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95)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95. 청혼(95/192)
#95. 청혼
2024.03.04.
에시카는 앞서서 걸으며 말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더라도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나 봐요.”
“…….”
“제가 그렇듯.”
레스반은 알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황후를 정식으로 마주 본 후 그녀는 감흥이 컸다.
전생의 그 여자가 몰살한 천마신교의 수많은 마교도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자신을 주인으로 따랐던 셀라, 그 가여운 것의 피 묻은 손톱들.
황후의 칼날은 에시카의 심장 바로 옆을 꿰뚫었다.
악연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몇 걸음 걷다가 돌아선 에시카는 레스반에게 말했다.
“저는 제 손으로 꼭 그 여자를 파멸시킬 거예요.”
바람이 살랑거리며 에시카의 머리를 간지럽혔다.
잠시 후 레스반이 입을 열었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거야. 리오나 클라우스와는 다른 여자이니.”
황후는 광신자였다. 타메론의 뜻이라며 해괴망측한 짓들을 해왔고, 황제는 이를 알고도 묵인했다.
아니, 묵인보다는 무관심에 가깝다.
“폐하께서 그대를 허락하셨다고 그대의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황금안이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에시카는 레스반을 바라보았다.
허락…… 아까의 뜻을 시험이라 비꼬아 볼 필요는 없는 듯했다.
그 경황이 어찌되었든 황제는 에시카가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니 말이다.
“폐하께서는 늘 저울로 무게를 재고 있지.”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우는 후계는 오로지 레스반 데온 루세인, 황태자뿐었다.
그렇다고 레스반에게 모든 권력을 쏟아 주지는 않았다.
황제는 무엇보다도 균형을 중요시했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에서부터 찾아든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어려운 모험이 되겠군요.”
“그러니 잘 벼린 칼이 필요하다.”
레스반의 말에 에시카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레스반의 태도에는 언제나 타고난 자신감과 위압감이 공존한다.
“쉽지 않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원래 그런 거야.”
에시카는 입을 열었지만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낸 것은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였다.
“전하께서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황후는 한낱 공작과는 달랐다. 그녀와의 권력 싸움을 위한 검이 된다는 것은, 황태자인 그에게도 막중한 부담이 될 것이다.
“내가 후회할 사람으로 보여?”
그의 눈빛은 어두웠지만 안정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아니요.”
후회라, 레스반처럼 그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또 있을까.
“그대는 그저…….”
레스반이 손을 들어 에시카의 턱을 부드럽게 올렸다.
“나를 그대의 검으로 이용하고.”
그의 금안은 에시카의 입술을 담고 있었다.
“그 대가로 그대를 내게 주면 돼.”
툭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가 유독 야릇해 보였다.
에시카는 괜히 갈증이 나는 것처럼 느꼈다.
“에시카.”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든다.
자신을 보고 있는 레스반의 눈은 깊었다.
눈썹과 인상은 딱딱했지만, 그녀의 답을 듣고 싶다는 갈구가 담겨 있었다.
그런 낯빛으로 에시카를 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후 에시카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하죠. 제가 황태자 전하를 선택하는 이유는…….”
복수에 눈이 먼 상황이라고 해도 썩은 밧줄은 잡지 않는다.
그 정도의 분별이 없다면 눈을 가리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황태자 전하를 믿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외면하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불길이 번지는 방향은 분명했다.
“…….”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아군에게 내밀 수 있는 답은 ‘신뢰’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원하고, 자신은 그가 필요하니.
레스반의 시선이 짙었다.
그녀의 눈에서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 그는 에시카를 응시했다.
에시카가 이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이것은 마음에 대한 영역은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에 대한 이유일 뿐.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또…….”
그녀의 입술이 유독 딱딱해 보였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까 겁이 나요.”
겁이라, 솔직한 표현이지만 에시카는 몰라도 영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비극적 삶을 한 번 되풀이한 에시카는, 순수한 마음으로 불구덩이인지도 모르고 사랑에 뛰어들었던 영령과는 달랐다.
칼리안 같은 똥마차를 사랑했던 일전의 에시카와도 달랐고.
경험은 조심성을 만들고 발걸음은 점차 머뭇거린다.
