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159
159
159화 소라게에서 아침을 (2)
사락-
주름진 손가락. 굳은살이 박혀 있는 검지에 종이가 닿는 그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넘어간다.
그러자.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이 축복이다….]새하얀 도화 위에 흩뿌려진 무수한 활자.
백(白)과 흑(黑)이 그려 내는 개개의 세계들이 박연서의 앞에 그 내밀한 속내를 드러냈다.
박연서.
올해로 데뷔 30년 차인 원로 작가.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 하의 인간 존재를 형상화해낸,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라는 건 사실 대외적인 스탠스.
문학계 관계자들에게 박연서는 그저.
‘나이를 먹을수록 독해지는 호랑이 할망구’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평론이 유우니 소금 사막의 그것보다 순도 높은 염분을 함유하고 있음은 물론. 총알 개미보다 더 아픈 강렬한 고통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별점 ★. 이 소설은 작가는 치매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전 소설 ’OO 죽이기‘에서 이 소설과 똑같은 플롯, 똑같은 캐릭터, 똑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별점 ★☆. 나는 이 소설을 우리나라 화생방 훈련에 교보재로 사용하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무색(無色)무미(無味)무취(無臭)하면서도 읽는 사람의 호흡기와 심장, 대뇌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렇기에 그녀에게 평가를 한 번이라도 ’당한‘ 사람들은.
‘에잉, 노인네 나이께나 먹었으면 그냥 좋은 말이나 해 주지, 뭐? 내 소설이 자기 복제에 불과하다고? 허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는 자기는 뭐 그런 적 없어? 카악 퉤이!’
‘박연서 선생! 아니 당신은 얼마나 잘 쓰시기에 내 문체가 무색무미무취라고 하시는 거요! 나도 시기만 잘 타고 났으면 당신보다 더 유명해질 수 있었어!’
박연서의 평가에 학을 떼며 그녀를 지탄했지만. 그녀는 절대 자신의 주관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어찌나 그 고집이 단단하던지.
‘에헤이, 누님. 그러게 좀 성질 좀 죽이고 살아요.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 좀 사부작사부작 부드럽게 하면 어디 좀 좋소? 요즘 애들은 우리 같지 않아서 그러다가 확 들이받는다니까?’
‘받으라 그래! 어디 글 같지도 않은 걸 가져와서 개인의 취향이니 어쩌니. 아니 자기부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글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보이겠다는 거야!’
…과거에 태어났으면 분명 왕에게 목이 잘렸거나 아니면 왕의 목을 잘랐을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독설? 영화계에서는 박병식, 요리계에서는 마르코 램지, 그리고 소설계에서는 박연서지.’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돌고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평가가 근거 없는 독설로만 점철되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혹평했던 작가들 대부분이 이후로도 뚜렷한 성과를 낸 것이 없는 데 반해.
‘별점 ★★★☆. 이 작품은 잘 빚은 백화주(百花酒)다. 평생에 걸쳐 따낸 백 송이의 꽃으로 온갖 정성을 가득 담아 익힌 이 작품은, 그 맑은 빛깔과 흐뭇한 향기가 온 누리를 취하게 할 만하다. 천하일품(天下一品). 이렇게 맛 좋은 술을 맛보게 해 준 작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녀가 호평한 작가들은 대부분은.
[2017년 정상(頂上) 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벗기 어려운 날’] [2018년 대성(大成) 문학상 대상 수상작 ‘자본강점기’] [2019년 미래(未來) 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 ‘내가 거인이었을 때’]후일 실력을 인정받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뭐어? 박연서가 별점을 세 개 반이나 줬다고!’
‘미친! 그런 작품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사 놓는다!’
‘헉, 여윽시! 연서갑의 말이 맞았어! 올해 읽었던 소설 중에 최고야! 짜릿해!’
독자들로서는 박연서의 작품 평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사락-
오늘도 그녀는 원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손에 들린 원고는 ‘정상(頂上) 문학상’에 투고된 원고들 중 하나. 작가를 꿈꾸는 신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열망의 증거였다.
하지만.
“후우….”
원고를 내려놓은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작품이 없어, 작품이.’
오늘만 해도 벌써 10개가 넘는 작품을 검토한 상태였지만 도무지 그녀의 눈에 차는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인 원고에서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벌써 며칠째 비슷한 수준의 작품들만 읽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투고된 원고에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원고 대부분이.
‘어디서 본 듯한 내용.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문체. 빈곤한 사유.’
‘작품(作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못생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박연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올해 작품의 수준이 평년에 비해 지나치게 떨어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건 구성이 너무 허술한데? 캐릭터도 붕 떠 있는 느낌이고.’
‘하, 이 사람 글을 제법 잘 쓰긴 하는데 철학이 부재해.’
‘음 한 10년 전이었으면 먹혔을지도.’
아무리 원고를 꼼꼼하게 살펴봐도 ‘대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작품은 없었다.
‘큰일이네 이제 마감일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때문에 벌써 일주일 째 잠도 줄여 가며 하루에 10~20개 정도의 원고를 검토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내 기준이 너무 높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정상(頂上)문학상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신인상 심사를 설렁설렁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만 보고 좀 쉬어야겠다.’
박연서가 마지막으로 집어 든 원고의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락-
그녀가 겉 페이지를 넘기자 나타난 소설의 첫 문장.
