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60)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60. 본부인을 위한 호의(60/192)
#60. 본부인을 위한 호의
2024.01.29.
셀라는 에시카의 손짓에 방 바깥으로 나갔고, 방에는 둘만 남았다.
에시카의 앞에 선 칼리안은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그녀의 기품은 방을 장식한 파미나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부인과 저녁을 같이하고 싶었는데…… 아쉬웠어.”
에시카는 칼리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혹여 오전에 시간이 된다면 같이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는 것은…….”
“공작 전하.”
에시카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려 퍼졌다.
칼리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부 사이에 공작 전하라는 호칭은 딱딱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칼리안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게 어떻겠소. 내가 부인을 에시카라고 칭하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은 공작이셨습니다.”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칼이 담긴 에시카의 말에 칼리안은 손을 꿈틀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그 일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에시카.”
칼리안의 입술 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 안은 파미나스의 달콤한 향으로 가득했다.
“그대에게 내가 죽일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평생을 갚아도 눈에 차지 않을 죄를 지었다는 것도 말이야.”
칼리안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는 부인을 의심하고, 부인을 배신했어. 하지만…… 그건 실수였소. 유리와는 단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니까.”
그의 미간 사이 그림자가 졌다.
아주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하듯 말이다.
“사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소. 어떻게 단 하룻밤 만에 유리의 배 속에 내 아이가 생길 수 있었는지. 하지만 분명한 건…….”
칼리안은 진심을 담아 에시카에게 말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 칼리안 클라우스의 부인이자, 클라우스 공작 부인은 오로지 에시카 당신뿐이라는 것이오.”
사실 귀족이 다른 여인을 임신시키고 저택에 들이는 것은 흔치는 않으나 종종 있는 일이다.
제국법대로라면 아내는 외도를 근거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으나, 남편이 내연녀 하나 들였다고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하필 에시카의 친구였던 유리에게서 아이를 보는 것 역시 구설에 오르기는 하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리오나에게서 칼리안을 얻었듯 말이다.
“재미있네요.”
에시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칼리안은 에시카의 웃음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사내들이란…….’ 하면서, 남편을 어린애 타이르듯 하고, 남편이 저지른 부정을 받아 주는 것은 성숙한 여자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에시카의 말투는 오묘한 부분이 있다.
“외도와 임신이 실수라니.”
에시카의 목소리에는 여지가 없었다.
본래 남편을 타이르는 부인은 화를 내더라도 선을 지킨다.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했어도 평생 같이 살 남자이니 말투에 여지가 묻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에시카는 다시 안 볼 사람처럼 말에 거침이 없었다.
“외도조차 한낱 실수로 치부하는 사람이, 내게는 왜 그랬을까요?”
칼리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에시카는 서늘한 눈으로 칼리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공작 전하 자신께 관대한 반만큼이라도 내게 관대했다면.”
“……에시카…….”
“그때 나를 밀치지 않았다면 나는 변하지 못했겠죠. 멍청한 에시카 그대로였을 거야.”
에시카가 이처럼 직설적으로 말할 때는 없었다.
눈앞의 그녀는 사랑 따위와는 거리가 먼 여자처럼 보였다.
이 모습조차 아름답다는 것이 칼리안에게는 참담한 일이었다.
“나를 나로 살게 해 준 공작 전하의 이중성과 이기심에, 매우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애절한 마음에 대한 답은…….”
에시카의 표정은 차분했다.
“……거절하는 것으로 할게요. 영원히.”
“에시카. 내가, 나 칼리안 클라우스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이어지는 거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칼리안의 절규가 재채기처럼 튀어나왔다.
칼리안은 손을 뻗어 에시카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마른 손에서 전해 오는 차가운 감촉이 가슴을 욱신거리게 한다.
“나는 부인을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전에 부인처럼 정숙한 여자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것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소. 그리고 유리 말이야.”
칼리안은 리오나와 꽤 길게 대화했었다.
리오나는 바람맞은 정부인들이 받아들일 만한 내용을 칼리안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유리는 내 아이를 가지고 있고……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내가 책임져야 하오.”
칼리안의 눈빛이 무거웠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에는, 당신이 원한다면 그녀를 클라우스 공작가 밖으로 내보내려 해.”
