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4
4
004화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1)
예의상 따라온 원장실.
커피향이 코끝을 감돈다.
원장이 손수 내려준 아라비카 원두의 향이다.
달큰한 꽃향기와 약간은 시큼한 감미, 인스턴트커피에 익숙한 내 입에는 맞지 않는다.
마치 이 학원처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관두겠습니다. 아무리 구두계약이라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그러자 원장은 말을 바꿨다.
“계약. 그래요 좋은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5년 동안이나 잘해 주셨는데 이대로 나가시면 내가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어이가 없다.
미안할 것 같다는 사람이 아까 그런 표정을 지었어?
“아 그리고 안 그래도 김준영 선생님 급여가 너무 적어 보이긴 했어요. 내가 조만간 올려 주려고 했었는데 늙은 정신에 번번이 깜빡해서···”
번번이라? 지난 3년간 내 급여는 한 겨울 동태처럼 동결되었었다.
이쯤 되면 거의 알츠하이머를 의심해봐야 하는 부분.
그나마 3년 전에 한번 올려 줬던 것도 처음 2년간 거의 학원에서 살다시피 한 후에나, 갖은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면서 해 준 것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네가 쏴라 네가 쏴라 하는 통에 회식비도 내가 계산했었지.’
게다가 그때 올려 준 비율도 꼴랑 십오 퍼센트 남짓.
매달 나간 회식비 생각하면 남는 것도 거의 없었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선생들의 연봉이 나의 곱절에서 곱절로 방방 뛰는 동안, 나는 뚜벅뚜벅 걸어야 했다.
한편, 원장은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지금 맡고 계신 학생들 숫자도 많고 실력도 확실하시니까. 5할 정도는 충분히 올려 드릴 수 있어요. 고등부 전담이셨다면 비율제로 더 챙겨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대신 보강비랑 교재비는 내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릴게요.”
현재 내 급여를 연봉으로 따졌을 때 2천만 원 정도였으니, 이제는 3천만 원으로 인상시켜 주겠다는 말이었다.
분명 이틀 전이었다면 감지덕지하며 절을 했을 상황.
하지만······.
“글쎄요.”
지금은 전혀 끌리지 않았다.
설령 끌린다 하더라도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 밑에서 더는 일할 수 없다.
“아, 물론 조만간 고등부에 자리도 만들어 드릴 수 있겠죠. 우리 선생님 실력에 중등부만 하긴 너무 아까우니까. 그 이후에 비율제로 가시면 제가 잘 조정해 드릴 테니, 조금만 쉬신다 생각하시고······.”
원장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고등부. 학원의 꽃이자 가장 치열한 전장.
중등부와는 다르다. 백이 들어가면 구십 명이 죽는, 그런 참혹한 경쟁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중등부와 비교불가.
그 열매는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달콤하다.
바닥에 뛰어드는 사람치고 그 욕심이 없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수업에 대한 전권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은 수업에만 신경 쓰시고 다른 일은 다 학원에 맡겨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쯤 되니 뭔가 이상했다.
나야 USB를 가지고 있으니 여유롭다고는 해도, 원장이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중학생 한 명의 성적을 올렸다고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만한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원장의 안색이나 말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할 정도로 절박해 보인다.
“흐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섣불리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선생님. 그 동안 애들이랑 정도 많이 드셨을 거 아닙니까··· 또 동료 선생님들도 계시니까. 가능하면 계속··· 아니 얼마만이라도 같이 일 하시는 게······.”
뭘까? 뭐가 원장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
이럴 때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표정으로 불편함을 내비치는 것이 좋다.
어차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 선생님. 나 좀 도와줘요. 도대체 어떻게 김연아 학생의 점수를 올린 겁니까? 아니 그 동안 난다 긴다 하던 선생님들이 죄다 나가떨어지면서 손도 쓰지 못했는데, 대체 어떤 마법을 썼기에 한 번에 40점 가까이 올린 거예요? 아까 연아 학생이 했던 족집게 어쩌고는 또 뭐고?”
역시 그것 때문인가.
하긴 20군단의 수장이던 김연아의 성적을 올린 비법이라면 다른 학생들 성적 정도는 더 쉽게 올릴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지금은 일단 나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을 것이다.
