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5
5
005화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2)
내 이름은 김연수. 19세 여고생.
전국 모의고사 상위 1%.
오늘도 학교에 갇혀 문제 푸는 기계가 되어 있다.
시험 직전.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피곤에 찌들어 있는 얼굴들 뿐.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마지막으로 예상 문제 지문을 확인한다.
춘향이는 16세에 이몽룡을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했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겐 그넷줄이 보이지 않는다.
[위 시의 밑줄 친 부분에서 느껴지는 화자의 정서를 5어절로 서술하시오.] [2.7점]‘이런 곳에 갇혀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그네도 타 본 적이 없는데.’
머리가 알지 못하는 감각을 손은 알고 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과는 별개로, 내 손은 알아서 답을 적어낸다.
딩동댕-
이제 정말로 시험 시작이다.
지긋지긋한 시험, 시험, 시험······.
이젠 친구들 얼굴을 보면 이름보다 먼저 점수가 떠오르는 것 같다.
과연 내 얼굴 위에는 몇 점이 떠올라 있을까.
드르륵-
친구들의 얼굴에 피로, 초조, 불안이 떠오른다.
얼굴에 짜증을 한가득 새겨 넣은 국어선생이 들어와 인원을 체크하고 시험지를 정리한다.
괜스레 우울해진다.
‘언니! 언니! 언니! 나 이번에 60점 맞았다! 헤헹 아니 정확하게는 59점이지만! 밀려 쓴 것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60점 이상이라는 말씀!’
우울을 비집고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동생 연아.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지만 그동안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려 이젠 둘만 있으면 어색하기까지 한 사이.
어렸을 때는 같이 손을 잡고 슈퍼도 가고 노래도 불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우린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우연히 집에서 마주치더라도 말 한마디 없이 자기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리곤 했던 그 아이가 어제는 헤살거리는 웃음으로 나에게 달려와 말을 걸어 주었다.
너무 좋긴 하지만,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동생의 모습은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 같아 귀여웠다.
이런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하다니··· 금방이라도 두 팔로 꼬옥 껴안아 두 볼을 부비고 싶었으나,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연아가 겁이라도 날 것 같아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잘했네··· 공부 열심히 했나 봐?’
그러자 동생의 얼굴이 대번 굳어진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내가 뭘 또 잘못한 건가?
‘쳇, 됐네요. 준영 쌤만 있으면 언니 점수 금방 따라갈 수 있으니까!’
아니야··· 연아야 언니는 그런 게 아닌데. 널 무시하려던 게 아닌데······.
······.
그런데 준영이 누구지?
연아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며 밝게 웃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자 경계심과 호기심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쌤이라고 하는 걸 보면 학원 선생님들 중 한 명인 것 같은데··· 누구더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아 맞다 어제 학원에서!’
‘애들아 소개할게 여긴 우리 학원에서 중등부를 맡고 계시는 김준영 선생님. 다들 처음보지?’
학원 고등부 국어강사 중 하나인 박훈이 데려 왔던 사람의 이름이다.
시험이 코앞이라 미친 듯이 문제를 풀고 있던 아이들을 앞에 둔 그 사람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한 안색으로 교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 김 선생님이 너희들 시험 때문에 선생님을 좀 도와주시기로 했어. 그래서 오늘 수업은 선생님 한 시간, 김 선생님 한 시간 해서 내일 시험 예상문제 풀이 할 거야. 다들 괜찮지?’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박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묻자, 그제야 맨 앞자리에 있는 남자애 한명이 ‘예···’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옆에 선 남자가 차게 웃는 것이 보였다.
다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미친 듯이 연필을 돌리고 있는 와중이라 못 봤겠지만, 나는 그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을 엿볼 수 있었다.
뭐지 수업을 도와줄 정도로 친해보이지는 않는데? 무엇 때문에 고등부 수업에 중등부 선생이 들어온 걸까?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누구라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내신관리에 목숨을 건 아이들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설령 외계인이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기세였다.
