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10
10
010화 하룻강아지 그리고 전국연합학력평가 (2)
오전 8시 09분.
낯선 교실에 들어와 교탁이 아닌 책상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주위는 온통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 뿐.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이부터,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이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교실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물론 나는 빼고.
사락-
들고 온 문제지를 넘긴다. 5페이지로 압축해 놓은 9월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다.
깔끔하게 정리된 문제들의 답은 물론 풀이까지 상세하게 적어 놓은, 이 교실에서라면 만금을 부른다 해도 팔지 않을 보물이다.
딩동댕동-
[9월 전국연합학력평가가 8시 40분에 시작됩니다. 아직 입실하지 않은 수험생은 8시 10분까지 해당 고사장에 입실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8시 10분. 입실시간이다.
수능과 똑같은 스케줄로 치러지는 9월 평가원 모의고사의 경우 그 해 수능과 경향이나 난이도가 가장 유사한 시험이기 때문에 이 시험을 잡느냐 못 잡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마련.
더군다나 이 교실에 있는 이들은 한 차례 이상 고배를 마신 재수생들.
대학 입시라는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고자 한 해 이상 칼을 갈아 온 이들이기 때문에 긴장의 정도가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다.
‘열심히 칼을 간다고 다 좋은 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다시 한 해를 견뎌야만 할 것이다. 가시검불에 눕고 쓸개를 씹으면서.
그때.
옆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도 재순가?’
‘연예인 누구 닮은 것 같은데?’
‘어디 학원이지?’
‘이따가 말 걸어볼까?’
두런두런 거리는 것을 보니 이 재수학원을 다니는 이들인 것 같았다.
저들 딴에는 작게 소곤거리는 것이겠지만 고시장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귓가에 쏙쏙 들어왔다.
슥 돌아보니 화들짝 놀라 책상에 고개를 박는다.
‘쯧쯧, 염불보다 잿밥이라니…’
본새를 보아하니 저들은 이번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워 보였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문제 풀 준비를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그들은 잡담으로 낭비하고 있었으니까.
9월 모의고사의 응시자수는 약 50만 명.
그중 고3이 40만 명 정도를 차지하니 대충 짐작해 봐도 10만 명 정도의 재수생과 검정고시생이 이 시간, 이곳과 비슷한 공간에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9월 모의고사를 보지 않는 인원이 10만 명 정도 있다고 가정하면 약 60만 명이 매해 수능이라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이 수능에 대한 감을 유지하기 위해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드륵-
문이 열리고 감독관들이 들어오자 다들 자세를 바로 한다.
이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얼굴들일 테지만, 외부인들이 있기 때문인지 사적인 대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시험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온 감독관들은 결원이 있는 지 살펴본 후 문을 닫았다.
딩동댕동-
8시 25분. 방송이 나오자 감독관들이 시험지를 나눠 준다.
“다들 보면 안 되는 거 아시죠? 8시 40분에 딱 시작해야 하니까. 그 전에 시험지 보시는 분은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대답이 없다. 다들 눈앞에 놓인 시험지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다.
제 눈이 시험지 표지를 꿰뚫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에 반해 나는 마음이 가볍다.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마치 고향에 돌아와 가벼운 산책을 하며, 옛 친구들과 인사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딩동댕동-
8시 40분. 시험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은 바로 국어.
씨익-
표지를 열자마자 입가의 웃음이 짙어진다.
곧바로 문제를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다른 공간에서 시험을 보고 있을 김연서를 생각하면서.
문득.
어제의 일이 다시 떠오른다.
* * *
“얼마면 될까요?”
드라마에 나오면 식상하다고 혀를 찰 만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제 겪어 보니 과연, 있는 집 사모님들의 최종 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를 부르던 나는 다 받아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의미를 가진 말이었으니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가슴 뛸 만한 말이었다.
아마 USB를 얻기 전에 나였다면 당장 수락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어머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네요. 지금으로선 개인과외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얼마를 주신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담담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백만 달러를 써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과외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은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금액 정도로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연아 어머니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왜죠? 지금 학원에서 받으시는 돈보다 더 많이 부르신다 해도 저희는 수락할 생각이 있는데. 우리 연아 대학갈 때까지만 봐주세요.”
연아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내용도 아까 보다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개인 사정이 있어 지금은 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요. 죄송합니다.”
내 말을 들은 연아 어머니는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지금이 안 된다면 나중에는 어떻습니까?”
나와 연아 어머니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연아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라···
생각해 보니 지금 있는 학원에서 USB의 잠금을 어느 정도 해금한 연후에 다른 학원으로 옮길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그 기간 중에 잠깐 봐주는 것 정도는 가능할 듯했다
거기다 아까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 한데다가 계속 거절만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막 긍정적으로 대답하려고 하는 그 순간.
“잘됐네요.”
서늘한 목소리가 대화의 틈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얼굴 가득 적개심을 띄우고 있는 김연서가 있었다.
