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53)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53. 마녀 사냥(53/192)
#53. 마녀 사냥
2024.01.22.
유려한 검의 궤적이 대기를 가른다.
작은 검을 들고 빙그르르 도는 에시카의 움직임은 춤을 추듯 가벼웠다.
팔꿈치를 돌려 손목을 직각으로 세우자 그녀의 손에서 노닐던 검이 정확히 멈추었다.
수련을 마친 에시카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직 푸른 하늘의 저 너머에서 붉은 태양이 고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택이 잠들어 있는 조용한 시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시간을 알차게 보내었다.
‘태양이 중천을 향해 가는구나.’
어젯밤의 일을 문득 떠올리며 에시카는 생각했다.
잔뜩 상처받은 듯한 그런 표정이라니, 웃음이 날 정도이다.
‘하지만 칼리안, 해가 지기까지는 한참 남았어.’
칼리안이 그녀를 밀어 넘어뜨려 돌에 머리를 찧지 않았더라면 에시카는 기억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칼리안의 업보이다.
에시카가 준비한 치밀한 불행조차, 전부.
에시카는 훌쩍 발돋움해 저택 지붕 위로 올라갔다.
굳이 하인들을 마주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귀환하는 것이 좋다.
‘그나저나, 변수라 생각했던 것이 변수가 아니었고…….’
창문을 열고 들어가며 그녀는 레스반의 얼굴을 떠올렸다.
튜레시안의 폭군, 레스반 데온 루세인.
그는 에시카에게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변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변수였으니…….’
에시카는 침대에 누워 어둑한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심장이 쿵, 쿵 뛰고 있었다.
“영령.”
역시 하세츠에서, 영령으로서의 자아가 잠시 깨어났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그것은 레스반에게 잊히지 않는 어떤 인상을 주었고.
그는 20년 만에 다시 만난 에시카를 지옥 끝까지 쫓아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대체 나, 뭐라고 말했던 거야.’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대부인의 방에서 나온 유리의 안면 가득 미소가 차 있었다.
제 눈치를 보는 하녀들에게, 내 곧 너희들을 저택에서 쫓아내겠다 독설을 한 유리는 회랑을 걸었다.
아무리 리오나 클라우스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궁하면 잡아야 할 동아줄을 찾기 마련이었다.
썩고 볼품없는 동아줄이라고 해도 가릴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칼리안은 제 아내를 학대하고 거짓말을 해 왔던 리오나에게 배신감을 느껴 관계를 끊다시피 한 참이며 리오나는 거의 매일 황실 조사단을 들락거리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아시잖아요. 공작 전하와의 오해를 풀 가장 좋은 방법은 단 하나라는 것을.”
“……증거는 찾았느냐?”
리오나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었다.
“그전에 대부인께서 제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셔야 해요.”
감히 제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냐며 유리의 뺨을 올려붙이려는 리오나였지만 유리는 형형한 눈으로 리오나에게 외쳤다.
“제 배 속에 그분의 아이가 있어요.”
“……뭐라고?”
“이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공작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유리는 의기양양하게 리오나에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님.”
리오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제가 어머님을 도울게요. 같이…… 그 못된 계집애를 쫓아내요.”
리오나가 유리의 임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브리기트의 에시카만도 못한, 하급 귀족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는 아네시스라니.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방법은 없고 일이 꼬일 대로 꼬인 상황이다.
두 계집 다 클라우스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을 이 신세로 만든 에시카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것이 우선.
유리의 처분은……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애만 뺏고 쫓아내도 되는 것이고.
머리를 빠르게 굴리던 리오나는 달갑지 않은 눈빛으로 유리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유리는 에시카를 위한 무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 댓바람부터 광장에서 에시카의 불륜에 대한 소문을 흘렸으니…… 그 소식을 듣고 남자가 저택에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정말 좋을 텐데.’
사랑의 도피나, 그런 우스운 것들이 있지 않은가.
즐거운 생각을 하며 유리는 칼리안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급히 표정 관리를 하느라 눈을 내리깔았다.
슬프고 분하게, 이 정도면 되었다.
“……공작 전하. 유리입니다.”
**
매우 촘촘한 계획을 세웠다고 해도 간혹 원치 않은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뜸 하인들을 시켜 자신을 내려오도록 부른 칼리안의 모습에 에시카는 눈썹을 굳혔다.
칼리안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칼리안뿐이 아니었다.
유리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리오나, 그리고 자신을 보고 차가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유리.
오늘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눈빛이 거슬렸다.
꽤 귀찮은 무대를 기획한 사람은 필시 유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의 앞에 선 에시카는 그에게 물었다.
“어제, 저희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아는데요.”
칼리안은 말없이 에시카를 응시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다.
절망과 분노, 원망, 불신, 질투, 살의까지.
“하실 말씀이 없으면 가 봐도 되겠습니까?”
에시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리안은 에시카의 손목을 잡았다.
강한 손아귀의 힘에 손목을 붙잡힌 에시카는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짓입니까?”
“나는 부인이 변한 이유가…… 내 잘못이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그리 착각했었다.”
“착각이라고 하셨어요?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응. 착각이었어. 왜냐면 그대가 변한 이유는 나 때문이, 클라우스 공작가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대는 감히…… 감히!”
칼리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에 짙은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를 배신했어! 다른 사내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그의 분노가 담긴 절규가 저택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리오나는 차가운 시선을 들어 에시카를 보았다.
