레스반은 태연했다.
“폐하께서 늘 제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해도 민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고.”
“민심은 전쟁과 처벌로만 얻는 것이 아니다. 황실의 미래를 보여주고 제국민들에게 희망을 가지게 해야지. 황태자로서의 의무를 언제까지 외면할 생각이더냐.”
“탈환지는…….”
레스반의 금안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한 곳 남았습니다.”
십 년 전 전쟁을 일으켰던 레스반은 다섯 개의 소왕국들을 무너뜨렸다. 튜레시안을 짓밟았던 왕국들의 왕과 왕실에 그는 철저히 복수하였으며 대륙을 피로 물들였다.
레스반의 이름만 들어도 한때 튜레시안의 적이었던 자들은 바들바들 떨었으며, 정복지의 모든 이들이 레스반의 말발굽 아래 고개를 처박았다.
그들은 한때 튜레시안에 검 끝을 겨눈 것을, 혹은 행방불명이 되어 사라졌던 레스반을 찾아 후환을 처리하지 못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그곳마저 탈환하고 나면 하인즈 대공가의 딸도 애가 이미 둘은 딸렸겠군.”
황제의 말에 레스반은 피식 미소 지었다.
“아직도 하인즈의 여식을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두고 계셨던 겁니까. 언젠가 절 보고 오줌을 지렸다는 이야기를 잊어버리시진 않으셨을 텐데요.”
“그건 네놈이 전쟁에서 복귀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피 칠갑으로 나타났으니 아무리 강단 있는 여자라도 어찌 그 꼴을 보고 기절하지 않고 버티겠느냐. 아이고, 머리야.”
황제는 미간 사이를 좁혔다.
레스반이 여자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명사가 될 줄 알았더라면, 10년 전 복수를 위한 정복 전쟁을 맡겨 달라고 청할 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했고 튜레시안의 역사상 어느 때보다 제국은 번영했으나 황제는 후사에 대한 걱정에 언제나 속이 탔다.
“네 오죽하면 전쟁지의 포로라도 네 침소에 밀어 넣으라고 네놈의 부하들에게 닦달하겠느냐.”
물론 그들은 레스반에게 죽기 싫었기에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였다.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말씀을 기다려 왔는데.”
레스반의 말에 황제는 끙, 하고 눈을 찌푸렸다.
10년, 아니 5년 전만 해도 대 튜레시안 제국의 황태자인 레스반에게 혼맥이 닿는 가문들은 당연히도 제국 최고의 명문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영애들은 이미 애가 몇씩은 딸려 있었고, 미혼의 영애들에게는 레스반에게 여자 죽이는 취미가 있다는 둥, 살인귀라는 등의 악소문이 돌아 레스반의 이름만 들어도 떠는 경우가 부지기수.
물론 지금이라도 멀끔한 모습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들이밀면 이 외모로 영애들의 선망과 인기를 얻는 것은 금방이겠지만, 레스반은 피에 굶주린 전쟁광 행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저들을 다 죽여 없앨 겁니다. 사지를 끊고 벌레처럼 시궁창을 구르게 할 거예요.”
열 살짜리의 눈에 흐르던 그 섬뜩한 독기는 아직도 오리아트의 기억 속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는 여전히 레스반을 움직이는 동력이겠지.
“더 일찍 포기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레스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오리아트는 레스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네게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찾아 헤매던 프리하츠의 소녀. 잘 될 싹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던데 그 애의 눈은 영 흐리멍덩했다.
가문은 충분치 않으며 황실에 들어올 만한 자질조차 보이지 않는데 어찌 찾아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종을 시켜 그 애가 병으로 죽었다고 둘러댔었다.
훗날 공작가의 부인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여태 잊지 않고 있을 줄이야.
“유언을 남기마.”
오리아트는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늙었다.
“형제의 목숨을 취하지 말아라, 후사를 생산하라.”
주름진 눈매 속 탁한 금안이 빛나고 있었다.