‘자 애들아 이거 꼭 나오니까 다 풀고 오답체크도 해야 된다! 한 문제 틀릴 때마다 키 1cm씩 줄어든다는 각오로 풀어!’
박훈이 말했던 것처럼 첫 시간은 평소와 같이 진행됐다.
교실에 들어선 박훈은 방금 인쇄해온 따끈따끈한 A4용지의 산을 교탁 위에 턱하니 올려놓고, 철해 놓은 시험문제를 한 부씩 애들에게 나눠 주었다.
흉기로 쓰기에 충분한 두께의 종이뭉치 안에는 우리 학교 예상 문제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양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국어 시험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 않고서는 내줄 수 없는 양이다.
‘선생님 이거 너무 많은데요? 내일 국어 말고 수학이랑 한국사도 본단 말이에요!’
남자애들 중 한 명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외치자 다른 친구들도 웅성웅성거리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훈의 얼굴이 장승처럼 굳어졌다.
‘조용히 하고 풀어.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문제 많다고 징징거리게 되어 있어? 네가 힘들다고 한 문제 안 풀 동안 다른 독한 놈들이 한 문제 더 풀고 등급 올리는 거야. 너. 나중에 대학가서 펜 돌릴래? 아니면 공장가서 스패너 돌릴래?’
그리곤 칠판을 손바닥으로 탁탁치며,
‘불만 있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짐 챙겨서 나가. 열심히 공부하려는 다른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박훈은 예상했다는 듯 입술을 비틀곤 교탁 위에 서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에 반해 중등부 김준영 선생은 너무나 단출한 모습이었다.
‘안녕. 오늘 처음 보자마자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이거 풀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박훈의 시간이 끝나고 넉다운이 되어 있는 우리 앞에 나타난 그는 정말 산책이라도 가는 것처럼 종이 쪼가리 몇 장을 들고 털레털레 걸러 들어오더니, 들고 있던 것 두 장씩을 나눠 주었다.
한 장은 문제, 다른 한 장은 정답.
중등부 선생이 들어온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자료까지 이 따위로 만들어서 주니 아이들 얼굴에 순식간에 불만이 가득 찼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가 대기를 떠돌자, 준영이라는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 내일 시험 아니야? 왜 안 풀고 날 보고 있어? 다른 과목들도 본다며, 빨리 풀고 그거 공부해.’
그러자 아까 박훈에게 불만을 말했던 남자애가 시험지를 손끝으로 잡고 허공에 펄럭거렸다.
‘쌤 저희 학교는 이런 문제 안 나오는데요? 저희 쌤은 이의 제기 나올 거 같은 문제는 잘 안 내요.’
‘그래?’
‘네. 어려우면 아주 어렵고 쉬우면 엄청나게 쉬운 문제들만 나와서 저희도 고난도 문제들만 엄청 풀어야 점수가 나온다니까요. 이거 10번, 서정주의 ‘추천사’ 문제 같은 거요. 이런 문제는 손도 많이 가고 이의 신청도 많이 나오니까 안 나와요.’
말을 마친 남자애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녀석은 박훈에게 들었던 수모를 저 낯선 중등교사에게 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내려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10번. 다음 (가) 시의 화자가 지상적 세계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타당한 근거를 들어 설명하라. [3점]
분명 우리 학교 국어 선생 성향이라면 잘 내지 않을 문제이기는 했다.
그라면 상징적 시어인 ‘그네’의 의미를 묻거나, 이 시에 사상적 배경에 대해 묻는 문제를 객관식으로 내겠지.
이 문제의 경우 시적화자인 춘향이 지상적 세계에 대해 가지는 양가적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이 어떤 사상적 배경에서 촉발 되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다.
거기다 그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시 내부에서 찾아, 논리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온전히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내용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약술형 문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채점하는 선생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이의 제기가 들어올 법한 문제다.
