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15
15
015화 맥아(麥芽)스터디 (2)
약간 고민하던 강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어려운 반은 아니에요. 애들이 좀 특이하다는 것만 빼면.”
특이하다는 것만 빼면? 특이한 게 어려운거 아닌가?
인수인계를 하던 국어 강사도 자신이 한 말이 민망했는지 애매한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려 했다.
“다행히 학교가 한 군데라서 진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여기 ‘찬기파랑가’부터 ‘쌍방울레이더스의 첫 번째 팬까페’까지. 원래대로라면 ‘독서와 문법’으로 해야 하는데, 이 학교만 특이하게 ‘문학’ 교과서로 하더라고요.”
범위가 꽤나 넓었다.
비문학 지문을 제외하더라도 고전시가부터 현대소설까지 제법 광범위한 범위였다.
수박겉핥기식 정리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면 작품 별 갈래의 기본 이론, 각 작품의 해설까지 건드려야 했기에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었다.
“애들이 발랄하긴 한데 수업에 대한 의욕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너무 나무라시면 안 될 거예요······.”
은근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그녀. 하지만 강사가 가지기에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대개 학생들과의 기 싸움에서 밀린 강사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까.
기 싸움.
유치해 보이지만 사실 제일 중요한 것들 중 하나다.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오래가듯이 학생들에게도 강사에 대한 첫 인상이 오래가기 마련이니까
물론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강사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초반에 잘 잡았던 분위기가 끝까지 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 초반을 잡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수능이다 뭐다 해서 사방에서 주는 압박감 때문에 저절로 공부하는 기계가 되는 경우는 그나마 쉬운 편이지만. 압박감에 못 이겨 다 포기해 버린 학생들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그들의 경우 초반 기 싸움에 밀리면 그 이후로는 악몽이 펼쳐지곤 했다.
말도 안 듣고, 숙제도 안 해 오고, 저희들끼리 잡담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무신론자도 마음속으로 여러 신들을 찾게 마련이었다.
뭐 신앙심으로 극복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 성질을 못 이겨 학원을 그만 두던가, 아니면 포기하고 그러려니 하면서 시간만 때우던가.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 주는 강사는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수심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이해가 갔다.
“그 밖에 주의할 점 있나요?”
내가 묻자. 그녀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그녀의 얼굴이 어둡게 보일 뿐이었다.
“애들이 가끔 놀자고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만 조심해 주시면 돼요. 절대 풀어 주시면 안 되는 건 아시죠? 한도 끝도 없으니까. 그리고 음······.”
그녀는 뭔가 말 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다.
“말씀해 주시죠.”
내가 재차 묻자. 그녀는 약간 꺼림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자애들 조심하세요. 경력 있으시니까 대충 아시죠? 그 나이 또래 애들 다 비슷하잖아요. 말려들면 큰일 나니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팀장이나 부원장 쌤한테 말씀하시고요.”
그녀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 * *
생각보다 빨리 인수인계를 마칠 수 있었다.
인수인계 전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교무실이 어느새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그때.
짝짝-
“자, 다들 주목해 주세요. 이번에 새로 오신 선생님 소개 좀 하겠습니다. 거기 잡담 좀 그만 하시고. 집중.”
국어팀장이 나서서 교무실 인원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오늘부터 고등부 국어를 맡게 된 김준영 선생님. 자, 선생님 인사 한마디 하시죠.”
팀장의 손짓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국어과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나자 국어팀장이 나서서 한 명, 한 명 소개시켜 주었다.
“인사하세요. 여기는 우리 국어과 왕고참 김 쌤. 그리고 여긴 영어과 박 쌤. 술 잘 드시는 오 쌤”
그렇게 선생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듣다 보니 아까 마주쳤던 두 남녀의 이름도 알 수 있었다.
김원용과 송민지.
첫 대면에서 대뜸 학벌을 물어보던 남자와 새빨간 오프숄더를 입은 여자의 이름이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내 주변이었다.
영어과인 김원용은 내 옆에 국어과인 송민지는 내 앞자리에.
덕분에 그 둘의 이름은 확실하게 외울 수 있었다.
“······.”
그 외에 업무적으로 부딪칠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차차 외워 가면 될 것 같았다.
간부들이나 팀장의 이름이야 빨리 외울수록 좋았지만 어차피 성과는 개인이 내는 것이었으니까.
일반 사무직처럼 인적사항을 강제로 외워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타닥타닥-
그렇게 생각하며 수업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불쑥 눈앞으로 커피 잔을 들이밀었다.
