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61
61
061화 도시 안의 섬 (1)
노량진.
본래 이름은 노들나루.
진(津)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한강을 오가는 조운선들의 잠시 쉬어 가던 나루터로 광나루, 삼밭나루, 동작나루, 양화나루와 함께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히던 수운 물류의 요지였다.
하지만.
한강 수운이 쇠퇴한 지금은 본래의 의미보다 다른 의미로 더 유명한 곳이다.
바로 무수하게 많은 학원들과 고시원들이 모여 있는 학원 도시로.
사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대입 학원가는 원래 종로 쪽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4대문 안에 대입 재수학원의 설립이 불가능해지면서, 기존에 있었던 학원들이 현재의 노량진으로 이전.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대입, 재수학원 이외의 여러 시험의 학원들이 노량진으로 몰려들면서 지금의 노량진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현재의 노량진역 반경 500m 안은 입시학원, 재수학원, 각종 공무원학원, 어학학원, 교사 임용 대비학원 등의 각종 시험대비 학원들.
그리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동안 머물 원룸과 고시원.
주린 배를 책임질 식당이나 카페.
공강 시간에 공부를 할 독서실이나 스터디룸까지.
그야말로 고시생을 위한 모든 시설이 완비되어 있는, ‘도시 안의 섬’이라고 명칭에 걸맞는 곳이 되었다.
때문에 노량진 바깥사람들은 노량진 안쪽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
바로 ‘공시족’이라는 이름으로.
“······.”
사실 지금까지 재수나 공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노량진이라고 하면 막연히 고요하고 긴박감 넘치는 분위기가 감돌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 본 노량진의 풍경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인도를 지나는 사람들과 길가에 즐비한 식당, PC방, 노래방, 술집들까지.
흔히 볼 수 있는 번화가의 풍경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저 역 주변에 학원의 이름이 붙은 거대한 건물이 많다는 것 정도가 다른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노량진의 겉껍질에 불과했다.
내가 노량진 깊은 곳을 향해 차를 몰아갈수록, 노량진 역 근처에서 보였던 번화한 풍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내가 생각했었던 노량진의 모습과 비슷한 분위기의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편한 복장으로 커다란 가방을 맨 채 뭔가를 중얼거리며 걷는 사람이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은박지에 싼 김밥 한 줄을 우물거리고 있는 사람, 학원 건물 밖에 줄을 선 채로 벽에 기대 졸고 있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내 차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부웅-
내 차가 지나가면 으레 시선 몇 개가 따라붙기 마련.
하지만 이곳 노량진에는 워낙에 비싼 차가 많아서인지 별로 남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렇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바로.
종각스쿨 노량진점.
전에 내게 연락해 왔던 종각엠스쿨의 모학원으로, 학력고사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갖은 부침을 겪고 살아남은 입시 시장의 산증인 격인 학원이었다.
물론 2000년도 이후 노량진 내의 패권이 공시 학원들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재학생 대입은 강남 쪽이 주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N수생은 역시 노량진.
노량진에서도 종각스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뭐 비슷한 급으로 데성학원이나 맥아(麥芽)스터디, 비타아듀, 전진학원 등이 있었지만, 역사와 전통으로 따지면 다른 학원들과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학원이었다.
“······.”
아무래도 내가 경험했던 학원들과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학원인 만큼 다른 때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원래 있던 학원에 집중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만 남을 수도 있었으니까.
‘뭐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나는 오래간만에 주머니 속에 있는 USB를 꽉 움켜쥐었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일반 학원보다 더 쉬울 것 같기도 했다.
내신이다 뭐다 신경 쓸 것들이 많은 일반 학원에 비해, 재수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은 오로지······.
“수능 점수지.”
단 한 가지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다.
살짝 두근거리던 내 심장이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이내 안내음이 울렸다.
끼익-
천천히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그때.
“잠시만요! 잠시만. 사람 들어가요. 사람. 에헤이 좀 잡아 줘요!”
이제 막 닫히려는 문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 나왔다.
그러자 닫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고 한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공교롭게도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엉? 영준 쌤?”
전전 학원에서 나와 5년간 얼굴을 마주했던 국어강사 박훈이었다.
‘영준이는 누구냐.’
나는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거의 다 닫혀 가던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었다.
“잘됐다. 잠깐만 잡아 줘요. 차에서 뭐 좀 가져올 게 있어서.”
그리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
막무가내인 성격은 여전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 * *
“아니 왜 안 잡아 주셨어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박훈이 내게 구시렁거렸다.