아까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그녀는 남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계속 나를 노려보았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엄만 왜 그렇게 매달려? 어차피 잘 가르치는 학원이야 널리고 널렸는데, 우리가 뭐 아쉬운 것도 아니고, 이건 너무하잖아. 어차피 안 한다는 사람 우리가 굳이 왜…”
그녀는 나를 쏘아보았다.
“김연서! 선생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말고 얼른 올라가 있어!”
연서의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연서의 아버지가 그녀를 나무랐지만, 그녀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이잖아. 학원 규모도 작았고, 원래 이 분은 고등부도 아니었다고. 시험 몇 번 잘 맞춘 거 때문에? 그런 거는 나도 해. 거기다 지잡 출신이라던데… 그런 사람은 좀….”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학벌(學閥).
평소 거의 말이 없는 김연서가 던지는 것이라선지 엄청나게 날카롭게 날이 갈려 있는 비수였다.
“이 녀석 오냐오냐 했더니 정말 계속 이렇게 버릇없이 굴 거야!? 설마 선생님이 지잡대 출신이시겠니!?”
“······.”
“아무렴 ‘SKY’는 아니더라도 ‘서성한’이나 ‘중경외시’ 정도는 나오셨으니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실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어디 박사 정도는 마치셨을···”
학력(學力).
내 발을 잡아채는 나의 원죄.
수십 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낙인이었다.
연서 아버지가 던진 훈계는 오히려 내게 와 박혔다.
연서는 한번 더 쐐기를 박았다.
“애들도 다 알아요. 학력 좋은 선생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슬쩍 Y다 K다 말하는데,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은 이야기 안 하는 거.”
거의 폭력에 가까운 팩트.
분하지만 전부 사실이다. 그것도 거절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학생들에게 강사 자신이나 타인의 학력 혹은 급여 수준을 말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였지만, 그것들은 사실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학력에 자신감을 가진 이들.
그런 이들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학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면 학생들은 나머지 강사들의 학력을 추궁하듯 캐묻고는, 강사들을 학력에 따라 서열화 시켜 버리고는 한다.
결국 지잡대 출신에게 남는 것은 오욕과 설움뿐.
바로 지금처럼.
김연서의 말을 들은 그녀 부모의 시선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절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그들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서렸다.
“이 녀석이 진짜?! 자꾸 그렇게 버릇없이 나올래? 어서 사과드려!”
“아, 몰라!”
연서는 다시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가 버렸다. 쿵쿵거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밑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이, 이 녀석이 정말!”
연서 아버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푹 숙인다.
“김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큰 애가 제 동생을 정말 끔찍이 아껴서··· 휴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 저희가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러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다. 나는 그를 만류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버님. 동생을 위하는 연서의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무렴 제가 선생인데 그 정도도 이해 못할까요. 저 나이 또래에 아이들이 그러는 거야 저희 같은 어른들이 이해해야죠.”
내 말을 들은 연서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다.
“그렇죠. 녀석이 겉으로 표현은 안 해서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지 동생한테는 정말 각별했거든요. 정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그들이 아이들의 학업에 대해 물으면 내가 대답해 주는 양상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됐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머님 식사 정말 잘 먹고 갑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차린 것도 별로 없었던 걸요 뭐. 다음에 한 번 더 초대할 테니 그때는 또 와 주세요. 그리고··· 아까 저희가 말씀 드린 거, 생각 있으시면 바로 연락주세요.”
그렇게 떠나려는 나를 굳이 정문까지 배웅해 주시려는 연서 부모님.
나는 그들의 배웅을 한사코 마다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웬 시커먼 것이 슥하고 나타났다.
깜짝 놀라 보라보니, 시커먼 인영이 잠시 주춤 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수그린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연서였다.
“선생님···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가끔 흥분하면 좀···”
보아하니 아까 나를 쏘아 붙인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사과를 한 뒤에도 한참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다.
어쩔 줄 모르는 손가락만이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을 뿐.
나는 슬쩍 웃으면서 그녀에게 괜찮다고 어서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 * *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정류장 기둥에 몸을 기댔다. 멀리, 떠오른 달이 구름에 잡아먹히는 것이 보였다.
고요한 밤. 차는 오지 않고, 나는 자연스럽게 아까 전 김연아의 집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과외 제안과 연서의 팩트 폭력, 그리고······. 소불알.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몸속에 가득 차자, 머리가 맑아졌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한계가 명확하니까.’
그렇다. 아무리 기출 문제를 잘 적중하는 강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 우리나라에서 강사로 살아남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부족한 것들. 바로 학력과 경력.
그것들이 내게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마치 날카로운 종이에 베인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
하지만 감각이 마냥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내 손엔 그 통증을 치유할 수 있는 명약 또한 존재했으니까.
나는 내 주머니 속 들어 있는 USB를 만지작거렸다.
손에 닿는 딱딱한 감촉. 그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제대로 한번 보여 주자.’
나는 스스로 다짐하면서 주머니 속의 USB를 손으로 꽉 움켜 쥐었다.
그래 지금의 위치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래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