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48
48
048화 백인지적(百人之敵) (5)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오오~
휴대폰이 울렸다. 듣도 보도 못한 요란한 벨소리였다.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요란한 벨소리를 내가 설정하지는 않았을 테니, 김연아의 짓인 게 분명했다.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벨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했다.
[연아^_^]···보아하니 휴대폰을 빌려가 놓고 이런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쩐지 휴대폰을 다시 돌려줄 때 불안하게 웃고 있더라니.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아 쌤! 진짜 나도 좀 데려가지! 진짜 정말 너무하다 너무해! 나 데려갔으면 막 응원도 해주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김연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어떻게 촬영 날짜를 알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이 방방 뛰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숙제는 다 했어?”
내가 묻자. 녀석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쳇. 그런 건 이미 진즉에 끝내놨죠. 에이 TV 한번 나가 보고 싶었는데. 혹시 알아요. 바로 걸그룹 캐스팅 돼서 연예계로 진출했을지?]어쩐지 녀석이 일주일 내내 나를 볼 때마다 데려가 달라고 졸랐던 이유가 있었다. 보아하니 녀석은 허황된 꿈을 꿨던 것 같다.
하지만.
‘손나윤이 옆에 있는데 잘도 캐스팅 됐겠다.’
뭐 나름 학교에서 인기도 있는 것 같고 내 방송 시청자들이 연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일이었다.
상대가 손나윤이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걸그룹이 아니라 어물전 멤버 중에 하나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녀석의 허황된 상상을 씻어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쌤. 혹시··· 손나윤이랑 포옹했어요?]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또 뭔가 했더니 녀석도 SNS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몰랐던 거였지만 대기실에서 도전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내가 가볍게 말하자, 녀석의 목소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오 그래요? 손나윤이 SNS에 공약도 걸었던데 진짜로요?]하지만 미덥지 못했는지 다시 한 번 묻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혀를 차며 녀석에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겠니. 애초에 그런 거 관심도 없고.”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김연아가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솔직하게 말해 봐요. 그래도 손나윤인데. 혹시 하고는 싶었는데 떨어져서 못한 거 아니에요?]김연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러더니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기 할 말만 다다다 쏟아낸다.
[솔직하게 말해서 하고 싶었죠? 그렇죠? 다른 사람도 아니도 손나윤인데 당연하지. 여자가 봐도 이쁜데 남자들은 더 하지 않겠어요? 에휴, 어쩌나 우리 준영 쌤.]내가 잠자코 있자. 시원하게 자기 할 말을 쏟아내던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어라 원래 이쯤에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반격이 날아와야 하는 타이밍인데? 음··· 쌤 혹시 진짜로 손나윤이랑 못해서 상심한 거예요? 설마 천하의 김준영이? 아니죠? 그렇죠?]갑자기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녀석이 녀석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러다 결국.
[···에이 쌤! 손나윤 뭐라고 그래요! 난 별로 이쁜 것도 모르겠더만! 그까짓 포옹 나중에 내가 해줄 테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마요!]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못해 자진모리장단까지 쏟아 내는 녀석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마음대로 생각해.”
내가 코웃음을 말하자 녀석은 목소리가 우울하다는 둥. 어디냐는 둥. 우울할 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둥 쓸데없는 말을 나열하시 시작했다.
그러다.
지하철이 마포역에 가까워지자 차내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 나왔다.
[···응 방금 마포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마포면 마포대교? 으아 쌤 안 됨요!]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김연아가 방방 뜨기 시작한다. 이번만큼은 녀석의 망상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야 사람이 포옹 한 번 못했다고 마포대교를 간다는 생각에 다다르는 거야.
어쩌면 작가는 일한이가 아니라 이 녀석이 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끊는다.”
그러자 녀석이 소리친다.
[아 쌤 끊지 말아요! 안 돼!]뚝-
귀에서 전화를 떼는 그 순간까지 녀석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꺼진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창밖을 바라본다. 서울의 야경이 지하철 차창에 닿아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저 멀리. 불과 몇 분 전까지 내가 있었던 여의도 KSB 건물의 빛이 보인다.
천천히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 * *
촬영장은 고요했다.
촬영시간 내내 옆 사람과 수군거리던 방청객들도 그리고 쉴 세 없이 세트장을 오가던 스텝들도 모두 가만히 서서,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 장대한 레이스의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최후까지 살아남은 2개의 조명이 비추는 그곳.
사람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내고 있는 두 명의 도전자가 있었다.
“자, 여러분.”
MC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2명의 도전자들을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MC를 향한다.
“이제 13단계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면 백인지적이 시작된 이래 이렇게 불똥 튀는 대결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눈부신 대결도 대단원의 막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무려 13단계 문제인 만큼, 약간 장난스러운 태도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MC도 진지한 어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과연 우승자는 누구일 것인가. 문과와 이과 대결에서 승리하고 올라온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16번 도전자인가. 아니면 불수능 만점자 출신 요튜버 17번 도전자인가.”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형태가 대형 로펌 소속인 것은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김준영이 불수능 만점자 출신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아까 MC가 준영의 인터뷰를 은근슬쩍 넘어갔기 때문에 생긴 일.
중요한 정보를 소홀하게 넘긴 MC를 향해 사람들의 불만어린 시선이 꽂힌다.
하지만 사람들이 불만어린 시선을 던지거나 말거나 MC는 진행에 집중한다.
“오랜 기다림의 끝. 과연 백인지적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이제 그 결전의 막이 올라갑니다!”
카메라의 시선이 스크린은 향하자.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MC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약간 줄어들자. 절도 있는 자세로 스크린을 가리킨다.
