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82)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82. 칼리안의 친구(82/192)
#82. 칼리안의 친구
2024.02.20.
‘황후의 후원’이라 불리는 황궁의 서편 정원, 마리엘라 루세인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신앙심이 매우 깊은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2황자 브레이튼의 어머니이자, 전대 클라우스 공작의 누이, 그리고 칼리안의 고모였다.
“이 끔찍한 시련 또한 당신의 뜻이십니까…….”
그녀의 눈썹 끝은 올라가 있었고 맞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은 가늘었으며 모두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손톱은 붉은색이었다.
제국의 유일신 타메론, 그것이 그녀가 오로지 믿고 숭상하는 단 하나의 존재였다.
“혹은 당신의 뜻이 아니시라면…….”
잠시 감았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눈을 뜨자 머리색과 같은 갈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동자에는 고통과 슬픔, 분노가 차올라 있었다.
“악마의 시험이란 말씀이십니까.”
쉰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의 발치에는 구겨진 편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클라우스 가문에 닥친 일련의 사건들과 그 모든 배후에 에시카 클라우스 공작 부인이 관련되어 있음을 고발하는 편지였다.
마리엘라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음 도중에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도 했다.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과 유일신 타메론만 있는 듯,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한참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잠시 후 마리엘라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은 이리도 악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불경한 악마의 하수인을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당신의 종, 이 마리엘라뿐이라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눈에는 광기 어린 환희가 차 있었다.
“기꺼이 몸을 사리지 않고 당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겠습니다.”
**
하녀들이 버리고 간 옷을 적당히 골라 입은 에시카는 번화가에 나섰다.
일전에 레스반이 소개해 준 파닉스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셀릭서의 책에 대한 실마리를 획득했다는 소식이 말이다.
‘셀릭서의 제조법만 있으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다.
주인이 쫓겨난 클라우스에는 필시 탐욕의 손을 뻗는 이들이 많을 것이고, 에시카는 제 자산을 지키려면 강해져야만 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위협은 커지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그 셋을 키운 보람이 있어.’
대부분의 하녀와 하인들이 짐을 싸서 떠났지만, 헤모스, 셀라만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
헤모스는 얼마 남지 않은 식량들로도 질 좋은 음식을 만들었고 영약도 꾸준히 공급했다.
물론 남은 식량도 한계가 있기에 얼른 칼리안이 이혼 합의서와 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가문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뭐 내일이면 결단이 서겠지, 생각하는 에시카였다.
그녀는 번화가를 지나 암흑가 초입으로 들어섰다.
저번에 레스반과 함께 가던 길을 기억해 걷고 있던 때였다.
“……이게 누구신가.”
어디에선가 들어 본 적 있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자 둘과 시시덕거리고 있던 사내 하나가 에시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에시카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가벤 펠로페. 칼리안 클라우스의 친구였다.
친구라는 것도 사실 예전의 일이지만, 아무튼 귀족치고는 질이 안 좋은 남자이다.
그는 약에 취한 듯 헤롱거리는 눈빛으로 비척비척 에시카의 앞으로 다가왔다.
“클라우스 부인 아니시오. 아아, 클라우스의…… 비통한 소식은 나도 들었소. 그래, 참 안되었지. 정말…….”
가벤은 혀 꼬인 발음으로 중얼거리며 제 손을 이마에 짚었다.
전혀 안타깝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이내 털썩, 손을 내린 가벤은 에시카를 보며 말했다.
“클라우스가 엄청난 빚을 져서 돈이 필요하다 하더군요. 부인 또한 걱정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남편 한 번 잘못 만나서…….”
“…….”
“인생 망할 위기에 처했으니 이 얼마나……. 음……. 비통한 일일까요. 여인네들의 운명이란 참…….”
이전에 에시카의 앞에서 격식을 차리던 가벤은, 약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본성이 이런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음흉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 부인을 봤을 때부터, 아니지, 그러니까 최근에 칼리안과 절교하던 날 부인을 보았을 때부터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이 아닐까. 칼리안에게 질투가 날 정도이더군요. 그런데 이런 더럽고 하찮은 옷을 입고 있으니…… 내 마음이 아픕니다.”
가벤은 진심이라는 듯 제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렸다.
에시카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우스가의 비극을 공감하고 안타까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더 할 말이 없으시면 비켜 주시죠.”
