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89)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89. 지켜본다는 것과 빼앗긴다는 것(89/192)
#89. 지켜본다는 것과 빼앗긴다는 것
2024.02.27.
“만년 한철과 같은 강도이군, 미스릴인가.”
손목에 내력을 실어 보아도 사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전의 내공을 되찾았다면 그자들에게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렇게 묶여 있지도 않을 것이다.
예민해진 기분에 에시카는 눈썹 끝을 올린 채 몸의 기를 순환시켰다.
다행히 단전에 손상이 가지는 않았고 내공도 이전의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인다.
묶여 있는 손목만 좀 풀린다면 탈출할 수도 있을 텐데, 생각할 때였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보폭이 좁고 가벼운, 여자의 발소리이다.
“…….”
점차 가까워진 그 발소리는 에시카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가 앞에 멈추는 순간 독특한 향이 코 끝에 흘러들어왔다.
꽃 중에 이러한 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유일무이하고 더없이 신성하신 분, 당신께 기도 드립니다.”
에시카는 귀를 쫑긋했다.
눈앞의 여자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신병에 걸린 듯 들뜬 목소리로 그녀는 뭔가를 읊어 댔다.
“악마의 배를 찢고 나온 뿔 달린 더러운 것들이 있사오니…… 여덟 번째 날…… 사사하오니…….”
드문드문 들리는 익숙한 단어들은 경전의 구결 같기도 하고,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단 하나의 제자만을 위한 묵시록으로 저를 구원하여 오로지 당신의 뜻을 성취하게 하심이…….”
타메론이라면 국교의 유일신인데, 성서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던가?
브리기트에 있을 때도 몇 번 신전을 가 보았지만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뭔가 달랐다.
“……마녀의 피로써 당신께 진실된 속죄를 바칩니다.”
잠시 후 이상한 기도를 끝낸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날이 바람에 닿는 철향은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에시카를 찌르려 할 때였다.
“침입자가 있습니다!”
뒤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경계선을 돌파하여 여기까지 오고 있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이를 으득 가는 것 같았다.
“핏빛의 악마가 나를 방해하는군. 악마의 하수인들끼리 돕는 거야.”
침입자의 정체를 예상한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마녀를 살려 둘 수는 없어.”
그리고 두 손으로 단검 자루를 잡고 그것을 에시카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모든 것은 타메론의 뜻대로!”
“윽!”
에시카가 몸을 들썩이는 것을 본 여자는, 남자들과 함께 다른 쪽 통로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죽음을 확인하고 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에시카의 가슴 부근 옷이 둥글게 번지는 피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겨우 되찾았던 의식이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정신을 놓기 직전, 누군가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
눈이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익숙한 기척은 에시카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에시카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머리가 뜨겁고 숨이 차올라 왔다.
열이 달뜬 채 에시카는 눈을 떴다. 누워 있는 자신의 눈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의 눈동자. 레스반 데온 루세인…… 황태자였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허름한 여관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전하…….”
“……말하지 마, 부상이 심하니까.”
레스반의 나직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에시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에시카는 일렁이는 눈으로 레스반을 바라보았다.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뻐근한 가슴에 붕대가 매어져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가 여기 있는지…….
당신이 나를 구한 것인지.
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사실을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들임에도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왜일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저는.”
부상 때문인지 어린애가 되어 버린 것처럼 마냥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라, 에시카는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를 냉정히 거절했던 것은 자신이다.
괜한 이야기는 가당치 않아.
레스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심장을 비켜 갔더군.”
그의 눈썹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에시카는 그녀가 심장을 찌르기 전 몸을 살짝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의 옆 부분을 찌르도록 말이다.
큰 혈관이 지나가는 부위라 출혈은 많았겠지만 빨리 구조되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황의가 올 거야.”
방 안은 어둑했고, 아직 새벽인 것 같았다.
“……추워요.”
에시카는 마른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상의는 벗겨져 있었고, 가슴에 붕대가 칭칭 매어져 있었다.