내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그 방법이란 게 알려 준다고 해서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닌데.
“······.”
살다 보면 지금처럼 열 마디의 말보다 한 마디의 침묵이 나을 때가 있다.
나는 식어 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김 선생.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지난 5년간 이런 적 없었잖아요? 알았으면 아무렴 내가 그렇게 서운하게 굴었을까.”
원장이 굳이 한 번 더 물어볼 때야, 입술을 무겁게 뗐다.
“글쎄요? 특별한 방법이랄 만한 게 따로 있나요? 그 난다 긴다 하는 선생님들보다 제가 연아에게 더 잘 맞는 사람이었나 보죠.”
“······.”
“그런데 갑자기 왜 연아 점수에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그러자, 원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사실 아까 김 선생님 나가고 난 뒤에 곧바로 김연아 학생의 부모님께 연락이 왔어요.”
김연아의 부모는 원래 원장과 자주 연락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김연아의 언니 또한 이 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학원에 관심이 많을 만하다.
“···휴.”
원장은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까 연아 학생의 어머니께서 연아 학생한테 점수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제안이요?”
“연아 학생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성적이 떨어지지 않고 올라가면, 연아 학생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유치원에서 주기적으로 우리 학원 홍보를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어요. 아시잖아요. 이 지역에서 그 가족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학부모의 학부모들에게 홍보를?
뭐, 확실히 이쪽 바닥에서 애 엄마들 사이의 입소문 마케팅만큼 효과가 대단한 것이 또 없지만.
원장은 이미 홍보라는 유혹에 낚여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오늘 그 의미가 퇴색했다지만, 김연아는 아직도 염연히 20군단의 현역 군단장이자 자타공인 트러블메이커 아니던가.
‘연아를 너무 쉽게 보는 것 같은데.’
오늘 반짝 국어 점수를 올렸을 뿐, 내일이면 다른 과목 점수들로 평균을 맞춰갈 것이 분명했다.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한 걸까?
이 학원에 내가 없다면, 또 내 손에 USB라는 룰브레이커가 없다면 연아 부모님의 제안은 사실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그래서 수락하셨나요?”
내가 묻자, 원장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랬죠.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니까요. 그리고 연아 학생 부모님께서 단서를 붙이셨는데 그게······.”
원장은 입을 멈추고 말을 아꼈다.
“김준영 선생님을 한번 만나 보는 거라더군요.”
뭐?
나를 왜?
* * *
원장실을 나오며, 습관처럼 주머니 속 USB를 만져보았다.
‘언제까지 다닌다는 확답은 못 드릴 것 같지만, 적어도 이번 학기 마칠 때까지는 이 학원에서 강의하는 것으로 하죠. 대신 원장님께서도 본인이 말하신 것들을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만약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땐 가차 없이 나갈테니 그리 아시고요.’
결국 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당장 어느 학원을 가건, 집에서 공부방을 차리건, 이 학원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과 인맥을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확실히 아직 조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이 USB를 손에 넣은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 USB를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학원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5년 동안 다니면서 이런 저런 정도 많이 들었고, 신세진 동료들도 꽤 있었으니 그 신세도 갚을 겸···
‘뭐, 월급도 많이 올랐고.’
내가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 쌤. 구사일생한 심정이 어때?”
듣기 싫은 잡음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끼어든다.
느끼한 개구리. 박훈이다.
“정말 운 하나는 진짜 타고났다니까. 내 인정한다. 인정해. 아니 어떻게 거기서 그런 뽀록이 터져가지고 말이야. 연아 걔가 10년 치 운 오늘 하루에 몰아 썼나 봐. 그치?”
비아냥거리는 박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벼워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독은 평소보다 더 짙었다.
나는 평소대로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이야 김 슨상님 이거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 무섭습니다. 아니 중학생 점수하나 쪼끔 올렸다고 아주 그냥 1타 강사 되신 것 같네요. 이러다 대치동 가는 거 아닌 가 몰라?”
원래 한두 번 툭툭 걸던 시비가 오늘은 길어진다.
나는 귀찮음을 담아 짧게 대꾸했다.
“심심하신가 보네요.”
내 가성비 좋은 대꾸에, 박훈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물든다.
