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47
47
047화 백인지적(百人之敵) (4)
[11단계. 원자번호 83번인 는 우리말로 ‘창연(蒼鉛)’이라 불린다. 다음 중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의 원인이 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대해 강력한 항균제로서 작용하기도 하는 의 이름은?]1. 아스타틴
2. 비스무트
3. 아이오딘
문제가 나오는 순간. 현직 의사인 조민수는 자신의 승리를 예상했다.
‘문과들이 뭐 원소기호나 다 외웠겠어?’
하지만 동시에 완전무결한 승리를 원했던 그의 바람이 약간 퇴색된 것 같아 신경 쓰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과 그것도 의학과 관련된 문제가 출제된 이상.
제작진 측에서 의도적으로 밀어준 것이 아니냐는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완전무결해야 할 손나윤과 자신의 역사적 만남에 구정물이 끼얹어 질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자, 11번 문제가 마냥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잘 끝났으니 다행이지만.’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니 만큼, 이제 와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고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둘만 불쌍하게 됐구만.’
그는 문제를 보며 고심하고 있을 준영과 변호사 이형태를 생각하면 답을 눌렀다.
그런데.
“네 11단계 문제의 정답은 2번 비스무트입니다. 자 도전자 여러분의 정답을 확인하겠습니다. 과연 탈락자느으으은?”
MC가 호들갑을 떨며 탈락자를 확인한다.
“탈락자는? 세상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11단계 문제에서 3명의 도전자들 전부 통과입니다! 이거 정말 믿기지 않는 결과인데요.”
순간. 조민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이형태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 * *
16번 도전자이자 변호사인 이형태는 조민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의사인 조민수는 이과 관련 문제인 11번 문제가 나왔을 때, 자신의 우승을 확신했던 것 같았다.
사실 조민수의 예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변호사라면 갑자기 튀어나온 원소 관련 문제를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가 ‘일반적인’ 변호사가 아니라는데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내가 이래 봬도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만 5년째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의료소송을 전문으로 다루는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였다.
더군다나.
‘그래도 2학년 때 외웠던 걸 이렇게 써먹네?’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긴 했지만 잠깐이지만 2년간 의대에서 주삿밥를 먹은 인물이니만큼. 그에게 이 정도의 문제는 어려운 문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의대에서의 2년이 그리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것에 내심 만족하는 그였다.
그런데 그때.
이형태의 눈에 가까스로 표정관리에 성공한 조민수와 짙은 웃음을 짓고 있는 MC가 보였다. 그들은 인터뷰를 가장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선생님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는 문제가 나왔을 때 내심 선생님이 우승하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다른 분들의 상식이 정말 대단하네요.”
은근한 이죽거림이었다.
MC의 말에 조민수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이형태는 자신의 혀에 고소한 맛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조민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민수의 눈빛에서 무수하게 봐 왔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너는 내 발 아래에 있다’는 시선.
자신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발밑에 깔고 시작하는 사고방식이나, 남들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시작한 자들이 가지는 특유의 독선 같은 것들.
이형태가 질리도록 겪어 왔던 그런 것들이 조민수의 눈빛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에, 이형태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손나윤 씨는 기뻐하실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팬 두 분이 나란히 12단계에 진출하는 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손나윤 씨?”
MC가 손나윤에게 묻자, 손나윤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민수의 시선이 손나윤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형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주 차가운 불꽃이었다.
사실 금수저니 어쩌니 하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형태가 조민수를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
그것은 바로.
‘나윤느님을 저런 더러운 눈으로 보다니.’
손나윤을 향한 조민수의 눈빛 때문이었다.
마치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는 듯 손나윤을 바라보는 조민수의 눈빛.
무미건조했던 그의 삶의 활력소가 되어 준 손나윤에게 절대 닿아서는 안 되는 눈빛을, 조민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저 녀석은 해로운 팬이다.’
뼛속까지 손나윤에 대한 ‘빠심’으로 무장되어 있던 이형태의 본능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조민수를 살피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런 팬들이 있었다. 현실과 이상을 망각해 마치 자신이 팬을 넘어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부류들.
대부분은 망상에서 그치고 말지만, 가끔은 위험한 자들은 그 망상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금수저들’
복잡하게 엮인 인맥을 타고 어떻게 해서든 제 욕망을 성취하려는 부류들.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 버리겠다.’라는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나윤 씨는 절대 안 되지.’
