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84)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84. 불가항력(84/192)
#84. 불가항력
2024.02.22.
끼익-
창고의 문이 열렸다.
덫에 걸린 쥐처럼 레스반을 따라 이 창고에 들어와 버린 소녀는 레스반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들의 뒤에는 사병이 여럿 있었다.
일부러 침략국의 문장이 새겨진 검은 옷을 입혀 놓았지만, 뻔히 알 수 있었다.
뒤탈 없이 죽이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한 작품이라는 것을.
“잠깐 새 친구까지 만든 모양이군.”
“노예로 팔아먹기에도 반반한 계집애인데, 어쩌다 못 볼 꼴을 봐서는…… 쯧…….”
킬킬대는 조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레스반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열 살 소년이 가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차갑고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들은 칼을 뽑았다.
족쇄에 묶여 있는 열 살 소년을 죽이는 것은 칼로 두부를 써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널 보내고, 친구도 뒤이어 보내 주지. 이 꽉 물거라.”
날카로운 검날이 바로 시선의 맞은편에 있었다.
레스반은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악귀들의 모습을 끝까지 기억해 두고, 진짜 지옥에 가서도 저들의 파멸을 위해 기도하리라.
구역질이 나는 더러운 배신자들, 최소한의 기개도 없는 비겁한 인간들.
“…….”
그러나 마지막 순간은 오지 않았고 레스반의 생각은 끊기지 않았다.
다가오던 검날이 중간에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멈춘 검날이 뚝, 하고 반으로 갈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스반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의 삶은 이곳에서도 참으로 무겁군요.”
들었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작은 발걸음은 일순간 태산 같은 존재감을 발한다.
은발의 뒤통수가 보인다. 머리끈은 언제 풀어졌는지 은발이 휘날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에서 그 작은 뒷모습에 푸른 기운이 가득 맺혀 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내 죄업을 빼앗았기 때문이겠죠. 덕분에 내 삶은 평온하며 찬란한데도.”
그러나 또렷한 음성은 그 착각을 일깨운다.
레스반은 굳은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작은 체구 안에 엄청난 것이 있다.
저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음성이지만 어조와 느낌 그 어느 것도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제기랄! 뭐야!”
“……어 ……어? 뭐야, 너…….”
검을 든 자들이 검을 휘둘렀으나 검은 막혀 나아가지 않았다.
레스반은 신을 믿지 않았다. 제국이 다 짓밟히도록 방관하는 자가 무슨 신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순간, 어쩌면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관자가 변덕을 부렸다거나.
“크헉-!”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검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횡을 긋는다.
이 영역은 더 이상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어쩌면 요사스러운 마법을 부리는 마녀처럼, 소녀는 손을 뻗고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검을 제 생각대로 다루었다.
‘너는…….’
소드 마스터, 그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세상 모든 것을 검으로 쓸 수 있다고 한다.
궁극의 힘, 생동감 있게 살아 숨쉬는 검을 보며 레스반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크허억…….”
“억……!”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레스반의 피만 흩뿌려질 창고 안은 사내들의 피로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모든 이들이 쓰러지고 검들은 일제히 바닥에 꽂혔다.
마치 묘비처럼.
이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소녀의 옷자락에 피 한 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은 아까의 순진무구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별개의 사람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쓸쓸하다. 그 눈빛에서 레스반은 오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제가 책임질게요.”
“……당신은 ……누구야.”
소녀의 손짓 한 번에 족쇄가 종이장처럼 잘려 나갔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레스반은 물었다.
눈앞의 아이가 보통의 소녀일 리가 없다.
“뼛속에 증오만이 남은 무의의 방랑자. 영령.”
나직한 목소리는 평온하게 들린다.
소녀의 푸른 눈에 우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기억하지 마세요. 기억해도 좋을 거 없는 여자였으니까.”
하얗고 가녀린 손을 공중을 향해 부드럽게 뻗으며 소녀가 말했다.
“죄는 오롯이 내 것이었는데.”
소녀의 손을 따라 공중에 푸른빛을 띠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제국에서 사용하는 글자와는 달랐다.
“제발, 이제부터는 행복해요. 독영 오라버니.”
그 말에 레스반은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말을 이었다.
“적의와 악으로 찬 내 삶 속 유일한 햇살.”
소녀가 레스반을 돌아보았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에시카, 에시카!”
에시카는 레스반의 외침에 눈을 떴다.