‘비가 오는 날 밤이면 집 앞 장례식장의 불빛이 일그러지고, 잘디잔 자갈이 깔린 주차장으로 차들은 쥐떼처럼 모여들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두근-
박연서는 자신의 심장이 크게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근 3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 손끝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파고드는 떨림. 뛰어난 작품을 찾아냈을 때의 희열.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소름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거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원고를 넘겨 나갔다. 그러자 그동안 자고 있던 것이나 진배없었던 두뇌가 군침을 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설은 현대의 도시인. 파편화된 인간이 큰 사건을 겪은 뒤 겪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흔하다면 흔한 설정이었지만. 짙은 고독이 느껴지는 인물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작품을 평범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시간에는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 사람들의 몸속에는 얼마나 많은 물기가 숨어 있을까…]박연서는 오랜만에 보는 소설다운 소설에 푹 빠져들었다.
[그날,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던 사람도 있었고 가수가 되고 싶다던 사람도 그리고…그저 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도 있었다…(중략)…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그 시각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네들이 흘리던 눈물과 같은 빛의 같은 온도의, 같은 가격의…]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
[…꿈속에서 나는 거인이었다. 하늘에 닿을 듯 커다란 몸을 이끌고 나아간 그날. 나는 사람들의 눈물, 그 짜디짠 호수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소설이 끝났다.
“…하아.”
그간 참고 있던 숨이 터지고.
그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자신의 손에 들린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미쳤네.’
소설을 보기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 모든 불만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강렬했던 쾌락의 잔흔에 그녀는 몸살이 오는 듯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원고를 처음으로 되돌려 작가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피현득.
한 번이라도 봤다면 기억할 만한 이름. 특이하지만 낯선 그 이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사실 신인 문학상에 투고를 해 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녀와 티끌만 한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정상(頂上) 문학상 같은 대형 문학상 같은 경우, 의외로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것은 문단이라는 바닥이 생각보다 더 좁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다들 후배, 동기, 선배님, 선생님, 교수님, 스승님 사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물론 그녀가 직접 문단 내에 세력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가만히 있어도 어느 정도 들려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 그 어디에서도 피현득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설마…진짜 신인이야? 이 정도의 작품을 혼자서 썼다고?’
순간, 그녀는 끓어오르는 갈망에 휩싸였다.
평소라면 작가의 정체는커녕.
‘작가가 이름만 알면 되는 거지 얼굴은 봐서 뭐하게?’
원고 심사 이후 시상식장도 잘 찾지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이 글을 쓴 사람의 모습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곤.
[믿음사. 정상문학상 담당. 이OO]피현득의 정체를 알 만한 사람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예. 선생님 정환입니다.]문학상 담당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정환아, 뭐 하나만 물어보자.”
“그…혹시 피현득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아니?”
그런데?
[…어? 선생님도 그 사람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수화기 너머에서 이상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선생님도?’
그녀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나 말고 또 전화 한 사람이 있었어?”
그러자.
[어휴, 말도 마세요. 윤대영 선생님, 이연화 선생님, 최연수 선생님 그리고 지금 선생님까지 이번에 심사 맡으신 분들이 다 전화하셨다니까요?]담당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들. 다들 그녀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작가들의 이름이었다.
‘흥, 노인네들이 그래도 보는 눈은 좀 있나 보네.’
박연서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그래? 그럼 그 사람들한테 알려줬어?”
[에휴, 알려드리긴요. 저희도 아는 게 있어야 알려드리죠. 피현득이라는 그 사람. 그냥 일반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전화번호랑 주소 이외에 거는 아무것도…….]“혹시 다른 사람들 문하(門下)는 아니고?”
[에이, 절대 아니에요. 저희도 궁금해서 한번 싹 다 뒤져 봤죠. 그런데 이건 뭐 하늘에서 뚝하니 떨어진 사람이더라고요.]“그래?”
[네에. 주소지가 대치동 학원가인 걸 보니 아마 학원 강사 출신인 것 같던데…그거 이외엔 전혀 밝혀진 게 없어요.]순간, 박연서의 가슴 속에서 짙은 열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누구의 문하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학원강사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단 한 번도 든 적 없었던 욕망.
그것은 바로 빛나는 재능을 가진 자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래 이 사람이라면….’
생각을 정리한 박연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환아, 이번에 시상식이 언제라고 그랬지?”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아? 아, 네 선생님 이번달 30일이기는 한데…혹시 이번에 참석하시려고요?]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왜 싫어?”
[아니요. 오시면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런데 매번 번거롭다고 안 오셨었잖아요?]담당자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말을 굴렸다.
그리고 담담히.
“…이번엔 꼭 가지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자신의 열망을 내비췄다.
그런데?
[…어…음…그런데 선생님. 제가 말씀 안 드린 게 있는 데 말이죠.]“뭔데?”
[그게…그…하, 이거 말씀드려도 되나 모르겠네요.]“노인네 숨 넘어 가는 거 보고 싶어? 빨리 말해 봐.”
[그…다른 분들도 다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뭐?”
[다른 분들도 다 오신대요. 이번 시상식에…그 피현득 작가 때문에.]순간, 박연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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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인용작품.
한수산. 타인의 얼굴.
권여선. 사랑을 믿다.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