아마도 레스반이 지혈과 응급 처치를 했을 것이다.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발끝이 시려웠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도 죽을 때가 되면 살가죽과 피로 만든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
레스반은 제 제복의 재킷을 벗었다.
에시카의 몸에 이불이 덮여 있기는 하지만, 이런 오지의 여관 비품이 좋은 것일 리가 없다.
많은 황궁 재단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의 옷이 에시카의 가슴을 덮은 얇은 이불 위에 다시 덮였다.
제복 상의를 벗자 흰 셔츠만을 입은 그의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레스반을 바라보다가 에시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단전을 통해 기를 조금씩 순환해 혈액의 손실을 막고 몸의 회복을 가속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황의의 치료가 필요할 것이고, 이것은 버티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
레스반은 짙은 눈으로 에시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운 미간 사이가 고통스러운 듯 옅게 접혀 있었다.
볼에는 핏기가 없고 입술은 말라 있다.
레스반의 가슴속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늘 차가운 이성으로 자제하고 있다가 전쟁에서나 활개를 펴던 살의, 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해 가져왔던 생각의 파편.
이 상황을 만든 그것들에 대한 지독한 분노.
“……!”
단전의 기를 순환하던 에시카는 문득 움찔 놀라 눈을 떴다.
레스반이 제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 그의 선명한 금안이 보였다.
레스반은 그녀를 응시하며 에시카의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에시카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잠시 뒤 레스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대가 하는 일이 무엇이건 그대가 선택한 것이라면 용인할 생각이 있었어.”
“…….”
“하지만 지켜본다는 것과 빼앗긴다는 것은 달라. 나는 후자를 용납할 수는 없거든.”
뻐근한 가슴 부근이 찌릿찌릿했다.
침으로 쿡, 쿡,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독수리는 새장에서 행복해질 수 없어. 네가 선택한 행복이라 용인한 것이지만, 내가 그자라면 너를 그 안에 가두어 두지 않을 테다.”
레스반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영령이었던 삶에서, 독영의 눈빛은 늘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말을 뱉지 않았다. 왜 몰랐을까, 그 또한 그의 배려이며, 혹은…… 전하지 못했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에시카.”
그 목소리에는 짙은 살기가 섞여 있었고 등골이 오싹할 만큼 농밀했다.
“클라우스가 산산이 부서졌듯 그대를 손대는 모든 것들이 성치 않을 거야.”
레스반의 목소리에 에시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뻐근했던 가슴이 욱신거렸다.
남자를 믿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다시 태어나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되뇌며 죽었다.
그러나 세상에 꼭 믿지 못할 사내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믿을 만한 사내가, 하나는 있을지도.
두근-
“…….”
에시카는 레스반에게 팔을 뻗어 그의 목 뒤를 감았다.
일렁이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한 레스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에시카가 팔에 힘을 주며 레스반의 얼굴을 당겨 왔다.
숨이 맞닿을 만한 거리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레스반의 눈동자가 짙게 격랑했다.
늘 저를 경계하면서 거리를 두었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훅 다가온 마른 입술은, 때에 맞지 않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녀가 아프지 않았다면 생각할 새도 없이 집어삼켰겠지.
에시카는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응시하였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제 마음을 억누르고 멀리서 지켜 주던 한 남자.
애써 그의 마음을 모른 척했었다.
“하늘도, 세상도, 전부 노을처럼 불타오르고 있었어.”
누군가에 그를 겹쳐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 맞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영령이었지만, 지금은 에시카인 것처럼.
어쩌면 이것은 원한을 갚기 위해서가 아닌, 과오를 되돌리기 위한 운명의 시혜일지도 모른다.
“……에시…….”
레스반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간 순간, 탁 하고 손의 힘이 풀리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레스반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는 에시카의 목 뒤에 손을 넣어 그녀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완전히 기절한 듯 속눈썹이 눈밑에 자잘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피를 많이 흘렸으니,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절할 만도 하다.
“…….”
레스반은 닿을 듯 말 듯 그녀의 입술 가까이 제 입술을 대었다.
여린 숨결이 느껴진다. 이마저 피어오르는 꽃처럼 향기롭고 감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