에시카는 입술 끝을 천천히 비틀어 올리며 칼리안을 형형하게 응시했다.
분노에 휩싸인 칼리안은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당신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 처벌하셨을 뿐인데…… 나는 당신이 이렇게 더러운 여자인 줄도 모르고!”
칼리안의 말에 일순간 에시카의 입에 걸린 미소가 식었다.
“그만해요, 칼리안.”
리오나가 슬픈 표정으로 칼리안의 등에 손을 뻗었다.
“그날 황실 조사단이 있는데 어찌 집안의 치부를 내보이겠어요. 모두가 클라우스를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에시카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 자리는 에시카의 불륜을 질타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들에게 이미 에시카는 외간 사내와 불륜하느라 시어머니를 모함한 여자였고, 칼리안은 부정한 아내에게 외면받은 피해자였다.
리오나는 모든 것을 알면서 뒤집어쓴 자애로운 어머니였고 말이다.
“……에시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어.”
리오나를 부축하던 유리도 말을 보태었다.
“설마 아직도 그 남자를 만나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얼마 전 네 방에서 이걸 발견하고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어.”
에시카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유리의 손에는…… 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척 봐도 비싸고 귀해 보이는 에메랄드 반지, 그 사이즈는 완벽히 남자의 것이었다.
브리기트에서 보내 주는 보석은 전부 에시카의 사이즈에 맞춘 것이었고 말이다.
‘이런…….’
에시카는 한참 동안 반지를 본 이후에야 그 반지의 정체를 깨달았다.
언젠가 레스반과 차를 마셨을 때 의도치 않게 흘러든 반지였다.
‘어차피 이렇게 자주 얽힐 것을, 돌려줄 것을 그랬나.’
유리는 열심히 방을 뒤진 모양이었다.
뭐 하나라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와중 적당한 것을 발견해 기뻤을 유리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공작 부인께서 불륜이라니요! 말도 안 돼요!”
에시카의 뒤를 따라온 셀라가 얼굴이 하얘져서 급히 외쳤다.
“저는 공작 부인을 모셨지만 단 한 번도…….”
“고작 몇 달 모신 네가 에시카에 대해 더 잘 알겠니. 아니면 친정에서부터 소꿉친구였던 내가 에시카를 더 잘 알겠니.”
“그…… 그건!”
용감하게 끼어든 셀라였지만 유리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이들은 작정하고 에시카를 불륜 당사자로 몰고 있었다.
“공작께서는…….”
차분히 상황을 관망하던 에시카는 고개를 들어 칼리안과 눈을 맞추었다.
칼리안의 눈동자는 한숨이 나올 만큼 탁했다.
“정말 제가 외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당당하게 묻는 에시카의 모습에 칼리안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부인이 내게 이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뭐라고요?”
“그대는 나를 흠모해서 나와 결혼시켜 달라고 그대의 아비에게 졸랐었다. 그리고 줄곧 나를 사랑했었지. 항상 내 뒤를 쫓아다니고 나와 말 한번 나누어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어. 지겨울 정도로 내 가까이에서 알랑거리려 했었지.”
칼리안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국 어머니의 학대와 나의 냉대는 핑계였을 뿐이잖아!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어.”
“…….”
“나를 거절하고…… 내가 잘못에 대해 사과했는데도 나를 외면하고! 그 에시카 클라우스가. 이 칼리안 클라우스밖에 모르는 그 에시카가!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니…….”
칼리안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유리의 이야기를 듣고야 모든 퍼즐이 짜 맞추어졌다.
가상의 불륜 상대를 잡아 오지 않는 한 유리의 불륜 주장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칼리안은 반성보다는 합리화를 택했다.
위대한 클라우스 공작인 자신이 왜 브리기트의 에시카 따위에게 용서를 빌고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이지?
에시카의 불륜은 그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작가의 주인은 칼리안 클라우스, 이곳은 그의 뜻대로 되는 곳.
“…….”
에시카는 어이없게 돌아가는 이 상황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칼리안은 거칠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살기를 내뿜었다.
“어떤 자식이야. 어떤 자식에게 빠져서 클라우스의 명예를 내팽개치고 이런 미친 짓을 했냐는 말이야!”
귀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큰 목소리가 울렸지만 에시카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몇 초의 차를 두고 어깨가 살짝 들썩였을 뿐.
유리는 에시카가 당황해 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래. 제깟 게 변했다고 해도 약하고 멍청한 애일 뿐이야.’
그러나 잠시 후 그 생각은 뒤바뀌었다.
고개를 든 에시카가 우스워서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잔잔히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푸…… 풋…… 크큭.”
리오나는 죽일 듯 에시카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녀의 인정만 받아 내면, 지참금을 돌려주지 않고 위자료까지 받아 가며 저 망할 계집을 내쫓을 수 있다.
하지만 에시카의 웃음이 마침내 그쳤을 때, 에시카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왔는데.”
제 뒤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에시카는 흠칫했다.
그리고 눈썹을 살짝 굳힌 채 뒤를 돌아보았다.
건장한 키의 무게가 발에 실릴 때마다 바닥에 미미한 진동이 울려 퍼진다.
짙은 금안은 무심해 보이기도 지루해 보이기도, 차가워 보이기도 한다.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자 에시카의 손가락 끝이 움찔했다.
레스반 데온 루세인. 황태자의 등장에 모두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