“아니, 할 말이 없기는요. 이런 곳에서 이렇게 반가운 얼굴을 만났으니…… 제가 어떻게 부인을 그냥 보내겠습니까.”
“…….”
에시카가 눈썹을 찌푸렸지만 가벤은 눈치 따위 말아먹은 얼굴로 말했다.
“이 암흑가까지 온 것을 보면 사채를 쓰거나 물건을 팔기 위해 오신 것 같은데, 그 정도 푼돈은 제가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그의 눈빛이 에시카의 위아래를 훑었다.
가벤과 에시카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칼리안이 엄청나게 경계했던 것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친구 아내에게 질척대는 개차반들끼리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오늘 하루만, 저와 같이 있어 주신다면…… 이 주머니를 다 털어 드리죠.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부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제 바지의 중간 부분을 가리키던 가벤은 에시카의 손을 잡으려고 음흉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에시카는 가벤의 손이 닫자마자 매몰차게 그것을 쳐 내었다.
그러자 가벤이 불쾌하다는 듯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니. 클라우스도 망한 참에 왜 이렇게 모질게 구십니까. 뭐, 이 골목에도 목적이 있어서 오셨을 텐데, 괜히 엉뚱한 놈에게 약점을 잡히기보다는 남편의 친구가 그래도 믿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러지 말고…….”
결국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오늘 검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지만, 저런 얼간이 하나 제압하는 것은 코 푸는 것보다 쉽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비수가 가벤의 손바닥에 꽂혔다.
그리고 손등을 반쯤 관통했다.
에시카도 흠칫 놀랄 정도의 엄청난 속도였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가벤은 제 손을 보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악! 악!!”
그 뒤에서 가벤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도 가벤의 손에 비수가 꽂힌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어두운 골목으로 도망쳤다.
“어머! 꺄악!!”
손에 비수가 꽂혀 피가 철철 나오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게 뭐야! 내 손! 내 손!!”
가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에시카는 뒤에서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접근해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공격했다는 것은 그가 엄청난 고수라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가벤은 다가오는 남자가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의 손에 단검 하나가 더 들린 것도 발견했다.
“흐으……. 흐억……. 사…… 살려 줘……!!”
손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당연하게도 에시카를 붙잡거나, 같이 도망치자고 하거나, 이런 모습은 없었다.
그가 떠난 바닥에는 떨어진 검붉은 핏방울들만 흔적이 되어 남아 있었다.
에시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는 그와 마주 보았다.
바람을 타고 시원한 향기가 코끝에 흘러들었다.
로브 아래 짙은 눈빛에 어쩐지 마음이 철렁했다.
로브의 모자를 내리자 레스반의 서늘한 눈매와 높은 콧대가 드러났다.
“…….”
그는 전과 같은 딱딱하고 태연한 안색이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헤아리기 힘든 남자.
레스반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에시카는 목에 따끔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스반은 그저 에시카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
그날, 에시카는 레스반의 마음을 거절했었다.
레스반은 그녀에게 마음을 요구했으나 에시카는 화답해 줄 수 없었다.
에시카는 단 한 번도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녀는 앞으로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하지만 그를 보면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대는 것일까.
“……저자가 손댄 곳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에시카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레스반은 묻고 있었다. 관심과 걱정이, 짙은 눈빛 속에 살짝 묻어났다.
정말 소중한 것의 안부를 묻는 듯 말이다.
잠시 후 에시카가 입술을 달싹였다.
“……없어요.”
잠깐의 정적 후 레스반이 눈썹을 찡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손댄 곳이 있으면, 똑같이 그 부위를 베어 내 주려고 했어.”
분명 빈말은 아닐 것이다.
그가 에시카에게 손을 뻗으려 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비수로 가벤의 손을 꿰뚫었으니 말이다.
에시카의 입술에 옅고 씁쓸한 미소가 고였다가 사라졌다.
그를 향해 생기는 마음은 이전 생에서 황제에 대한 마음, 혹은 기억을 찾기 전 칼리안에 대한 마음과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망설임 없이 마음을 표현했으나 레스반에게는 조금의 표현조차 수 배로 어렵다.
가슴이 벅차게 뛰면서도 뼈 속에서 밀려드는 듯한 오묘한 죄의식.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고마워요.”
레스반은 에시카의 인사를 받지 않은 채,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더 할 말이 남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