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54)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54. 외도라고요?(54/192)
#54. 외도라고요?
2024.01.23.
갑작스러운 레스반의 등장에 칼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리오나도, 유리도 모두 놀라 얼어붙은 표정으로 레스반을 바라보았다.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전쟁광이 끼어들기에는 여기는 지나치게 사적인 자리였다.
칼리안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굳힌 채 레스반에게 말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면 금방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경은 내 말이 우습나 보군. 내 용건 때문에 왔다고 말했을 텐데?”
레스반의 서늘한 금안이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제 부인과 가족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레스반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더니 곧바로 손을 검집에 올리고 검을 뽑아냈다.
스르렁- 검날이 올라오는 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선명했다.
레스반의 앞에 선 칼리안 역시 흠칫해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리오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렸다.
황태자가 검을 뽑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아무리 절대권력을 가진 황실이라고 하더라도 황권과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귀족의 집에서 함부로 검을 뽑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리오나는 가네쇼프 세력의 교류 혐의로 황실 조사단의 조사를 받고 있으니…….
“…….”
그녀의 꼭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칼리안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스반은 유려한 손동작으로 검을 치켜올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오나는 필히 제 목을 향할 것이라고 직감하고 눈을 감았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
레스반의 검 끝이 유리의 목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목 끝에 검이 닿을락 말락 한 채 서 있는 유리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유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가 제 목에 검을 들이대는 이유를 말이다.
눈썹을 굳힌 칼리안이 황태자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시녀장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어쩌다 클라우스 공작가의 기강이 이리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늘한 목소리가 황태자의 입술 새에서 흘러나왔다.
“황태자의 반지를 훔치고 살아남길 바라는 자는 없다.”
그 말에 유리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유리의 손에는 에시카의 방에서 가져온 반지가 들려 있었다.
“그건, 20년 전 죽은 내 누이 아스티아의 보석으로 만든 반지이다. 그녀의 이름이 보석 안에 각인되어 있지.”
유리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오나는 비틀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
‘저 멍청한 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외도의 증거를 찾았다며 가지고 나타난 것이 저 전쟁광의 반지라고?
황실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중죄로 취급받아 처벌된다.
바늘로 찔러도 안 들어갈 저 살기등등한 전쟁광 레스반 데온 루세인이 하찮은 에시카 따위의 외도 상대일 확률은 누가 보아도 제로에 수렴한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완전히 허탕인 것이다.
에시카를 더러운 불륜녀로 만드는 계획이 좌절되는 것은 물론…… 클라우스에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저…… 저는……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이건 에시카의 방에서 가져온 거라고요!”
유리는 바들바들 떨며 목소리를 냈다.
“후…… 훔치다니요. 말도 안 돼요. 장물이라고 해도 이건 제가 아니라 에시카가 훔친 거겠죠. 저는…… 아니란 말이에요!”
그리고 에시카를 보며 속으로 외쳤다.
‘그렇다고 말해! 네 거잖아!’
에시카는 잠시 이 상황을 관망했다.
레스반은, 제가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 지금 중요한 쟁점은 그것이 아니다.
레스반이 이곳에 나타난 목적은…… 에시카에 대한 완벽한 조력이었다.
“…….”
그리고 에시카의 입꼬리가 올라간 순간 유리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획된 함정이건 얻어걸린 함정이건, 에시카 클라우스는 더 이상 유리의 목숨에 구명줄을 내려 줄 호구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저는.”
무수한 피가 묻었을 황태자의 검날은 금방이라도 제 목을 꿰뚫을 것이다.
“에시카…… 제발…….”
그러나 에시카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뿐이에요.”
“……!”
유리의 붉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칼리안이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리오나는 유리와 얽히기 싫은 양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모르는 척을 했다.
에시카를 향해 쏘아졌던 비난의 시선은 모두 제게 돌아와 꽂히고 있었다.
유리의 붉은 눈에 공포로 비롯된 눈물이 맺혔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황태자 전하. 저는 정말 맹세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 훔치지 않았다고요! 정말이에요……!”
황태자는 칼리안과 정무를 논의하기 위해 클라우스 저택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그러니 황태자의 반지를 시녀장이 훔쳤다는 것은, 말이 되는 이야기이다.
“아,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에시카는 영 즐거운 미소를 띤 채 입술을 열었다.