혼절했던 듯 그가 자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독영 오라버니였어.’
천마신교의 영령이었을 적 가족처럼 함께 지낸 남자가 있었다.
아버지의 후계자였던 독영.
아마도 레스반의 전생은 그 남자.
웃는 느낌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레스반이 어릴 적 하세츠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어린 에시카의 몸에 있던 영령의 자아가 깨어나 그를 구했었던 것이 사라진 기억의 내용이었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던 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에시카의 턱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
“혼자 잘 살라는 뜻이었는데.”
레스반은 굳은 얼굴로 에시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야 기억하는군. 하세츠에서의 일.”
“…….”
에시카는 레스반의 넓은 어깨에 기댄 채 눈물이 찬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 전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에시카가 여덟 살 때의 일에 대해 명확히 떠오르는 것은…… 타오르듯 애달픈 그 마음뿐이었다.
에시카는 독영의 환생인 레스반을 구했지만, 그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었다.
마치 자신의 벌을 자처해서 대신 받는 남자를 보는 것처럼…… 책임지겠다는 말은 그 벌을 다시 가져가겠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모든 것은 전생의 죽음이 기억날 때, 뚜렷해지겠지.’
칼리안은 전생에 에시카가 사랑했으나 그녀를 배신했던 황제의 환생이었고,
에시카 자신은 천하독존악녀 천영령의 환생이었으며,
레스반은 그녀가 하나뿐인, 믿을 만한 남자였던 독영의 환생이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에시카뿐이지만, 모두가 이곳에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모두가 죽게 된 마지막 상황이 기억난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야.”
옅은 미소를 띠고 레스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 그대의 진의가 뭐였던간에 나 좋을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
“그대의 거절은 잘 들었고, 그대의 계획도 존중한다. 하지만…….”
독영이 어떤 남자였더라.
그는 묵묵한 성격에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녀가 떠나겠다고 할 때 만류했었고, 고집을 꺾지 않자 응원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영령……. 나는 너를…….”
레스반의 금안을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절절한 후회의 목소리, 머뭇거리지 않는 결단의 목소리.
레스반이 말을 이었다.
“그대의 거절은, 내가 거절하도록 할게.”
레스반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서늘하게 빛나는 레스반의 눈빛과 목소리는 거침없었다.
“내가 그대를 원하는 것은.”
잔잔하고 나직한 고백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든다.
“불가항력이야, 에시카.”
두근, 두근, 얄궂게도 심장이 뛴다.
나는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가 문득 에시카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움찔 눈 주변을 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장이 간질거리며 뜨거워진다.
**
“……대부인?”
“…….”
감옥의 창살이 열리고 리오나가 한방으로 들어오자 유리의 얼굴이 굳었다.
리오나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유리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고 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유리는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대부인에게 갔다.
지금까지도 믿지 않고 있었다.
클라우스의 투자가 실패해서 가문이 망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대부인이 여기에 왜 오신 거예요?”
“흥.”
리오나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니…… 여기에 왜 오신 거냐고요!!”
유리의 흰자위에 붉은 핏줄이 짙어졌다.
저를 추궁하는 듯한 유리의 외침에 리오나가 사나운 표정으로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너 감히 누구 앞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정말…… 정말 클라우스의 재산을 다 날리신 거예요?”
유리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아니죠?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유리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리오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리오나는 신경질을 내며 유리에게 말했다.
“클라우스의 재산이 어떻게 되건 네년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 말에 눈썹을 굳힌 유리가 버럭 화를 냈다.
“왜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배 속의 이 아이가 공작의 아들인데! 클라우스의 재산은 우리 아이의 재산이라고요!!”
“하!”
리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네년이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허튼 꿈을 꾸고 있었구나. 천한 핏줄이 좋은 씨를 받아 봤자 반쯤은 천한 것이 섞였는데 어떻게 클라우스의 기둥이 된다는 말이야?”
“…….”
“칼리안의 후계는 당연히 고위 귀족의 여식에게서 얻는 것이다. 네가 애를 낳아 보았자 서자라는 말이야. 나중에 이혼을 시키고 쉽게 쫓아내려고 에시카 그년도 일부러 칼리안과의 사이를 갈라 놓았는데, 내 눈에 너 따위가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오만하게 이어지는 독설에 그녀를 노려보던 유리는 입을 열었다.
“천한 핏줄은 대부인도 마찬가지시잖아요.”
유리의 말에 리오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