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19
19
019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4)
“안 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박수한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왜죠?”
안 되는 이유야 많다.
일단 살벌하게 노려보는 김원용의 눈이야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밖에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일단 이 학원에 국어 강사로 들어온 이상 영어라는 과목을 건드리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학생들이야 이해한다고 해도 강사들이나 학부모들이 이해하지 않을 테니, 사방에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면 안 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내 전공이 영어가 아니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USB 덕분에 학생들 성적이야 충분히 올릴 수 있겠지만, 타국의 언어인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완전히 카테고리가 다른 일이었으니까.
아이들의 어학 성적을 초토화시킬 것이 아니라면, 현재로선 시험 이외에 영역에 손대는 것은 무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영어는 다른 선생님들한테 들어.”
하지만 박수한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다.
“아 왜요. 선생님 수업이 저한테 딱인데! 적중률 진짜 대박!”
녀석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김원용이 슬쩍 끼어든다.
“너가 그 동안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쪽지시험 그거 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구만 뭘 적중률까지.”
말을 마친 김원용의 얼굴엔 황당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박수한은 그 말을 듣고도 단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놉. 준영 쌤 수업은 퀄리티가 달라요. 이번에 쌤이 찍어 준 거 거의 다 나왔다니까요? 오히려 안 나온 건 몇 문제 안 돼요!”
박수한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거렸다. 거의 교주를 맞이하는 광신도 수준의 맹목적인 추종이다.
어제 서둘러서 뽑은 자료라 나름 적중률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도 커트라인보다 높았던 모양이다.
나름 실수라면 실수.
박수한의 난리에 김원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몇 점이나 나왔기에 이리 호들갑이야. 한 70점 나왔어?”
애써 웃는 표정으로 말을 거는 김원용. 그는 30점에서 이상 점수를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일반적인 학교의 쪽지시험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아니다.
쪽지시험이란 기껏해야 열두어 문제로 짤막하게 보는 시험이고, 채점도 학생들끼리 서로 돌려가며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박수한이 재학 중인 oo고는 아무래도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이름 높은 자율형 사립고인 만큼 쪽지시험 역시 상당히 체계적이고 난이도가 높다.
매 쪽지시험마다 OMR카드를 이용할 정도니까.
아무리 쪽지시험이 수업시간에 나온 부분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일반적인 경우라면 김원용이 말한 것 이상으로 점수를 올리긴 어려웠다.
박수한처럼 영어 실력이 맨바닥인 사람은 수업 도중 시험에 나올 만한 부분을 체크하는 것조차 힘들어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번 시험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90점 나왔지요. 시험 보기 전에 몇 개는 까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까요.”
박수한의 대답에 김원용의 웃음이 걷힌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박수한을 쳐다보았다.
“뭐 이번에 잘 보긴 했네. 얼마나 가겠냐만은.”
가시 돋친 김원용의 말에 박수한이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녀석도 쌓인 게 제법 많은 듯싶다.
“준영샘이 해 주면 오래갈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내 대답을 촉구하는 얼굴이다.
“아 그러니까 영어도 걍 선생님이 해 주세요.”
숫제 강매하는 투다. 이쯤 되면 내가 해 줄 거라 생각하는 듯, 의심 따윈 없는 어조였다.
하긴 김원용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한 것이니, 제 딴에는 배수진을 친 셈. 저런 억지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안 해.”
이해가 갈 뿐.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들어줄 가치가 없는 부탁이었으니까.
이 학원엔 영어 강사가 김원용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국어강사가 난데없이 영어 과외를 하겠다고 하면 무슨 말들이 오갈지 뻔했다.
이 바닥은 넓은 것 같으면서도 그리 넓지 않았으니까.
위험을 감수할 만큼 아웃풋이 크지 않은 이상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었다.
“진짜로 안 해 주실 거예요? 다른 쌤들은 단어랑 숙어만 미친 듯이 외우라고 한단 말이에요.”
박수한은 이제 자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슬쩍 보니 김원용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박수한의 영어 수업을 주관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박수한이 말한 ‘단어만 미친 듯이 외우라고 하는’사람이 누군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나마 교무실에 사람이 많은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무슨 사단이 나도 진즉에 났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박수한을 멈춰야 한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으니까.
하긴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구성인데 언성까지 점점 높아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길 바라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녀석을 제어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잔말 말고. 안 그럼 국어도 안 해준다?”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내가 안 해 준다고 하면 내일부터 당장 영어와 국어 쪽지시험이 문제일 테니, 저런 표정이 무리도 아니었다.