언제나 화가 나 있는 국어선생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 사람이 이런 문제를 낼 리 없지.’
아무래도 저 준영이라는 중등부 국어 선생은 우리 학교의 내신 기출 스타일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아이들의 불만도 이해가 갔다.
‘그래? 정말 이런 문제는 안 나올 것 같단 말이지?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
그러나 저 준영이란 선생은 아이들의 시비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는 기색이다.
‘그럼 풀지 마.’
···애초에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하고 들어온 걸까?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씩 웃는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서늘해졌다.
그게 어제의 일이다.
* * *
그리고 시험 종료가 10분 남은 지금.
나는 어제 느꼈던 서늘함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된다.
‘문제가 거의 똑같아······.’
소름끼칠 정도로 비슷한 문제들이 시험에 나와 있었다.
특히 고난이도 문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더군다나 평소 국어선생 성향 상 절대 내지 않을, 그래 어제 나눠준 프린트의 10번 문제 같은 것까지도 뉘앙스만 다를 뿐 문장의 의미는 거의 똑같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제 그 강사가 보인 여유.
그것은 가르치길 포기한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미친 적중률!
절대적인 자신감이었던 것이다.
* * *
“걱정되나 봐?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봐줄 수도 있는데 어때?”
한 시라도 입을 열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는지, 박훈은 고등부 원생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내내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백색소음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지만, 이런 흑색소음은 사양이다.
“왜? 이번에도 연아처럼 될 것 같아서 그래?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거 같은데. 이번에는 진짜 연봉 몰빵이라고. 나는 원장님처럼 봐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자고로 병.먹.금. 병신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 법이라 했다.
나는 그저 입을 열어 한마디 했을 뿐이다.
“애들이 오는 것 같네요.”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던 여학생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어제 박훈의 수업에서 유독 눈에 띄던 학생. 연아의 친 언니이자 OO고등학교 전교 1등인 김연수였다.
“······!”
그런데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치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질 쳤다.
내가 뭘? 왜?
“어, 연수야! 그래 시험 잘 봤니?”
줄곧 스탠바이하고 있던 박훈이 반색하며 달려가 묻자, 김연수는 잠깐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다시 살피듯 나를 바라보았다.
“······.”
무언가 신기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모습. 경계하는 길고양이처럼 쌜쭉하게 가늘어진 눈이 신경 쓰인다.
자세히 보면 김연아랑 비슷하게 생긴 구석이 있었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누가 알려 주지 않으면 자매라고 생각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박훈에게 잡혀 있던 김연수는 이내 나를 스치듯 지나가 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원장실 문이 열리고, 상기된 얼굴의 원장이 걸어 나왔다.
김연수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상당히 업 되어 보인다.
“김준영 선생님, 박훈 선생님 마침 두 분 다 같이 계시는 군요. 잘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두 번 말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박훈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에게, 원장이 말했다.
“박훈 선생님. 고등부 일이 얼마나 힘든지 저도 잘 아니까 선생님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셨는지 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번 시험 결과나 학생들 반응이 조금······.”
박훈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 갔다.
“그래도 그동안 고생하셨으니까 중등부로 가셔서 잠시 쉬신다 생각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쉬시는 동안 김준영 선생님이 학생들을 잘 케어 하실 테니 걱정 마시구요.”
원장은 박훈의 등을 몇 번 토닥인 뒤 그대로 등을 돌려 원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서 있던 김연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자기 교실로 사라진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왜!?”
버퍼링이 끝난 박훈이 소리를 지르자, 막 이쪽으로 오려던 학생 두엇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왔던 길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 시험지! 시험지 어딨어! 얘들아! 오늘 본 시험지 가져와 봐!”
황급히 심판 콜을 하는 박훈.
턱-
나는 그런 박훈의 어깨를 짚은 채 말했다.
“440-910308-10307. 하나은행. 김준영.”
그리고 한 번 씩 웃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