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3
3
003화 지푸라기? NO! 항공모함!
“연아야. 집중하자 집중.”
손에 들고 있는 시험지가 무겁다.
얇디얇은 A4 용지 한 장이지만 이 시험지 하나에 지난 오 년의 시간과 자존심이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쌤 저 수업 끝났는데요? 왜 저만 남아서 해요? 다른 애들은 보내 놓고서?”
정작 내일 시험을 볼 녀석이 도와주지 않으니 진도가 나갈 턱이 없었다.
내가 보충수업 하자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다.
‘으~ 왜요? 왜 제가 해야만 해요? 왜? 왜?’
얼굴을 잔뜩 부풀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 녀석의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박고 싶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이 있으니 참아야만 했다.
“연아 너···”
“넹?”
이 잔망스러운 녀석.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다니.
하지만 원장과의 내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녀석의 조력이 필요한 만큼,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이 녀석의 마음을 돌려놔야만 한다.
“성적 잘 내고 싶지 않아?”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자.
“헤헤.”
녀석은 별 대꾸도 없이 순진한 얼굴로 웃고만 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 주머니 속에 있는 USB. 지금 기댈 곳은 이것밖에 없다.
만약 이 안에 들어 있는 미래 시험지가 정말 진짜라면, 연아가 시험을 잘 보겠다는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역전이 가능할 것이다.
‘뭐가 있을까.’
이 녀석의 마음을 돌릴만한 무슨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저 나이 또래에 좋아할 만한 게······.
“연아 너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아니면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차라리 속 시원히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 뭐 하나는 좋아하는 게 있겠지.
그러나 이 녀석은 입술을 삐죽이며 콧잔등을 씰룩 거릴 뿐이었다.
“아뇨! 전혀 없어요. 먹고 싶은 건 부모님이 다 사 주시는걸요.”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녀석 때문에 속에서는 천불이 나기 직전이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보충수업 명목으로 잡아 놓은 시간이 끝나갈수록 내 마음도 타들어 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두 손 들었다.
“내일 60점만 넘으면 네가 하고 싶다는 거 다 들어줄 테니까. 오늘은 선생님이 하자는 데로 하자 응?”
자포자기 심정으로 던진 공수표.
한데?
의외로 연아의 호응이 좋다.
“어 진짜요? 와~ 약속했어요. 이거 무르기 있기 없기?”
“어?”
내가 당황하자, 연아 녀석이 시계를 흘끔 보더니 재촉한다.
“빨리해요. 선생님! 시험공부! 시험공부! 시간 얼마 없잖아요! 아자! 아자!”
녀석의 태도가 뭔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바뀐 것 같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진짜 중요한 것은 이제 남은 40분 동안 녀석의 머릿속에 시험 내용을 새겨 넣어야 한다는 시실 뿐.
마음 같아서야 USB에 저장되어 있는 문제들을 싹 뽑아서 그대로 문제 번호와 답만 달달 외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녀석의 기억력도 의심스럽고, 또 USB가 가짜라면 점수는 그나마 20점도 안 나올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선생이라 불리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선생들이 평균점수를 조절하기 위해 내는 고난이도 문제들은 최대한 외우라고 시키고, 그 외에 조금만 공부하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는 문제들은 차근차근 오답을 피해 갈 수 있을 정도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선생님! 여기 이거 이거 답이 시적화자 맞아요?”
“응 맞아! 그리고 교재 45페이지 펴 봐! 그래 거기 거기서···”
언제 그랬냐는 듯, 강의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웬일인지 녀석도 이상하게 불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녀 변덕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이번만은 이 녀석의 변덕이 밉지 않았다.
“···선생님 이건요?”
아무렴.
어떤 선생이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공부하겠다는 학생을 미워할 수 있을까.
그렇게 금방 하루가 지나가고.
이내 결전의 날이 도래했다.
* * *
다음날.
원장실에는 불편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김 선생. 어제 내기 기억하죠?”
원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본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회의라는 명목으로, 출근한 강사들을 불러 모았을 때부터 이럴 것 같았다.
나를 내보내려고 아주 작정한 듯싶다.
원장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박훈을 비롯한, 제1교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강사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상황인 제2교무실 쪽은 대체로 씁쓸한 표정이었다.
까득-
원장은 냉장고에서 쥬스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입을 연다.
“여기가 무슨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엄연히 성인들끼리 비즈니스 하는 공간인데, 구두로 내뱉은 말도 법적 효력 있는 것 알죠? 알아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시리라 믿습니다. 김 선생은 책임감 하나는 대단하잖아요?”
원장은 아예 이번 기회에 마음에 안 드는 놈도 정리하고 또 그걸 지켜볼 선생들에게 자기 위신도 세우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저런 유치한 도발에 걸려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에게 이 내기는 단순히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도, 학원을 나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USB.
그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세상에 다시없을 이 기회를, 내가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USB 속 내용물들만 진짜라면, 사실 이 조그마한 동네 학원에서 짤리고 말고가 뭐 중요하겠나?
덕분에 느긋하게 대꾸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남들보다 훨씬 먼 곳을 보고 있다.
“이제 나간다고 막 나가는 건가? 원장 말에 대꾸도 없고. 허 참.”
원장은 예상외로 차분한 내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그러자, 1교무실의 강사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죠. 아휴, 저 예의바르던 게 다 가식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니 바른 말로 20점을 하루만에 60점으로 올린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상대가 상대 나름이어야지. 천하의 20군단 군단장 김연아를 상대로.”