머메이드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별다방으로 일컬어지는 다국적 기업의 커피였다.
누구지?
고개를 돌려보니 오프 숄더를 입은 송민지였다.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두 볼에 약간 남아 있는 홍조가 아까의 그녀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 달싹이는 입술을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계속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보다 못한 내가 말을 걸자. 그녀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까 일은 미안했어요.”
······?
“드세요 커피.”
그리고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내 얼굴로 커피 잔을 들이밀 뿐.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불안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커피를 쥔 손 또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제 자리로 돌아갔다.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위태로워 보였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아까 교무실에 들어왔을 때 인사를 받지 않았던 걸 두고 지금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나야 뭐 그녀가 말하기 전까진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동안 계속 곱씹고 있었던 것 같다.
화려한 옷차림만 봤을 땐 예상하기 힘든 면모였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저런 성격은 학생들한테 잡아먹히기 딱 좋았으니까.
남자 강사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여자 강사들은 학생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순간 끝이었다.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자란 녀석들에게 자기보다 몸집이 작은 여자강사들이란, 만만하고 놀리기 좋은 표적에 불과했으니까.
결국 학원가에서 살아남은 여자 강사들은 둘 중 하나였다.
선천적으로 강렬한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강렬한 성격을 만들어 낸 사람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학원가를 떠나야 했다.
송민지가 애써 도도해 보이려는 하는 것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고집하는 것 또한 이것 때문일 것이다.
강사로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
그 힘겨움을 알기에 나는 그녀를 비웃을 수 없었다.
톡톡-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
돌아보니 김원용이다. 그는 나와 송민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K대 였어요? 송 쌤이랑은 동문? 이거 그래서 말을 안 해 줬구나.”
뭔 이야긴가 했더니··· 이 사람은 지치지도 않나.
“그럼 송 쌤이랑 같은 과죠? 선배? 후배? 아무래도 선배겠죠? 학창시절엔 어땠어요. 송 쌤?”
들어보니 맞은편에 있는 송민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까 보니 그리 사이가 좋아 보이지도 않던데 이상하게 관심이 많다.
슬쩍 돌아보니 파티션 너머로 그녀의 머리가 보였다. 분명 들릴 텐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김원용은 그녀가 있건 없건 신경 안 쓰고 자기 할 말만 내뱉을 기세였지만, 그렇다고 계속 송민지의 이름이 나오게 두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동문 아닙니다. 전 OO대 나왔어요.”
내 말은 들은 김원용은 어울리지 않게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OO대? 그런 학교도 있어요?”
이름만 듣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당연하다. 우리나라에 소재한 대학교의 수는 전문대 138개소를 포함해 총 339개소에 이르니까.
부실대학 정리다 뭐다해서 해마다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진 수백을 넘나든다.
그중 이름을 말했을 때 한 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학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OO시에 있는 곳이죠. 서울이 아니라.”
“아··· 거기?!”
내가 첨언하자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만하면 됐을 것이라 생각하며 컴퓨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김원용은 아직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계속 내 옆에서 김원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동안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포기하지 마시구요.”
“사실 학생들만 잘 가르치면 그만이지 학교 같은 게 뭐 중요한가요?”
“K대 나와서 애들 못 가르치는 것보단, OO대 나와서 애들 케어 잘하는 게 낫지. 안 그래요?”
키보드를 한 글자 누를 때마다 김원용의 목소리 한 음절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성가셔 죽겠네.
가만히 두면 한도 끝도 없이 떠들어댈 기세라 한마디 하려는데.
“어이 김 쌤 오늘 처음 오신 분이랑 벌써 친해졌어?”
아까 국어팀장이 소개시켜 준 사람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러자 김원용이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아니요 형님 이분이 OO대 나오셨다고 해서요. 파이팅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있었죠.”
그 순간. 김원용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북적거리던 소란이 일순 뚝 그쳐버리고, 여러 시선이 나를 찔렀다.
전 학원에 이어 이곳에서까지. 학벌이라는 놈이 나를 귀찮게 만들고 있었다.
* * *
“선생님. 이제 이 반이 선생님이 맡으실 반입니다.”
국어팀장이 교실 앞에 서서 내게 말했다.
인수인계를 해 주던 강사의 얼굴 표정만 봐서는 무슨 마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블라인드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여느 교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조용했다. 일체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정적.
트러블 메이커들이 있는 반이라면 으레 들려왔을 말소리나 웃음소리가 이 반에선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 보시죠.”
팀장의 말이 아니어도 궁금했다. 이 안에는 어떤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가볍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엔···
내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