눈앞의 길이 옳은 길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레스반은 조용히 손을 뻗어 에시카의 볼을 감쌌다.
에시카는 레스반을 바라보았다.
한때 다시는 사랑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배신감과 상처를 안고 죽는 경험을 끔찍했으니까.
“나는 절대 그대를 아프게 하지 않아.”
레스반의 금안은 굳건했다.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던 그 독영처럼.
“마음 같아서는 꽃을 꺾듯 지금 당장 그대를 내 침실로 데려가 관을 씌우고 싶지만.”
레스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언젠가 그리하리라 생각했지만…….”
에시카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대를 알게 될수록 생각하게 되더군. 흰나비는 내 손아귀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
“독수리는 새장에서 행복할 수 없어.”
레스반은 분명 독영보다 강하고 대가 강했다.
하지만 비슷한 면도 많았다.
전쟁터에서는 가차없이 검을 휘두르지만, 제 앞에서만은 일방적이지 않은 남자.
“한때 그대의 반응이 영 시원찮을 때.”
레스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의 그림자 같은 애인으로 만족할 생각도 있었지만.”
에시카는 레스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림자 같은 애인이라, 확실히 레스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포지션이다.
“나는 내 것을 빼앗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그대를 죽이겠다는 여자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볼 만큼 도량이 넓지도 않고.”
레스반의 엄지가 에시카의 입술을 살짝 짓눌렀다.
“그러니 그대를 황태자비로 들여야겠어.”
도톰한 아랫입술에 그의 감촉이 괜히 야릇하게 느껴진다.
“그대는 이 검의 주인이다.”
짙은 금안으로 에시카를 바라보며 레스반이 말했다.
그녀가 지난 생까지 합쳐서 두 번이나 실패한…… 결혼.
그러나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짙은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대는 나를 휘두를 자격이 있어. 또한…… 나는 그대에게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게 하지 않을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에시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확신을 주고 있었다.
그 말에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은 레스반을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에시카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는 입술을 가리고 있는 그의 묵직한 엄지가 없음에도.
“내 눈을 봐.”
레스반의 말에 에시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레스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와 결혼해 줘. 에시카.”
그것은 레스반 데온 루세인이 누군가에게 한 최초의 청혼이었다.
에시카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온전한 아군. 그녀가 결혼 생활에서 가져 본 것이 없는 것이다.
남편은 여러 이해 관계에 얽혀 있다.
중원의 황제가 그러했고, 칼리안도 그러했다.
배우자의 고통보다는 법도와 절차가 위에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억울하다 읍소하는 그녀에게 오히려 혀를 끌끌 찬다.
잡힌 물고기는 그리 대해도 되는 존재이니까.
에시카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었다.
가슴이 벅차게 뛰고 있었다.
잠시 후 에시카는 레스반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 손을 잡은 레스반과 눈을 맞추었다.
“그거면…… 됐어요.”
“…….”
“당신의 여자가 되겠다는 말은 진부하고.”
둘 중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관계의 진전은 정해져 있었다.
제 옆을 평생 비워 놓는 한이 있더라도 레스반은 절대 에시카를 놓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짝이 정해진 조각이었으며,
시행 착오를 통해 이제야 서로의 눈을 보게 된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저 가슴이 뛰고 있었다.
“제 남자가 되어 주세요. 황태자 전하.”
단지 레스반은 그녀를 제 무릎에 앉히되 바닥에 꿇어앉히지 않을 남자였다.
피식, 레스반의 입꼬리 끝이 옅게 올라갔다.
언제나 아찔한 위압감을 주던 남자가 오늘은 잘 길들여진 맹수 같았다.
레스반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그대는 나와 같이 잠에 들게 될 것이고.”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었다.
어두운 안광을 발하는 금안은 아찔한 기분을 들게 한다.
“내 옆에서 잠에서 깨게 될 거야. 그리고 그대의 적은…….”
“…….”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계약의 성사였다.
이내 레스반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살짝 비틀어 에시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에시카의 입술에 뭉개지고, 뜨거운 숨이 벌어진 안으로 침입한다.
휘감는 듯한 살덩이가 그녀의 호흡을 빨아들였다.
머릿속은 문득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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