“대신 쪽지 시험은 도와줄 테니까. 그냥 영어는 다른 선생님한테 들어. 다른 선생님들 수업이 더 ‘체계적’이고 ‘확실’하니까. 나는 야매야.”
내가 다른 시선들을 의식하며 먼저 말을 꺼내자 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차피 녀석의 주목적은 몽둥이를 피하는 것이니까.
“진짜요? 아싸! 그럼 엄마한테 국어만 과외 한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녀석은 자기 할 말만 쭉 내뱉고선, 부리나케 교무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
고개를 슥 돌려보자 미간에 깊은 골이 패인 김원용의 얼굴이 보였다.
* * *
일주일 뒤.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시선이 꽂혀 들었다.
대부분 의문이 담겨 있는 눈빛.
김원용이 내 학력을 커밍아웃을 해 버린 후로 대부분의 강사들과 소 닭 보듯 하고 있었던지라, 이런 관심은 낯설었다.
하지만 뭐 내가 잘못한 게 없는 이상 거리낄 것은 없다.
터벅터벅-
그런데 내 자리로 다가가 수록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 앞에서 서성거리는 일단의 학생들.
처음 보는 학생 두셋이 박수한과 함께 어정거리고 있었다.
“뭐하니?”
내가 다가가며 묻자, 박수한이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같이 있던 학생들은 깜짝 놀린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쌤! 한참 기다렸잖아요!”
녀석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오늘도 녀석의 엉덩이는 무사 안녕한 것 같았다.
“왜?”
내가 말하자 녀석이 시험지를 펴 보인다.
“오늘은 95점 맞았어요. 다 맞을 수 있었는데, 그럼 다음 시험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살 만하다 싶으니 박수한의 허세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얘들은 누구야?”
교복을 보니 박수한과 같은 학교였다.
낯선 얼굴들. 그런데 나를 보는 그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순간 기분이 쎄했다.
“아 저희 학교 애들이에요, 우리 학원 다니긴 하는데 다른 반인 애들. 애들이 쌤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녀석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달갑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로 파악한 모양.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하는 터라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사 된 입장에서 찾아온 학생들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어?”
내가 묻자 녀석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리곤 입을 열려다 말고 김원용을 한번 슥 돌아본다.
그 와중에 김원용은 아무렇지 않은 척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다.
“······.”
인터넷 창에 의미 없는 클릭만 계속하면서.
“영어요.”
녀석이 입가에 손을 대고 말했다. 제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론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박수한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김원용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 보였으니까.
달칵달칵달칵-
내 자리까지 그의 마우스 클릭 소리가 들려왔다.
모니터 위로 쉴 세 없이 떠오르는 인터넷 창들. 왜 네이버만 저렇게 띄워 놓는담?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다.
박수한만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일 뿐.
학생들은 대놓고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하나둘 문제집들을 들이밀었다.
“······.”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강사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니···
하긴 박수한의 성적이 오른 것을 보면 누구라도 궁금해할 만했다.
사실 언어라는 게 그렇게 단시간 안에 느는 것이 아니니만큼 박수한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비법을 묻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내가 가르치지도 않는 학생들을 위해 학원 내의 공공의 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럴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나에게도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좋았다.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영어에 대한 지식은 나보다 다른 영어강사들에게 풍부할 테니까.
물론 기출문제에 관한 한 나를 따를 자가 없겠지만.
나는 학생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옆에 계신 김원용 선생님께 여쭤봐야지.”
천천히 말하면서 손을 들어 김원용을 가리켰다.
그러자 학생들의 시선이 잠깐 김원용을 향하는가 하더니 도로 나를 향했다.
돌아온 그들의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이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김원용의 수업을 들어봤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질색 팔색을 하는 표정이라니.
공허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김원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거 본의 아니게 공개처형을 해 버렸네.
“선생님이 한 번만 봐주시면 안돼요?”
그때 학생들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박수한과 같이 온 학생들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맞아요. 쌤 잠깐만 봐주세요.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
그때.
드르륵-
김원용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 *
수업이 끝나고 난 뒤.
교무실에 남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째깍째깍-
교무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시계의 초침 소리뿐.
발랄하게 떠들던 학생들마저 모두 떠나가 버린 학원은, 놀랄 만큼 적막하다.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귀신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할 정도의 고요.
그때.
끼익-
교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이고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바로 나를 이 학원에 데려온 부원장.
내 면접과 시강을 담당했던 이였다.
약속시간에 늦었기 때문인지 그의 낯빛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습니다. 얼마 안 기다렸어요.”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부원장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다행이네요. 그럼 원장실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수습기간의 마지막 날.
이제 부원장과 정식으로 계약하고 나면 이 학원에서의 진정한 생활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