그러자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 몇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슬쩍 학원 내부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역시 대형학원은 대형학원인지 시설이나 규모면에서 일반 학원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편이라 이것저것 볼 것이 많아 발걸음을 늦췄던 게 문제였다.
잠시 발걸음을 늦추자마자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박훈이 다짜고짜 달라붙어 아까부터 계속 조잘거리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어떤 버튼인지 몰라서.”
정말이다. ‘닫힘’을 눌러야 닫히는지 ‘열림’을 눌러야 닫히는지 순간 헛갈릴 수도 있는 거니까.
내 변명을 들은 박훈이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참는다, 참아.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설마 이제 와서 다시 재수한다는 건 아닐 테고.”
그러더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는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알겠다. 요즘에 직원들 뽑는다는데 그거 지원하러 온 거 맞죠?”
그리곤 제 추측을 맞을 것이라는 듯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박훈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어 그럼 뭐지? 조교? 아니 조교 자리는 다 찼을 텐데? 에이 우리 사이에 숨기지 좀 말고 말해 봐요.”
사실 이쯤 되니 솔직히 좀 귀찮았다. 애초에 그리 좋은 사이도 아니었는데,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아까부터 계속 친한 척을 하면서 자꾸 질문을 던져 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내가 말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 나야 뭐 여기서 수업하죠. 강사가 학원에서 수업 말고 또 뭘 하겠어요?”
그리곤 싱긋 웃으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지속한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폼이 누가 보면 1타 강사인 줄 알겠다.
“뭐 그냥 종합반이긴 한데, 가끔 뭐 인강도 찍고 그러는 거죠 뭐. 에이 이거 별거 아니에요. 다들 하는 거 하는 거지.”
그리곤 내가 물어보지 않은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주르륵 이야기한다.
그러다 가끔씩 내가 고개를 끄덕거려 주기라도 하면, 더 신이 나서 이 학원에 학생 수가 몇이라느니, 자신이 그중 몇을 맡고 있다느니, 종합반은 신경 쓸 게 많은데 자신은 능력이 돼서 괜찮다느니 하는 말들을 정말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나만 믿고 따라와요. 내가 이 학원은 그냥 아주 막 빠꼼하게 잡고 있으니까.”
말을 마친 그가 어떠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뭔가 대답을 바라는 눈치다.
“그러시구나.”
내가 대충 대답하자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어요? 혹시 전에 있던 학원 사람들이랑 연락해요?”
그리곤 이제 내 차례라는 듯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동료들을 챙길 것 같은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네. 선생님은요?”
살짝 의문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떨떠름한 웃음을 짓는다.
“아··· 나도 연락은 하죠. 그런데 음, 연락이 잘 안 되는 사람이 좀 있어서···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은솔 쌤 연락돼요? 아니 뭐 안 되면 말고.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뭐. 쌤도 안 되죠?”
역시.
어쩐지 안 어울리게 다른 사람들 소식을 묻는다 했다. 그 전 학원에 있을 때부터 은솔에게 집적거리더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는 그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은솔과 같이 일하고 있다는 말을 하겠지만, 굳이 박훈에게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연락은 하죠. 가끔.”
그러니 그저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러자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진짜요? 이야 그럼 우리 같이 한번 좀 보죠? 옛 동료들끼리 추억이나 살릴 겸.”
그리곤 은근슬쩍 ‘우리’라는 카테고리에 나를 끼워 넣는다.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안 된다고 정색할 필요도 없었다.
“뭐, 나중에 시간 맞으면요.”
내가 말하자 박훈의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당장 내일 약속을 잡자고 말할 것 같은 얼굴이다.
박훈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교무실 앞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복도 한가운데 가만히 멈춰 서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기다려 주거나 할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끼익-
그러자.
“앗 선생님. 잠깐만요! 거기 막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
등 뒤에서 박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기가 말하면 내가 멈출 것이라 생각했는가 보다. 딱히 잡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박훈은 한 마디를 더 이었다.
“그 교무실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진짜’거든요. 문 닫는 소리에도 예민하신 분들이 많아서 함부로 심기 거스르면 안 돼요. 뭐 알바 오신 거면 제가 가서 말씀 드리고······.”
‘진짜’라.
살다보니 박훈에게서 이렇게 인정을 받는 날도 다 오네. 세상 참 더 살고 볼 일이다.
삐걱-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
교무실 안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집중된다.
뒤에 있던 박훈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는 것쯤은 보지 않아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