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14
14
014화 맥아(麥芽)스터디 (1)
벼기더시니 뉘러시잇가
과(過)도 허믈도 천만(千萬) 업소이다.
믈힛 마리신뎌
슬븟븐뎌 아으
니미 나를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
.
“···마지막 부분은 ‘임이 나를 벌써 잊으셨는가. 아아 님이여, 마음을 돌이켜 내 말을 들으시어 나를 다시 사랑해 주소서’ 정도로 해석할 수···”
슥슥슥. 탁.
“감탄사 ‘아소’를 통해 이 노래가 향가의 낙구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과 낙구의 내용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를 통해 화자가 자신의 소망인 임과의 재회와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출. 시상이 완결됨을 확인할 수 있는데···”
.
.
판서를 끝내며, 시강을 마친다.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지만 이 보다 더 길어지면 시강이라는 것의 의미가 퇴색될 뿐이다.
어차피 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학원 관계자들.
이 중 다수가 나보다 경력이 훨씬 많은 이들이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디테일은 따질 이유가 없다.
이들이 보고 싶은 것은 시강을 통한 나의 강의 스킬.
그 자체니까.
지식과 강의는 다르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강의를 잘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 하니까.
결국 시강이라는 것은 내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중개업자들에게 보여 주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외모, 어조, 행동 그리고 순발력 같은 것들을 토대로.
때문에 중개업자들은 시강을 하는 강사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간단한 연극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잘 봤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충신연주지사라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설명 좀 해 주시죠.”
바로 이렇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연다.
“충신연주지사라 함은 앞서 말한 정서의 정과정곡에서 시작된 개념으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평소 강의에도 충실했던지라 이런 돌발 질문에도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대개 충신연주지사의 화자는 여성, 시적대상은 남성으로 상정되는데, 이는 임을 그리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그려질 때 더욱 효과적으로 정서가 표현되기 때문···”
.
.
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말한 것 이외 것들, 예를 들어 충신연주지사가 어떤 식으로 계승되고 어떤 식으로 변용되는지, 또 어떤 시가에서 나타나는지는 이 자리에서 중요하지 않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 한다.
“잘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출근하실 수 있죠?”
아까 질문을 했던 부원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한다.
아무래도 간부들인 것 같은데 아직 두 사람의 소개는 받지 못했다.
“내일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부원장이 곰처럼 느긋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그럼 바로 계약서 쓰시죠. 필요한 서류들은 가지고 오셨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챙겨 왔던 서류를 가져오기 위해 교탁을 내려오는 순간.
남은 두 사람 중 사마귀처럼 생긴 한 명이 다급한 표정을 짓더니 부원장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뭔가 좋지 않은 말인 게 분명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부원장의 얼굴이 화난 곰처럼 일그러졌으니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였다.
뭐지?
“흐음··· 김 선생님 저희 자리를 좀 옮겨서 이야기해 볼까요?”
부원장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에 반해 귓속말을 한 사람의 얼굴은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뭔가가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아직은 알지 못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탁-
뜨거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다. 구수한 보리향이 코끝을 감돈다. 맞은편에 자리한 부원장은 내심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어떠신가요?”
응? 뭘 말하는 거지? 학원?
“차 말입니다. 차. 이거 이래봬도 100% 국내산 햇보리를 직접 볶아 만든 겁니다. 저희 원장님이 제일 자신하시는 거죠.”
아 그래서··· 학원 이름이 맥아(麥芽)스터디······.
황당했지만 앞에 앉은 부원장은 진지하게 칭찬을 바라는 표정이다.
“좋네요. 제가 마셔 본 보리차 중 최고로.”
내 말을 들은 부원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뭔가 뿌듯해하는 듯한 표정.
“그건 그렇고 이거 죄송한 말씀을 좀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차만 마시던 부원장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나 보다.
그가 자세를 바로하고 진중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식계약은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새로 선생님을 모실 때, 관행상 한두 달 정도의 수습 기간을 가져왔거든요.”
“···네?”
“그런데 이번에 믿을 만한 분의 소개도 있었고 선생님 시강도 제가 잘 들어서 바로 계약을 하고는 싶은데, 아무래도 관행은 관행이다 보니까. 반대가 좀 있네요.”
흠, 아까 그 꺼림칙한 느낌이 이거였나?
내가 입을 다물자, 부원장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한다.
“게다가 저희가 원래 고등부는 경력직만 뽑아 왔던 거라서 저 혼자 좋다고 지금껏 해 왔던 것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렇군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딱 한 달만 수습직으로 계시다가 바로 다음 달에 바로 정식으로 계약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때까지 제가 잘 처리해서 잡음이 안 나오게 만들어 놓을 테니.”
부원장의 말이 끝났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곤 잠시 내 표정을 살핀다.
“······.”
잠시 고민해 봤다.