“필히 여자를 안아 황실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
콜록-
다시 피 섞인 기침이 마른 입 사이로 터져 나왔다.
레스반은 감흥 없는 눈으로 조용히 늙은 아버지를 응시할 뿐이었다.
명맥은 늙고 썩어 사라지고, 힘과 권력은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미친다.
서로 다른 대의의 충돌 속에서도, 아까 맡았던 달콤한 토끼 피 냄새만이 그의 코끝에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밤이 늦어서요.”
문을 열고 들어와 한참을 제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칼리안을 보며, 에시카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안은 일렁이는 눈으로 에시카를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 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그녀와의 관계가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제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부인은…… 나를 원망하고 있소?”
에시카 클라우스, 똑똑하고 아름다운 이 여인을…… 자신만을 보고 수도까지 온 그녀를 3년 내내 줄기차게 외면했다.
“…….”
처음에는 그녀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었다.
받는 것 없어도, 에시카의 사랑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변화에 괘씸해하는 자신에 대해 줄기차게 합리화했었다.
바보같이 에시카가 사치가 심하고 악독하다는 어머니의 말만 믿었다.
뻔히 학대당하고 있는 것이 보임에도 이유가 있으니 그런 것이라고 외면했었고.
“내가…… 미안하오. 전부 미안하오.”
꽉 쥔 칼리안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처절하게 에시카에게 사과를 전했다.
에시카는 감정 없는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인이 날 외면한 뒤에야 내가 부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달았소. 그로 인해 부인이 상처받았으리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소.”
“…….”
“어머니의 말만 믿지 않았어야 했소. 내가 직접 판단해야 했어.”
그의 자책에는 절절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 다시 기회를 주시오, 에시카. 내가 실수를 만회하고 그대와 다시 시작할 기회를.”
그는 한 번도 에시카에게 이런 자세로 기회를 구걸해 본 적 없었다.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옳았고 무엇도 후회하지 않던 그였다.
이전의 에시카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칼리안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물론이에요. 앞으로, 우리 잘살아 봐요.’ 하며 고난과 역경 끝 진실한 사랑을 깨달은 남편과 함께할 내일을 그려 가겠지.
그러나 진심이 담긴 후회에도 에시카는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만약.”
에시카는 차분하고 태연한 얼굴로 칼리안의 후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제가 변하지 않았어도 지금 공작께서 제게 잘못을 비셨을까요?”
에시카의 말에 칼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에시카의 말은 이 어그러진 관계의 정곡을 찔렀다.
‘나는 알고 있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에시카의 푸른 눈은 칼리안의 영혼을 꿰뚫어 본다.
그리고 영령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일들도 분명했다.
“……에시카.”
이 남자는 여전히 제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에시카를 밀어 쓰러트렸을 그때의 눈빛처럼, 차라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듯 경멸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겠지.
모든 것이 소설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유리는 칼리안의 아이를 배고, 자신은 쫓겨나고…….
“중요한 건…… 내가 부인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는 거야.”
칼리안은 에시카의 어깨를 잡고 외쳤다.
제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 눈썹을 굳히고, 절박한 목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에시카는 손을 들어 제 어깨에서 칼리안의 손을 떼어 냈다.
그 손짓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칼리안은 가슴이 칼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철저히 외면당한다는 것이 이렇게 섬뜩한 느낌인 건가.
“중요한 건, 이미 저는 충분히 상처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상처, 라는 말에 칼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더는 당신을…….”
칼에 찔렸던 가슴이 계속해서 욱신거린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지독한 통증이었다.
한 점의 온기라도 찾고 싶은 에시카의 눈은 얼음 바다처럼 차가웠다.
“제 옷을 빼앗고 저를 골방으로 보내고, 하녀들을 시켜 썩은 빵을 먹이고 겨울에는 얼음물을 제게 끼얹으셨지요.”
상처받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상처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녀는 황실 조사단에게 보고할 때도 이런 담담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