“심심해? 허 참. 고등부 강사가 심심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무슨 중등부인 줄 알아요?”
죽자고 달려드는 박훈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강의실을 살폈다.
혹여나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민폐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이다.
하지만, 내 시선처리를 본 박훈은 더더욱 열을 냈다.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뭐··· 맞지만.
“얼씨구? 20점짜리 하나 60점 만들어 놨다고 자신감 봐 아주.”
“······.”
“이보세요. 김준영 씨. 댁은 고등부 들어오면 나한테 배우는 애들 수준보다 못해. 아니 뭐 매일 가짜 수업만 하니 뭘 알기나 하나.”
그거 흥미롭군. 안 그래도 고등부 강의 수준이 조금 궁금하던 차다. 나도 고등부로 옮겨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이 박훈이란 놈을 조금 써먹어도 될 듯싶다.
자고로 박훈 같은 놈을 사용할 땐 그에 맞는 방법이 있는 법이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질문을 올릴 때.
[성기사랑 마법사랑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이런 식으로 질문을 올리면 백날 해봐야 답변이 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똑같은 질문이라도
[병신들ㅤㅇㅏㅋㅋㅋㅋ 마법사가 성바퀴 개 쳐바르는 각 아니냐?]라고 도발적인 제목을 붙여야만,
[미친놈아! 성기사가 훨 좋음ㅋㅋㅋ 정신차려라.] [먼 소리임ㅋㅋㅋ 마법사 너프돼서 이제 성기사 발끝도 못 따라감.] [구더기 = 마법사 <<<<< 넘사벽 <<<< 성기사]이렇게 제대로 된 답변이 달리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박훈에게 ‘고등부와 중등부의 차이가 뭔가요?’라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 대신···
“고등부나 중등부나 거기서 거기지 뭐.”
라고 한 마디 해 주었을 뿐이다.
그러자, 가뜩이나 쭉 찢어져 있던 박훈의 눈과 눈썹이 거의 세로로 치솟는다.
그리곤
빼애애애애액-
달궈진 압력 밥솥에서 김이 솟아나듯, 폭발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한다.
“이 봐요, 김 쌤!!!”
이내 박훈은 내게 고등부에 대한 모든 것을 스타카토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고등부 내신을 준비할 때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각 학교에 있는 선생들의 성향까지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공립학교가 더 어렵다. 사립이야 주구장창 하던 놈이 계속 하기 때문에 문제도 비슷하고 준비할 것도 정해져 있다.’
‘하지만 공립학교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매년 어떤 선생이 새로 부임했나 파악해야만 내신을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 부임한 선생이 전 학교에서 어떤 식으로 문제를 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일 년 간은 죽을 쑬 수밖에 없다.’
‘거기다 일단 교통이 편리한 시내의 학교의 경우 경력이 찬 선생들이 부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는 그나마 수월하지만, 혹시라도 초임 교사가 오면 지옥이 펼쳐진다.’
‘의욕 만땅인 초임교사가 아이들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풀 창의력으로 전력질주하기 시작하면 애들도 죽고 나도 죽는다. 그리고 수능 준비는···“
“······.”
박훈에게서 고등부의 세계를 배우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는 좋은 스승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배우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지난 3년간 박훈에게 당하기도 참 많이 당했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그의 학원 생활을 즐겁게 만드는 소품에 불과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상황이 많이 다르다.
한참이나 화를 쏟아내던 박훈은 이내 말뚝을 박았다.
“내가 장담한다! 김 선생이 고등부 오면 폭망한다고! 김 선생도! 김 선생이 가르치는 애들 성적도!”
나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그러자, 내 반응이 성에 차지 않는 박훈은 점점 더 판을 키운다.
“보아하니 고등부의 벽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인데, 내기할까?”
내기라?
내가 흥미를 보이자, 박훈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고등부 애들 곧 시험인데. 예상문제 한번 내 보면 어때? 다음 달 월급 걸고!”
적중률 싸움인가?
“······.”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이 없자, 박훈은 으름장을 놓는다.
“자신 없음 말고.”
그는 내가 내기를 거절하고 꼬리를 말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음 달 월급 받고, 올 남은 한해 연봉 얹습니다. 어떠세요?”
나는 이 상황이 진심으로 재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