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21
21
021화 정식 계약 (2)
학원 밑 편의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학원들을 보면, 대부분 그 주변에 일반 상권과는 다른 특이한 생태계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고래상어와 빨판상어가 공존하는 것처럼. 학원 옆에 달라붙어 생존하는 업종들.
기생이라고 하기엔 너무하고 공생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사이.
개중엔 PC방이나 DVD방 멀티방과 같이 학생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독상어들도 있고,
분식점이나 저렴한 밥집들처럼 학생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꿀상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중 단연 최고는,
바로 편의점.
학원 생태계의 꽃이자 꿀 중 최고의 꿀이다.
잘 키운 편의점 하나 코스트코 안 부럽다는 신화가 탄생하는 곳이자, 탈주한 알바생만 세워 놓아도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다는 알바생의 무덤.
이곳에선 아무리 발주를 넉넉하게 해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쉬는 시간이 도래하면 굶주린 이리떼가 바코드 리더기를 박살 낼 기세로 음식의 잔해를 쌓아 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이곳엔 굶주린 아귀 네 마리가 눈을 빛내고 있다.
“쌤 진짜 다 우리 맘대로 골라도 되는 거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요?”
그중 가장 커다란 아귀. 김연아.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청초한 얼굴에 큰 눈망울만 보고 귀엽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아귀일 뿐이다.
녀석이 불길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김연아의 등 뒤. 20군단도 녀석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 분명 점심도 다 먹고 왔을 텐데···
사실 아까 본부장을 놓쳤을 때, 녀석들이 교무실 안으로 쳐들어왔었다.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매달려서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는 녀석들.
교무실의 평화를 위해, 녀석들을 데리고 막 학원 밑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하면 다른 데로 가 드릴 수 있어요.”
“맞아. 여기 앞에 분식점 있던데.”
“떡볶이도 좋아요.”
꺄르르-
막상 편의점 앞에 다다르자 멈춰 서서 복작거리는 녀석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래도 나를 따라온 녀석들을 보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보아하니 녀석들 딴에는 내 지갑을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뭐 약속도 했겠다. 여중생 넷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녀석들이 걱정하는 것도 뭐 학생들 수준에서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들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싸! 하겐다즈 모찌 먹어야지!”
“난 편떡!”
“쌤. 고마워요!”
녀석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딸랑거리는 편의점 벨소리가 들리고, 상품을 정리하던 편의점 아주머니의 고개가 문 쪽을 향한다.
그리고 그 순간. 연아팸을 본 아주머니의 표정이 부처처럼 푸근하게 변했다.
녀석들이 이 학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얼굴을 익혀버린 모양새다.
도대체 얼마나 자주 찾아왔으면 보자마자 저런 표정을 지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들은 이미 편의점 이곳저곳에 흩어져 음식들을 고르고 있었다.
평소에 가격 때문에 먹지 못했던 것들부터, 저런 게 맛이 있을까 싶은 특이한 음식들까지.
[맛있는 곤약 젤리(파우치) 2,800원] [하겐다즈 아즈키 모찌(작은 컵] 4,500원] [깔라만시 에이드 2,000원] [미니언즈 바나나우유(설날 에디션) 1,700원].
.
내가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음식들.
일단 맛은 둘째 치고 포장 자체가 범상치 않은 것들이 많았다.
과자들의 질소포장이야 그렇다 쳐도, 음료수나 우유병에 모자를 씌워 놓은 것이나, 눈코입을 그려놓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저런다고 뭐 맛이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애들의 손길은 참 주관적이다 싶다. 새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건 그렇고 바구니에 다 쌓을 수 없을 정도로 마구 고르는 모습을 보니, 과연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란 상식적인 의문도 든다.
“···몇 시나 됐나?”
수업 시간 전까진 그래도 넉넉한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이야기는 해 놔야 할 것 같았다.
“대신 수업 시간 전까지야. 교실에 들고 들어가는 건 안 되는 거 알지?”
내 말에, 편의점 이곳저곳에서 녀석들의 얼굴이 솟아올랐다.
“네에!”
대답은 우렁차다.
그래도 내 말을 듣고 뜨끔했는지, 고르던 손을 멈추고 계산대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들.
편의점 아주머니가 바코드를 찍기 시작하자, 심장박동기의 소리처럼 주기적인 비프음이 들려왔다.
삑- 삑-
저 소리가 멈추는 순간 내 지갑이 죽어 버릴 것 같다.
그래도 그 와중에 계산대 옆에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기도···
“구만 칠천오백사십 원입니다.”
······.
방금 그 말은 취소.
.
.
계산 이후엔 광란의 식사 타임이었다.
저렇게 먹다가 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모습.
분명 점심을 먹은 지 네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을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십 분 정도. 녀석들에게 올라가자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딸랑딸랑-
편의점 문이 열렸다.
“아! 어서 와요. 안 그래도 좋은 물건이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주머니의 격한 환영.
무슨 온라인 게임 NPC도 아니고··· 일반적인 손님을 대하는 투가 아니다.
