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Reborn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96)
악녀의 시집살이는 즐겁다 96. 예법 강습(96/192)
#96. 예법 강습
2024.03.05.
오 년 전. 적지 에우니브스.
말 못 할 사정으로 인해 검은 로브를 쓴 채 적지에 숨어들어 있던 황후, 마리엘라 루세인은 흠칫했다.
갑옷을 입고 전진하는 병사들이 웅성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 흙바람을 일으키며 말이 달리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은 분명 튜레시안의 깃발.
병사들은, 어떤 미친놈이 맨몸으로 싸우러 왔냐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가 던진 깃발의 날카로운 끝에 한 병사의 배가 관통되고, 이내 뽑아 드는 검을 본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튜레시안 황가의 검. 그렇다면 눈앞의 남자는…….
“전쟁광 레스반 황태자이다!”
절망 어린 적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드 마스터, 검 한 자루로 바위를 종잇장처럼 벨 수 있는……. 인간 같지 않은 경지에 오른 자.
레스반이 탄 말은 이곳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적병들의 긴장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방어하라!”
뒤늦게 적장 하나가 외쳤고, 적병들이 대형을 구축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레스반의 금안이 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크어억……!”
황후 마리엘라는 레스반을 바라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레스반은 오늘 또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다.
아득한 전공을 세워 더 높이 올라가려 하겠지.
그는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았지만 맞서려는 자에게는 자비를 두지 않았다.
격전지에는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의 선연한 황금안은 용암으로 들끓는 것 같았다.
먼 뒤쪽으로 흙먼지와 함께 레스반의 기병들이 보였다.
번개 후 따라오는 천둥 소리처럼, 이 모든 일을 마무리할 하이에나들도 몰려오고 있다.
“타메론이시여…….”
여자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의 성지를 파괴하는 악마. 전쟁밖에 모르는 타락한 인간…… 그를 벌하시옵고…….”
그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건을 찾았습니다.”
로브를 쓴 작은 체구의 남자가 무언가를 여자에게 건네었다.
그것은 에메랄드 빛의 어떤 가루가 잔뜩 담긴 상자였다.
“아아…… 아름답구나.”
여자는 감격한 눈으로 그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적지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이제 자리를 피하시지요. 황태자 전하께 들키겠습니다.”
작은 체구의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그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
“나는 저 사악한 자의 칼부림으로 파괴될지도 모르는 타메론 님의 보물을 찾으러 왔다. 혹여 황태자가 내게 해를 가한다면 타메론께서 황태자를 가만 두지 않을…….”
“죽어라!!”
그때 뒤에서 검을 든 적병이 여자를 노렸다.
황후가 놀라 몸을 움츠리려는 순간, 적병의 검이 부러졌다.
그리고 적병의 목도 함께 툭 떨어진다.
황후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눈썹 끝은 올라갈 대로 올라갔다.
“…….”
이내 황후의 앞에, 피칠갑을 한 레스반이 말에서 내렸다.
쿵- 하고 그의 발이 땅에 닿으며 흙먼지가 일어난다.
형형한 금안은 대가 약한 사람이 보았다가는 오줌을 지릴 만큼 서늘하고 무서웠다.
레스반은 투구를 벗었다. 피에 젖지 않은 새카만 흑발이 드러난다.
높은 콧대와 조각처럼 깎아지른 턱날.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뵙는군요, 황후 폐하.”
“…….”
“아, 고맙다는 인사는 되었습니다.”
레스반이 발로 적병의 머리를 차자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황후는 이 모든 것을 끔찍하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레스반과 눈을 맞추었다.
누구든 그들의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이 적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가자.”
인사도 없이 휙 돌아서려는데 레스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한 물건은 반납하시죠.”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레스반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피에 젖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결국 황후는 그것을 레스반에게 건네었다.
레스반은 그것을 비스듬히 들어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헤노모스. 환각을 보게 하는 약물인데 이리 순수한 결정체는 처음 보는군요. 이거면 천 명이 복용할 분량은 만들 수 있겠습니다.”
“……헤노모스는…… 신실한 기도를 할 때 타메론께 나아가기 위한 보물일 뿐이오……!”
하지만 황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자는 레스반의 손에서 짓이겨졌다.
“아니요, 그저 잔뜩 취해 현실과는 관계없는 환상을 보며 정신을 어지럽힐 뿐이며.”
황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튜레시안은 국법으로 헤노모스의 복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혈향이 섞여 있었다.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벌레를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에 황후는 꼭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황후는 레스반이 인간이 아닌 악마라고 생각했다.