이형태는 손나윤을 바라보았다. 맑은 웃음으로 스텝들과 이야기하는 그녀.
그녀 정도의 유명세라면 스타병에 걸려 안하무인이 될 만도 한데, 뜨기 전이나 뜬 후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맑은 사람을···’
그의 의지가 점점 불타올랐다.
그녀의 맑은 웃음을 지킬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졌다.
만약 손나윤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지만, 혹시라도 공약을 이행하려 한다면 그 자리에 조민수가 서 있는 사태는 막아야만 했다.
‘뭐 내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손나윤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이형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 12단계 문제가 준비된 것 같습니다.”
문제의 출제 준비가 끝났는지 제작진 측에서 MC에게 신호를 주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거린 MC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진행을 시작한다.
“이거 2년 만에 처음으로 12단계 연장전에 돌입하는데요. 이 레이스가 얼마나 지속될지, 정말 기대됩니다.”
잠시 도전자들을 바라보던 MC가 과장된 몸짓으로 스크린을 가리킨다.
“자 그럼 12단계 문제 보여 주세요!”
MC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크린에 문제가 나타난다.
[12단계. 1887년 미국에서 채소에 세금을 물리는 관세법이 통과되자, 토마토가 과일이나 채소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미국대연방법원은 토마토가 채소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그 근거는?1. 뜨거운 불에 익혀 먹을 수 있어서
2. 가지목 가지과의 식물이라서
3. 식사에 나오지만 후식으로 나오지 않아서
문제를 본 이형태가 조민수를 바라보며 짙게 웃었다.
조민수의 얼굴은···일그러져 있었다.
* * *
천천히 답을 누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 바로 옆에 있는 변호사는 진즉에 버튼을 눌렀는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반면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던 사람은 30초가 다 되어 감에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다.
그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버튼이 감춰져 있는 나무 상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긴 결정하기 어려울 만도 했다. 나도 12단계 문제를 처음 봤을 때 어안이 벙벙했었으니까.
제작진에서 어떤 의도로 문제들을 배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저 둘의 경쟁구도를 명확하게 하자는 거겠지.’
의학 관련 문제 하나, 법학 관련 문제 하나. 중심에서 슬쩍 벗어나 있는 문제들이긴 했지만, 뭐 이쯤대면 대놓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시청률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방송의 특성상.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승패를 뒤집지는 않으니 다행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촬영장을 바라본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PD와 밝게 응원하고 있는 손나윤, 지친 표정이 역력한 탈락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녹화 시간은 이미 3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선지 스텝들도 촬영을 서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 제한 시간 5초 남았습니다.”
MC가 재촉하듯 말했다.
그러자 고민을 거듭하던 의사가 인상을 쓰며 버튼을 누른다.
그가 어느 버튼을 눌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그리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내 옆자리에 있던 변호사가 내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선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어요.”
······?
갑자기 그가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막 그에게 말을 걸려고 입을 열자.
“아, 잡담하시면 안 됩니다.”
세트장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니 도전자들을 감시하고 있는 스텝이었다.
명목상으로는 허술한 세트장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보단 도전자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텝이 뒤로 물러선다. MC가 이쪽을 돌아보며 입을 연다.
“자, 그럼 이제 12단계 문제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카메라를 바라본다.
“2,365만 원의 상금과 백인지적의 자리는 과연 누구의 것일 것인가.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MC가 스크린을 향해 돌아서며 외쳤다.
“정답을 보여 주세요.”
그러자.
스크린에 정답이 표시됐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무너지고, 다른 한 사람의 얼굴에는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떨어진 사람은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의사인 조민수였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문제가 떠올라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꽉 움켜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거···”
그때, 옆자리에 있는 변호사 이형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돌아보자 이형태가 슬쩍 웃는다.
“···재미있게 됐네요.”
그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짙은 호기심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와 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의 어깨 너머로 조민수의 자리를 비추던 조명이 ‘탁’하는 소리를 내며 꺼지는 것이 보였다.
“자, 이제 남은 도전자는 단 두 명. 기나긴 대결의 마지막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채널 고정해 주세요!”
MC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