궁금해서 돌아보니, 보라색 트랙탑을 입고 있는 여자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잘못하면 후줄근해 보일 수밖에 없는 트랙탑을 마치 화보처럼 소화하고 있는 그녀.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육감적인 몸의 선이 옷 밖으로 베어 나왔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을까?
사장 아주머니와 인사하던 그녀가 대화를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뿔테 안경에 반 넘게 가려지는 작은 얼굴.
차가워 보이지만 그만큼 더 깊어 보이는 눈동자.
그녀는 은솔이었다.
“······.”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황.
그녀에게선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표정이었다.
단정한 모습의 그녀만 봐왔기 때문인지 이런 츄리한 모습은 꽤나 새롭다.
그때 내 옆에서 음식들을 학살하던 녀석들도 은솔을 발견했다.
“어 은솔 쌤! 웬일이에요!”
김연아가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은 은솔의 수업이 없는 날인 듯했다.
그랬으니 지금 이 시간에 저렇게 편한 복장으로 편의점에 들어온 거겠지.
생각해보면 전 학원과 지금 있는 학원의 거리가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은솔이 이 동네에 산다면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런 모습으로 마주칠지 예상은 못했지만.
“······.”
그 와중에 연아팸은 은솔에게 달려가 방방 뛰고 있었다. 그녀는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녀석들의 말들을 하나하나 받아주며, 내 눈을 피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내가 말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
“네······.”
대답하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남자 강사들 사이에서 얼음공주라고 불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일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 근처 사시나 봐요?”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주저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원래 이런 데 잘 안 오는데··· 오늘 친구들이 온다고 해서 와인이랑 치즈를 좀···”
그녀는 내가 묻지 않은 것까지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편의점에서 와인이랑 치즈라니··· 유학파 출신답게 먹는 것도 특이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사장 아주머니가 좋은 게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게 와인이었나 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친구들이 내일 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을 하는 그녀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뭔가 굉장히 초조한 표정. 무언가에 쫓기는 얼굴이었다.
내가 괜찮냐고 물어보려는 그때.
“찾던 게 이거 맞죠? 안 그래도 아가씨 생각나서 내가 챙겨 놨어요.”
바로 옆까지 다가온 아주머니가 우리 둘 사이로 양손을 쑥 들이밀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녀의 양손에 막걸리 두 병이 잡혀 있었다.
거대한 사이즈.
무려 1리터짜리다.
은솔이 얼떨결에 그걸 받아들자. 아주머니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는다.
“사이즈가 넉넉하니까 이번엔 한 이틀은 마실 수 있을 거예요.”
“······.”
“아참 편육도 찾아 왔어야 하는데 잠깐만 기다려봐요! 내가 좋은 거 쟁여놨으니까.”
그리고선 바람처럼 사라진다.
“······.”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변한 은솔의 얼굴만 남기고.
“···음.”
···뭐랄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이미지인지는 알겠다.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내자,
“······!”
은솔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한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도망가 버릴 것 같은 얼굴.
막걸리를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학원은 어때요?”
* * *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자리에 앉는다. 나는 조금 전 은솔과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선생님 나가시고 나서 학원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들어온다고 했던 학생들도 다 없어지고, 그나마 있던 학생들 중 상당수가 연아처럼 학원을 끊었고요.”
“그 와중에 박훈 선생님이 학생들 몇을 데리고 다른 학원으로 옮겨 버려서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안 좋아요.”
“선생님들은 많은데 가르칠 학생이 없으니까. 다들 걱정이 많죠. 나가신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고, 저도···”
.
.
사실 김연아가 왔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학원 사정이 좋았다면 김연아의 부모가 김연아를 지금 학원으로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한 달 만에 이렇게 사정이 안 좋아졌을 줄은 몰랐다.
전 학원이 5년 넘게 이 바닥에서 버티고 있던 학원이니만큼, 그렇게 쉽사리 침몰할 만한 사이즈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박훈이 학생들을 데리고 탈주한 게 심각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한 달 만에 학원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는 별 관계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5년간 머물렀던 곳이기에 은솔을 만난 김에 물어본 것이었지, 내가 나서서 뭔가를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현재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고등부 사회(한국지리)가 해금되었습니다. 현재 포인트 : 20]눈앞 모니터 속에 떠 있는 이 메시지였으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박수한의 쪽지 시험과 연아들의 수업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의 강의를 통해 꾸준하게 포인트를 모을 수 있었다.
거기다 한 달 동안 모은 포인트까지.
전 학원에 있을 때와 비교해 봤을 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과목들의 잠금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학생들이 쪽지시험을 보거나 수업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쭉쭉 올라가는 포인트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이 학원에 온 이유가 충분해 보였다.
달칵달칵-
마우스를 움직여 지금까지 해금시킨 폴더들을 정리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열려 있는 중등 과목을 제외한 다른 고등 과목들.
[고등 국어, 수학, 영어.]거기에 비교적 근래에 열리기 시작한 사회 과목들까지
[고등 사회(한국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동아시아사, 세계사)]아직 열리지 않은 ‘생활과 윤리’, ‘사회문화’, ‘윤리와 사상’, ‘법과 정치’를 제외한 다섯 과목이 내가 가진 무기였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나만의 무기.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