“유리 아네시스는 브리기트에서 오는 제 보석들도 여러 번 훔쳤어요. 제가 보석을 보내지 말라고 오라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짓말을 해서 또 보석을 뜯어내려다가 오라비의 고발로 몇 달 동안 청사에서 조사까지 받았답니다.”
에시카의 말을 들은 칼리안의 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유리의 손버릇에 대해서는 청사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시면 될 거예요.”
유리가 에시카를 모함하기 위해 들고 온 남자의 반지가, 훔친 반지였다니.
칼리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실망조차도 들지 않았다.
유리 아네시스. 흉악하고 비겁한 여자.
그렇다면 뒤집어씌운 외도의 혐의도…….
칼리안의 가슴이 덜컹거렸다.
“……공작.”
리오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칼리안에게 말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에시카가 외도를 했다는 것도 유리에게 들었을 뿐. 나도 속은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불순한 세력과 엮여 조사받고 있는 지금 이런 일에 엮이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리오나가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유리를 시켜 황태자의 반지를 훔치게 했다는 식으로 흘러나가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니, 유리 아네시스! 나…… 나는 너를 철석같이 믿었는데!”
리오나는 충격받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황태자가 보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에시카는 그런 그녀의 수가 뻔히 보여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뭐, 하나하나 천천히 쳐 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첫 순서가 유리일 뿐이고.
“유리 아네시스를 즉결처분하는 것에 아무도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아 두지.”
레스반의 건조한 목소리가 꽤 나른하게 들렸다.
다소 지루한 역할극을, 그는 꽤나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아…… 안 돼요……!”
레스반의 서늘한 금안에는 바들바들 떠는 유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남의 것을 욕심내는 하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필요도 있고.”
“……화…… 황태자…… 전하…… 정말 제가 아니에요! 제가 훔친 게 아니라고요!”
유리는 바들바들 떨며 빌었다.
처음으로 목젖까지 다가온 죽음의 공포는 벌써 숨을 옭아매고 있었다.
내려앉은 치밀한 정적은 누구도 그녀를 구해 주지 못할 것임을 암시했다.
에시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그저 더럽고 하찮은 것이라도 보듯 그녀를 응시하던 레스반이 검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살려 주세요, 공작 전하!”
눈물을 뚝뚝 흘리던 유리가 칼리안을 지목하며 외쳤다.
유리는 엉엉 울며 칼리안에게 외쳤다.
“제 배 속에 공작 전하의 아이가 있어요!”
일순간 유리의 목을 꿰뚫으려던 레스반의 검 끝이 멈칫했다.
유리는 제 배를 감싸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가 공작 전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요!”
**
모든 일이 끝나고 제 방에 들어온 칼리안은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쾅, 하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바깥까지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을,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었다.
레스반이 서늘한 표정으로 칼리안을 보았는데, 자존심이 상할 만큼 확실한 경멸이 담긴 눈빛이었다.
한낱 시녀장 따위야 황족의 권한으로 얼마든지 벨 수 있었지만 천한 여자라도 배 속에 공작의 아이가 있다면 즉결처분은 곤란한 일이다.
“……자네의 집안은 정말이지 엉망이군.”
레스반이 검을 거두자 제 발치까지 엉금엉금 기어 온 유리는 빌었었다.
그날 공작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고, 제발 아이와 제 목숨을 살려 달라고 말이다.
이는 칼리안의 인생사에 없었던 가장 끔찍한 사고였다.
한때 제 부인보다 순수하고 기품 있다고 여겼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추했다.
“저를 거두어 주실 거죠? 그렇죠?”
탐욕으로 되도 않는 멍청한 일을 꾸민 여자.
자신은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했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에시카의 반응이었다.
“유리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신 것 같으니, 황태자 전하는 제가 배웅하도록 하죠.”
유리의 손에서 거칠게 반지를 낚아챈 에시카는 뒤돌아섰다.
“목숨이라도 건진 걸 축하해, 유리.”
그리고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저를 붙잡은 칼리안에게, 그녀는 표정 없이 한마디를 던지고 발을 옮겼다.
높낮이는 없었지만 그것은 책망하는 것처럼, 아니,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외도라고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다시는 자신을 향한 온기가 스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들은 이야기였지만 칼리안은 제 관짝에 스스로를 파묻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찢어지는 고통이 가슴에 엄습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주저앉은 채 바닥을 연신 내리쳤다.
칼리안의 집무실 밖, 울려 퍼지는 절규 같은 칼리안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하인들이 흠칫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