수다쟁이 박훈이 또 그 사이를 못 참고 끼어들자, 같은 국어과인 마귀할멈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김연아라는 애 저도 한번 겪어 봤는데 애가 어찌나 신경질적인지, 에휴 애가 아주 되바라져서는··· 그런 애는 아무리 돈을 트럭으로 쏟아 부어도 안 돼요. 저기 대치동 1타 강사가 와도 60점이 뭐야, 50점도 못 넘길걸요?”
선생이 학생을 욕하는 것은 결국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닌가?
그들은 원장에게 꼬리를 흔들면서 제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몇몇 선생들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중에서도 은솔 선생의 얼굴이 가장 압권, 마치 더러운 오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렇게, 몇 분인가의 시간이 지나갔다.
“원장님 밖에 연아 왔던데요?”
수업 준비 때문에 잠깐 밖에 나갔다 왔던 1교무실 선생 하나가 회의실 문을 열며 말하자,
“그럼 김 선생. 일어납시다.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직접 확인은 해 봐야지? 짐 잘 쌌는가도 한번 보고 그래.”
원장이 짐짓 명랑한 어조로 나를 재촉했다.
* * *
창문 밖으로 보이는 김연아의 뒷모습은 내 예상과 달리 너무나 어두웠다.
잔뜩 움츠린 채,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앉아 있는 녀석의 어깨가 너무나 작아 보인다.
시험을 잘 본 사람이라면 보일 수 없는, 그런 모습.
원장의 두꺼비 같은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애가 시험을 못 봤는데 좋아하는 학원 원장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말 상종 못할 인간.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구만. 뭐 당연한 일이지만.”
문 앞에 당도한 원장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거세게 문을 열어 재꼈다.
“연아야 시험 잘 봤니? 몇 점이나 나올 것 같아?”
그리고 그 서슬에 놀라 김연아가 얼굴을 드는 순간.
쿵-
내 심장도 떨어져 내렸다.
김연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 시험을 못 봤나? 그 USB는 사람을 낚기 위한 장난에 불과했던 건가?
움켜쥐었던 지푸라기가 손 안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어떻게 해요······.”
김연아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나를 향하자, 가슴 속에 커다란 바늘이 날아와 꽂히는 것 같다.
“저기 그러니까 연아야 울지만 말고 얘기를 좀 해 봐봐··· 그래서 몇 점이나 나왔는데?”
원장은 정말 인성의 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 자기 학원 학생이 시험 못 봤다고 울고 있는데 저게 원장으로서 할 소리인가.
모든 기대가 무너졌지만 저 꼴을 보고 있기엔 어른으로서 너무 미안했다.
“원장님 그만하시죠. 제가 나가겠습니다.”
속 시원하게 말하고 나니 오히려 개운하다. 나간다, 이딴 학원.
“아니, 뭐 꼭 그런 것 때문에 묻는 것은 아니고. 원생 점수를 관리해야 하니까.”
원장은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는 듯 픽 웃으며 김연아에게서 손을 뗐다.
김연아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선생님··· 나 선생님한테 소원 빌 거 있었는데······.”
역시 아무리 영악하더라도 아이는 아이인가.
“괜찮아 수고했으니까··· 들어줄게 말만 해”
그러자 그 순간.
씨익-
김연아의 울먹거리던 얼굴이 웃는 채셔 고양이로 변모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고,
일그러졌던 입꼬리가 긴 웃음으로 변할 때까지 원장과 나는 멍하니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요? 나 몇 개 밀려 써서 59점밖에 못 맞았는데? 정말로 들어준다고 했어요? 아싸!”
그러자, 원장의 입꼬리가 팍 내려간다.
“어··· 뭐? 몇 점?”
김연아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59점이요!”
······?
원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린다. 김연아가 다니는 학교의 시험문제에는 주관식이 많아 찍어서 점수 얻기도 힘들다.
한데 어떻게 만년 20군단 김연아가 하루 만에 점수를 두 배 이상 올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나올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몇 문제 밀려 써서 그거밖에 안 나왔어요. 쌤! 쌤이 찍어 준 부분 다 나왔던데 어떻게 한 거예요? 혹시 초능력자?”
평소처럼 발랄하게 대답하며 나를 돌아본 녀석의 눈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연아야 정말 내가 체크해 준 부분 다 나왔니?”
“넹. 완전 소름! 고난이도 문제는 진짜 쌤이 말한 그대로 나왔다니까요. 심지어 주관식 답도 완전 똑같았음! 완전 쪽집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지푸라기인 줄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항공모함이었다.
앞으로 수십 년 치 시험문제.
내신 수행평가부터 시작해서 수능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인간의 급을 재고, 평가하고, 나누는, 모든 시험이란 시험은 전부 내 손 안에 있다.
눈앞에서 현실부정을 하고 있는 원장은 이미 눈에 차지도 않았다.
“원장님. 원장님이 이기셨습니다. 약속대로 지금 당장 정리해서 나갈 테니.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아니······.”
원장은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당황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쌤 이 학원 나가요? 에이 엄마한테 이야기해서 나도 옮겨야겠다. 쌤 어디로 가요? 나도 같이 가요! 제 친구들도요!”
가만히 듣고 있던 20군단 군단장님께서 강아지처럼 방방 뛴다.
불안하게 떨리는 원장의 눈동자.
계속 달라붙는 연아를 잘 달래 떨어뜨리고 교무실로 향하려는데.
“김··· 김 선생님! 잠깐만요”
등 뒤에서 허겁지겁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김 선생님.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요.”
원장은 전에 없이 상냥한 음색으로 말했다.
“네, 내기에서 진 사람에게 무슨 일이시죠? 아 퇴직금 문제?”
내가 묻자, 원장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퇴직금이라니 그런 흉측한 소리를 어느 누가 한답니까. 그냥···”
원장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