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23
23
023화 초열지옥(焦熱地獄)급 난이도(1)
수능.
대학수학능력시험(大學修學能力恃險).
매해 11월 이 시험이 치러지는 날이면, 대한민국의 아침은 조금 특별해진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늦춰지는 출근 시간.
영어 듣기 평가에 맞춰 일제히 숨을 죽이는 항공기들.
소음을 낼 만한 모든 것들이 일순 정지하고,
그 자리를 수험생들과 수험생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차지한다.
백일 기도로 녹초가 된 할머니.
파리한 안색으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커피를 돌리며 응원하는 후배.
운동장 안으로 뛰어드는 경찰차까지.
모든 것이 이날 하루, 하나의 시험을 위해 나타나는 일들이다.
그렇게 8시 35분.
첫 번째 시험인 언어영역의 시작을 5분 남짓 남겨 놓은 시각.
서울에 소재한 200여 개 소의 수능 시험장들 중 하나에, 30명 남짓한 수험생들이 모여 있다.
미리 배부된 시험지를 앞에 두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린 수험생들.
그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실 안을 가로지르는 한숨 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
군데군데 결원을 의미하는 빈 책상들.
주변을 오가며 부정행위를 감시하는 감독관들의 눈동자까지.
이 교실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하게만 보이는 시험.
올해를 놓치면 다음 1년을 고통 속에서 견뎌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그들의 손이 차갑게 굳어갔다.
하지만. 그 교실 안에서 단 한 사람.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사내만은 그 초조의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다른 수험생들의 앳된 얼굴과 달리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
컴퓨터용 사인펜을 까딱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푸는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긴장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8시 10분.
드디어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수험생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험지를 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고통이 섞인 한숨이 새어 나오고, 감독관들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어 갔다.
하지만 여유롭던 사내만은 시험지를 열지도 않고 바라보고만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감독관이 다가가려 했을 때, 마침내 그 사내가 시험지를 열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주변 학생들과 감독관들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엄청난 속도로 문제를 풀어 내리는 그가 있었다.
‘저건, 천재 아니면 바보가 확실하다······’
감독관부터 수험생들까지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 * *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드디어 시작이다.
좁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전투.
전국 60만 명의 수험생들과의 나와의 대결이 이제 막 시작됐다.
천천히 펜을 들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험은 언어영역.
수험생들의 심리적 긴장감이 가장 높은 시간이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거 발생하는 시간이었다.
사락-
시험지를 넘겼다.
시험지의 앞쪽을 차지하는 것은 화법과 작문, 문법 문제들.
각 분야의 기본 개념을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들과 그 응용문제들이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평소 어휘의 유형과 의미관계, 기본적인 문법 개념들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그 응용문제들도 많이 풀어봐야 한다.
슬쩍 눈으로 훑어보고,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한 뒤.
서둘러 앞부분 문제들을 풀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
.
다음은 문학.
매해 출제되는 문학 지문의 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현대소설, 희곡, 현대시, 고전시가, 고전소설이 각 한 작품씩 지문으로 출제된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EBS 교재나 18종 문학 교과서를 중심으로 문학 지문을 학습.
교재에 수록된 문제를 통해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고, 보편적인 접근법에 따라 ‘주제, 정서, 함축적 의미, 표현법’을 파악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공부해야 하는 범위가 굉장히 넓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소 문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왔던 수험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 이번엔 수능 출제위가 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탓인지, 고전시가의 비율이 꽤나 높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런 요소들이 전부 ‘해당 사항 없음.’이다.
.
.
이제 마지막.
매 시험마다 네 지문 정도 출제되는 비문학.
많은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비문학 지문 자체야,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지만, 수험생의 입장에선 부족한 시간에 쫓겨 정신을 잃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앞부분에서 시간을 허비했다면, 눈물을 머금고 비문학 지문 한두 개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니, 평소 비문학 지문을 최대한 빨리 읽는 연습을 해 놔야 한다.
이렇게 45문제.
마지막 문제까지 다 풀고 나니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이거, 예상보다 너무 오래 걸렸다.
* * *
언어 영역을 지나 수리 영역 시간.
수리 시간이 얼마 남자 않자, 교실 이곳저곳에서 신음 소리와 바득바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짝 둘러보니,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번 시험은 내가 봐도 악의가 느껴지는 난이도였다.
보통 수리영역의 21, 22, 29, 30번 문제들이 수리 영역의 등급을 가르는 죽음의 문제들이라곤 하지만 이번 건 좀 심했다.
원래 30번 문항에서는 꾸준하게 개수 세기 문제, 다시 말해 노가다 문제가 출제되곤 했다.
때문에 간혹 몇몇 수험생들 중에는 일일이 그림을 그려서 답을 구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이번엔 지표와 가수 문제가 출제됨으로써 수험생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려 버렸다.
정답률이 한 5%쯤이나 될라나?
더군다나 문제의 답도 222로 굉장히 불안한 숫자였다.
‘무슨 슬롯머신도 아니고······.’
학생들의 신음소리를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미친 난이도 시험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진 외국어 영역에서도 문제의 극악한 난이도는 여전했다.
‘세상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한 시험에 한두 문제 나올까 말까 한 초고난도 문제들이 평범한 문제처럼 다수 나오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올해 수능은 불 수능. 아니 이 정도 난이도라면 초열지옥 급 수능이 맞을 것 같다.
어쩐지 저번 평가원 모의고사 난이도가 범상치 않더라니······.
하아-
그래선지 매 시간마다 시험장 곳곳이 수험생들의 한숨 소리로 가득 찼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수험생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처음에 있었던 긴장감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들의 얼굴엔 짙은 피로감만이 남아 있었다.
20분 남짓한 쉬는 시간으로는 풀리지 않는 피로가 그들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
매 시험마다 시험 시작 20분 안에 문제를 다 풀고 남는 시간 내내 푹 쉬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점점 컨디션이 좋아졌다.
사락-
그렇게 사회탐구 영역의 동아시아사 문제까지 다 풀고 보니, 아무리 천천히 마킹을 한다고 해도 30분 이상 시간이 남을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시험 때 너무 많이 쉬어서 이젠 잠도 오지 않았다.
때문에 이젠 남는 시간에 뭘 할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저벅. 저벅.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괜찮아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부모님 연배의 감독관 하나가 다가와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일반적으로 수능 감독관과 수험생의 관계는 창과 방패의 관계.
수험생의 기상천외한 커닝시도를 철저하게 막아 내야 하는 게 감독관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수험생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만 아니라면, 최대한 수험생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한다.
바로 지금처럼.
그의 눈에는 내가 시험을 포기하고 답을 찍은 것으로 보였나보다.
그러니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입을 열어 낸 목소리는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탓인지 심하게 잠겨 있었고.
하필 감독관이 오기 전에 내뱉은 하품으로 인해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은 감독관의 측은지심과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나 보다.
“에구. 힘내요. 너무 늦었다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거라고도 하잖아요······.”
옅은 한숨과 함께 감독관님은 내 어깨를 탁탁 두들겨 주고는 돌아갔다.
‘음. 이게 아닌데······.’
뭐, 이런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나는 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풀었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