에시카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유리를 쫓아낸다고?
칼리안은 그것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말을 술술 뱉어냈다.
“부인도 알다시피, 유리는 질이 좋지 않은 여자요. 브리기트의 보석들을 훔치려 하고, 친우인 부인을 훔친 반지로 모함해서 클라우스의 명예를 실추시켰어. 클라우스의 아이에게 결코 좋은 어머니가 되어 주지 못할 것이오.”
“…….”
“그러니…… 아이에게, 그대를 어머니로 모시게 하고 싶소.”
칼리안은 마치 에시카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듯 입을 뗐다.
“물론 아이의 위치는 여전히 서자일 거야. 그대가 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야말로 클라우스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고.”
에시카의 손을 꽉 잡은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오나는 귀족 부인들의 생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을 첩이나 정부로부터 도둑맞은 여인들이, 남편에게서 받고 싶어 하는 것들 말이다.
제가 쫓아낸 선대 클라우스 공작가의 부인 역시 그러했었고.
남편의 아이를 키울 권리만 부인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귀부인들에게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이는 고용된 유모와 하녀들이 키워 주는 것이고, 아이의 양육에 대한 권리를 가진 부인의 권한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핑계로 남편을 휘어잡고 살 수도 있고.
그러니 리오나는 에시카가 정말 이혼할 생각이 없는 한, 이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리오나의 설득을 들은 칼리안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
하지만 에시카는 말없이 칼리안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혹여 제가 이 정도로나 반성했다며 에시카가 감동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칼리안이었지만, 에시카의 입이 열리자 그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유리의 아이를 키우지도 않을 것이고, 아이를 낳지도 않을 겁니다.”
칼리안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에시카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입술을 뗀 칼리안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나와 함께 살지 않겠다는 뜻인가?’
만약 과거의 에시카가 눈앞에 있다면, 오히려 반가운 기색을 품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칼에 베이듯 아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공작께서는 기억하세요.”
설원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에시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께서 제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 제가 가진 원망은 두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칼리안은 이해하지 못했다.
슈페르트가 다녀갔음에도 이혼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필시 자신과 잘살아 보고 싶어서일 텐데, 이렇게 모진 말로 거절하는 이유를.
그리고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내어줄 수 있는 위자료와, 받을 벌이 충분치 않아서일 뿐이라는 것을.
또한 파멸로 다가가는 수레바퀴는 이미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에시카.”
칼리안은 천천히 에시카에게서 손을 뺐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어떻게 에시카를 설득하고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이 문득 에시카의 손가락에 낀 반지로 향했다.
“…….”
칼리안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그것은, 황태자 전하의 반지로 보이는데.”
돌아가신 아스티아 황녀 전하의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왜 반지를 돌려주고 오겠다는 에시카가 이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일까.
에시카는 제 손끝을 잡으려던 칼리안의 손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에시카는 반지를 제 손가락에 맞게 줄였다. 레스반이 착용하고 다녔던 것은 이제 얼핏 보았던 아스티아의 손에도 맞을 것이다.
“받지 않으시더군요.”
그 말에 칼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황태자는 다소 결벽이 있다. 공작저의 불륜 사태에 휘말린 반지를 그녀에게 줘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 뜻이었을까.
반지에 박힌 에메랄드는 영롱했다.
에시카를 지켜 준 사람은 남편인 자신이 아니었다.
철혈의 황태자, 레스반 데온 루세인. 그의 검날이 아직도 뇌리에 선연하다.
“……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오.”
“……?”
“상관없는 반지를 끼고 다니면 좋지 않은 말이 나돌 수도 있소.”
굳은 그의 눈매는 감정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질투인가, 놀라울 것도 없다.
“그러니 처분하는 것이 낫겠소. 내가 알렛 반지를 하나 맞추어 주지.”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 들린다.
에시카는 그의 속 보이는 말이 우스울 뿐이었다.
“유리와 같은 것으로요?”
그리하여 처참히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즐겼다.
“…….”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이게 썩 마음에 들어서요.”
에시카는 칼리안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칼리안의 바싹 굳은 표정에 금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