한 달이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내 표정이 애매했는지 부원장이 슬그머니 말을 덧붙인다.
“물론 수습이라고 해도 전 학원에서 받으셨던 급여보다는 더 쳐드릴 겁니다. 거기다 한 달 뒤에 원하시면 비율제로 계약하셔도 무방하고요.”
“······.”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어차피 지금의 내 커리어로는 다른 학원들도 비슷할 테니까.
아직까지 내 경력과 학력으로 학생들을 끌어올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니 어쩌면 이곳보다 더 안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이 학원을 비롯해 다른 학원에서 부리나케 연락이 온 것도 아직까진 내 이름보다 김연아 부모의 이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테니까.
아마 부원장이 생각보다 더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겠지.
하지만 어쩌면 한 달 가량의 수습기간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USB의 포인트도 아직 더 모아야 한다.’
아무래도 고등부 폴더, 그리고 더 나아가 잠겨 있는 다른 수많은 시험지 폴더를 열기 위해서는 경험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역시 현장이 최고다.
‘어쩌면 공무원 시험이나 사법고시 시험지까지 볼 수 있을지 몰라.’
그렇게 된다면 노는 물을 더 크게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뭐, 자세한 것은 끝까지 가 보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 또 하나, 수습기간이 있으면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
아직 정식계약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 말은 곧 그 기간 동안 내가 성과를 낸다면 지금 당장 계약하는 것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그때 계약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 계약한다면 평범 혹은 평범 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조건으로밖에 계약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 지금으로선 부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부원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짓 하나는 정말 시원시원한 양반이었다.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저만 믿으시고 한 달 동안 파이팅 해 주시면 됩니다.”
원장이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파이팅이라······.
그래 좋다 파이팅이다.
어차피 한 달 뒤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테니까.
마주 잡고 흔드는 손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 * *
이튿날.
새로운 학원으로 출근했다.
전 학원에서만 5년을 굴러먹었던 터라 첫 출근의 느낌을 잊어버렸었다. 새삼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른 거리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문.
이제부터 이곳이 내가 일할 교무실이다.
달칵-
문을 연다. 아무리 빨라도 오후 1시에 업무가 시작되는 학원의 특성상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사전에 언질을 받지 않았으면 당황했을 상황.
전날 간단하게 부원장에게 학원 소개를 받은 터라 내 자리를 못 찾아 허둥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며 교무실을 둘러본다.
파티션으로 나눠 놓은 책상들 위로 교재나 수업자료들이 높게 쌓여 있다.
대형복합기와 작은 세절기, 물이 반쯤 찬 냉온수기가 보인다.
그 외 업무에 사용되는 기자재들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전 학원 보다 좋은 환경이다. 제2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제1교무실 보다 더.
그때는 원장의 구박 때문에 에어컨을 켜거나 난방을 하는 것에도 눈치가 보였다.
‘좋다.’
일단 최신 사양의 복합기가 마음에 들었다. 폐업하는 학원에서 싸게 가져온 중고기기나 의심스런 렌탈 업체에서 렌탈 받은 기기는 겉이 깨끗하더라도 방심할 수 없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기기 안쪽 부품들이 마모된 것들이나, 이것저것 짜깁기해서 간신히 돌아가게만 만들어 놓은 것들은 강사의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주요 요인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빔 프로젝터나 컴퓨터도 충분한 수량과 사양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수학이나 영어와 달리 지문 자료를 많이 사용하는 국어교과의 특성상 해당기기들이 망가지면 수업전반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기들을 살피고 있던 그때.
달칵-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회색 가디건을 입은 차분한 인상의 남자와 새빨간 오프 숄더 원피스를 입은 여자. 여러모로 안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문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침에는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
그들은 들어와서도 서로를 노려볼 뿐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
그들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세요?”
가디건을 입은 남자였다. 얼굴 가득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마치 ‘네가 거기서 왜 나와?’라는 표정이었다.
그 사이 여자는 애써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자리로 가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삐끗-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고요한 교무실 안을 가로질렀다.
공교롭게도 내 맞은편 자리. 다행히 파티션이 높아 얼굴이 마주 보이지는 않았다.
마주보면 부담스럽잖아.
나는 가디건은 입은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인사를 한다. 남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내게로 와 악수를 청한다. 약간은 경계심이 깃들어 있는 표정이다.
“아, 반가워요. 그럼 혹시 영어?”
나는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국어과입니다.”
내 말을 들은 남자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
이쪽을 훔쳐보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는 약간 상기된 얼굴을 가리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뭐지? 이상한 사람인데?
한편.
나와 악수를 마친 남자는 나를 향해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야 오랜만에 새로운 분이 들어왔네.”
그리고,
초면에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은,
상상도 못했던 질문이 훅 들어온다.
“대학은 어디 나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