“십수 년 전 튜레시안이 적들에게 짓밟혔던 원인 중 하나는, 약물에 취해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이죠.”
“…….”
“그러니 마땅히 폐기해야 할 약물을 찾기 위해 적지까지 떠도는 거라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황후는 발끈해서 외쳤다.
“황태자께서 황후인 나를 겁박하는 겁니까.”
“알려 드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뒤돌아선 레스반은 제게 달려드는 병사 둘을 너무도 쉽게 베어 넘겼다.
“내 병사들이 이런 것을 욕심내었더라면 그들의 목을 베었을 테고.”
불타오르는 격전지에, 그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들렸다.
“……다음에는 황후 폐하여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피를 뒤집어쓴 그의 뒷모습은 악마의 현신 같았다.
화가 나기보다는 온몸에 소름이 먼저 돋았다.
황후는 마른 입술을 떼어 중얼거렸다.
“타메론이시여…… 저 저주받을 악마에게…….”
그녀의 눈에 불타는 적지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세요.”
**
“에시카 클라우스가 황태자의 짝으로 적합지 않다는 저의 의견은 여전하나, 폐하께서 이리 강경하시니 그렇다면 만나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황후의 말에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소. 물론 황후의 조카와의 일은 유감이지만, 따지자면 에시카 클라우스의 유책은 아니니…….”
황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윗사람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야지, 어쩌겠소.”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격전지에서 영적 전쟁을 치룬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래, 황후가 말한 일은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오?”
“황족들과 고위 귀족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열 생각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애를 소개시킨다면, 황실에 더욱 잘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아, 그리고 그날 브레이튼의 처가 될 아이도 함께 초대할 생각입니다.”
“아리아 하인즈 말인가.”
“네. 결혼하게 된다면 서로 동서지간이 될 텐데, 이참에 인사시키는 것이 낫겠죠.”
합리적인 이야기였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일은 황후의 뜻대로 진행하시오.”
고개를 끄덕인 황후는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그녀의 눈동자에 악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
“허리는 좀 더 곧게, 어깨는 직각으로.”
나직한 레스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코니에 앉아 화원을 보고 있던 에시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 풀어.”
레스반은 그녀의 뒤로 가서 어깨에 힘을 실으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묘하게 뒤에서 껴안는 듯한 자세이다.
“정말 순수하게…… 가르쳐 주는 거 맞아요?”
황실의 예법은 매우 엄격하며, 작은 것으로도 꼬투리를 잡는다고 한다.
먼저 레스반에게 황실 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사람은 에시카였다.
황후가 티 파티 초대장을 보낸 이상 기본적인 준비는 해야 할 테니까.
그녀는 적진에 들어가면서 아무 준비하지 않을 만큼 허술한 성격이 아니다.
황실 예법을 가르쳐 달라는 에시카의 말에 레스반은 예상했다는 듯한 눈빛과 함께 며칠간 에시카의 저택에 머물겠다고 했다.
그들은 사흘째 함께하는 중이었다.
“……글쎄.”
레스반이 고개를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어 에시카를 보았다.
그의 눈은 짙었고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다시 입술이 달싹인다.
“잘하는 것 같다가도.”
“…….”
“자꾸 손대고 싶어지는군.”
나직한 목소리에 어쩐지 에시카의 볼이 간질거렸다.
에시카는 몸을 살짝 틀어 레스반을 떼어 내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전쟁광 황태자가 맞는 건가.
검을 잡아 단단한 그의 손은, 에시카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면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하겠어.”
“어떤 거요?”
“예법을 배우는 속도가 나보다 빨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령이었던 적에 중원의 황실 예법에 도가 튼 그녀였다.
튜레시안과는 세세한 것들이 달랐지만, 기본적인 몸가짐은 결국 결이 같다.
그러니 사소한 것만 바로잡아 주면 된다.
“제가 원래 재능이 있는 편이라서.”
에시카의 자찬에 레스반의 입꼬리에 미소가 지나갔다.
이렇게 자주 웃어 본 적이 언제였을까.
어릴 적 이후로는 처음일 테다.
레스반은 이곳에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꽤나 편안했다. 어쩌면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가지 않고 자신이 거처를 옮기고 싶을 정도로.
“…….”
그녀가 만든 낙원 속에서, 에시카가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옅은 바람에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오랫동안 꿈속에서 쉬이 얼굴을 보이지 않던 그 여인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무수한 적지에서, 적의 보물들 중에서도 찾지 못한 행복이라는 것을, 레스반은 조금은 가늠할 것 같았다.
“입술에 뭔가 묻었군.”
그가 참지 못하고 또 손을 들어 에시카의 입술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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