“자 그럼 문제 주세요!”
아마 이번이 마지막 선언일 것이라 생각하는 듯. 크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스크린에 문제가 나타났다.
[13번 단계. 에서 ??의 바른 표기는?]1. 에게
2. 에걔
3. 에계
순간.
문제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13단계 문제치고 단순해 보이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의 난이도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다.’
방청객들은 생각했다. 아주 짧은 문제 간단한 선지였지만, 쉽게 답을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평소 한국어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틀릴 수밖에 없는 문제.
아니, 애매하게 한국어를 배운 사람에게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도전자들은?’
자연스럽게 방청객들의 시선이 도전자들을 향했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예상외의 광경이 펼쳐졌다.
“······.”
그곳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난색을 보인 적이 없었던 이형태가 곤란한 낯으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다른 도전자인 김준영은 너무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형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10초 남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30초 이내에 답을 선택하지 않으시면 자동으로 탈락처리 됩니다.”
MC가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알려왔다. 그러자 이형태의 표정에 초조함이 서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3초쯤 남았을 때 벼락같이 답을 선택했다. 그리고선 후련한 표정으로 김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30초가 다 지나갔다.
MC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약간 고민하던 16번 도전자까지 답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곤 천천히 도전자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번 문제가 오늘 마지막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번엔 정답 확인 방법을 약간 바꿔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MC가 두 사람을 쳐다본다.
“정답을 확인하기에 앞서 먼저 도전자 두 분의 답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두 분 의견은 어떠신가요?”
마지막 문제였기 때문인지 빠르게 정답을 확인하는 것보단 먼저 정답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MC가 두 사람에게 묻자 둘은 거리낌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MC가 짙게 웃었다.
“네. 두 분도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그럼 먼저 두 분 도전자의 정답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곤 두 사람을 바라본다.
“자 그럼 도전자들의 정답! 보여 주세요!”
MC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답이 그들 자리에 달린 작은 스크린에 떠올랐다.
순간 두 사람의 답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두 분의 정답이 엇갈렸습니다. 이형태 도전자는 2번 ‘에걔’를 김준영 도전자는 3번 ‘에계’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MC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준영과 형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명확해졌다.
한 명은 살아남아 백인지적이 될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쓸쓸하게 이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둘을 바라보며 최후의 승자를 기다렸다.
“자, 이제 정답을 확인하겠습니다. 정말 마지막이 되겠네요. 13단계 문제 정답 보여 주세요!”
MC가 말하자 조명들이 일제히 꺼지고 스크린만이 오롯하게 빛난다.
그리고 곧 스크린에 13단계 문제의 정답이 떠오른다.
정답은.
3번.
‘에계’
모두가 정답을 확인하는 그 순간. 방청석에서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촬영장에 있는 스텝들은 물론 이미 탈락한 도전자들과 손나윤까지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우승자의 탄생을 축하했다.
“여러분 드디어 백인지적(百人之敵)이 탄생했습니다. 총 상금 2,365만 원의 주인공은 바로 김준영 도전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MC의 말을 들은 준영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자신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 * *
촬영이 끝난 뒤 방송국 앞을 나오고 있을 때.
“이거 많이 배웠습니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변호사 이형태가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나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에게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자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면 입을 열었다.
“사실 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는데 좀 아까 작가님들에게 여쭤보니 작년 수능 만점이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서율대 재학 중이시라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게 펴진다.
“잘됐네요. 저도 서율대 나왔는데. 이거 동문끼리 앞으로 연락도 하면서 지내도록 하죠.”
그러면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낸다.
명함을 받아 확인하니 국내 굴지의 로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앤윤 법률사무소. 변호사 이형태.’
지옥행 특급열차를 탈 사람도 (돈만 주면) 건져준다는 그곳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슬쩍 웃으면서 입을 연다.
“그나저나 아까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고요.”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거···거부하기 정말 어려웠을 텐데···그렇게 단호하게···”
“아.”
보아하니 아까 우승 기념사진을 찍을 때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몇 분 전.
우승자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우승 축하드려요!’
스케줄 때문에 먼저 사라진 줄만 알았던 손나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눈동자를 빛내며 나와 손나윤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두 눈 가득 부러움과 기대를 품고 나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손나윤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에이 뭘요 수능 시험도 바로 옆에서 치른 사인데요.’
말을 마친 손나윤은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에헴! 그럼 공약을 이행해 볼까요!’
그리고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도 그리 싫지 않은 듯 화사하게 웃고 있다.
그러자 주변 사방팔방에서 찌릿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나를 오체분시할 듯한 살기들. 특히 저 멀리 조민수의 시선이 독보적이었다.
‘······.’
나와 마지막까지 접전을 펼쳤던 이형태 변호사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 괜찮습니다. 상금도 이미 탔고.’
나는 손나윤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이고는 정중하게 목례했다.
‘저는 손나윤씨의 팬도 아닌데 이런 기회를 누리기에는 너무 과분하죠. 저쪽 분이 이 영광에는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나는 촬영장 한쪽에 서 있는 이형태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순간 손나윤의 얼굴빛이 흐려진다. 하지만 프로답게 금방 표정을 회복하고 웃어 보인다. 그러자 이형태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주 간단한 토스.
내겐 어차피 쓸모없는 것이었으니 자고로 이런 건 비싼 값에 사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는 게 제일이다.
바로 이렇게.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연락만 주시면 어떤 사건이든 한 번은 무료로 맡아 드릴 테니까 절대 부담 가지지 마시고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조앤윤 법률사무소 1회 무료이용권. 변호사와의 인연이야 쓸 일이 없는 게 최고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또 모르는 거니까.’
아무튼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