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65
65
065화 아이스 브레이킹 (3)
천천히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었다.
라면 건더기가 달라붙어 있는 정수기를 지나 학생들의 이름이 줄줄이 박혀 있는 사물함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찰칵-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강의실 안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수십 쌍의 눈동자에 깃든 수십 개의 감정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불안. 얼마간의 초조, 희미한 열망과 아스라한 기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들이 보이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강의실 안을 떠돌았다.
저벅. 저벅.
한 발, 한 발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학생들의 숨소리가 잡힐 듯 가까워졌다.
탁-
교탁 위에 들고 온 서류봉투를 내려놓았다.
얇게 내려앉아 있던 분필가루가 한순간 훅 하고 퍼져 나갔다.
그러자 학생들의 시선이 교탁으로 향했다.
싸구려 서류 봉투.
100g도 채 안 되는 서류 봉투를 학생들은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시험 잘 봤어?”
그러자 학생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의 색으로 물들었다.
어제, 7월 모의고사 대비해 6월 모의고사와 비슷한 난이도로 시험을 치룬 참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6월 모의고사의 잔재를 걷어내기 위해 학생들과 내가 노력했던 만큼, 이번에야말로 6월 모의고사의 악몽을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남학생이나.
세상을 다 산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장수생.
얼굴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재수생과.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여학생까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학생들을 보니, 어제 봤던 시험을 어렵게 느꼈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하긴. 요즘 모의고사 출제 경향대로 한 선지에 문제 전체가 갈리는 애매한 문제들이나 지엽적인 것들을 물어보는 문제들이 출제 되었으니 학생들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나간 시험을 곱씹으며 우울해할 순 없었다.
“자자 다들 기운 차려. 내일 모의고사 때 잘 보면 되지.”
내가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7월 모의고사 전날.
수능이 135일 남은 날이었다.
어제 봤던 시험도 결국 내일 있을 7월 모의고사를 위했던 것이니 만큼, 이미 지나간 시험에 일희일비 할 시간은 없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내일로 다가온 모의고사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았다.
“자, 일단 어제 본 시험 답지 나눠 줄 거니까 각자 채점해 봐. 모의고사 대비는 그 다음에 하자.”
서류 봉투의 봉인을 풀면서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표정으로 답안지를 바라보았다.
답을 맞춰 본다고 하니 새삼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
내가 학생들에게 어제 본 시험의 답안지를 넘겨주자.
강의실 안이 곧 시험지 넘기는 소리와 학생들의 숨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나눠 줄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후우-
젠장-
아-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강의실이 워낙 조용해서 맨 앞에 있었던 나에게까지 들렸다.
나는 정리하던 것을 교탁에 놓고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학생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학생들 대부분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가시에 찔린 것 같은 표정으로 시험지를 뒤적거리며, 한 문제를 채점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 듯 지성 형님의 말이 떠올랐다.
‘재수 학원가면 수업 말고 다른 것들도 잘 케어해 줘야 할 거야. 진짜 바람만 불어도 바로 화가 나고 멀쩡하게 밥 먹다가도 눈물 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거든, 그런 사람들 데리고 수업하려면 가끔은 수업 말고 다른 일에도 신경을 꺼야해. 그러니까 그럴 땐···“
내가 재수학원에 출강한다고 했을 때 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해준 조언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설마 그런 방법까지 사용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쯤 되니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학생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대로 내일 모의고사를 보면 아마 큰일 날 것 같았으니까.
나는 지성형님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그만.”
내가 말했다.
방금 전까지 얼굴 찌푸리고 있던 학생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시험지 덮어봐.”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순순히 내 말에 따라 시험지를 덮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어?”
순간, 학생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갑자기 뭐지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 반. 일단 들어는 드릴게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반이었다.
음. 이쯤 되자 약간 쎄하긴 한데 그래도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눈 딱 감고 지성형님의 조언을 따르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가 꽃이 아니라고 착각하지 마라.
남들이 피지 않았다고 해서 남들이 꽃이 아니라고 여기지도 말아라.
내가 피었다고 해서 나만 꽃이라 생각하지 말고.
남들이 피었다고 해서 나만 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우리는 모두 꽃이다.”
막상 준비했던 멘트를 읊다 보니 중간에 ‘아차’ 싶었다.
책으로 볼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입으로 이야기하고 보니 어마어마하게 오글거리는 멘트였다는 걸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읊었을 때부터 내 눈은 이미 강의실 맨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학생들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지성 형님에게 원망이 들었다.
혹시 나를 수치사 시키려는 지성 형님의 음모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어쨌든 이미 입을 연 이상 뭔가 있어보여야 했으니까.
그런데.
응?
예상 외로 그들의 반응이 격렬하다?
슬쩍 눈을 내려 학생들을 바라보니.
잔뜩 흐린 얼굴로 눈물을 참고 있는 학생이나.
안경을 올린 채 눈가를 부비는 학생.
소리를 죽인 채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학생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사실 그들에게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재수생이 아니었다면 오글거린다고 비웃었을 법한 말이었다.
일단 읊는 나부터가 중간부터 오글거렸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오글거리는 말이 그들에게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이름,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다들 비슷하게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오죽 마음 기댈 데가 없으면 이런 말에도 저렇게 쉽게 눈물이 날까.
그들의 안쓰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눈물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눈물로 인생을 만들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
“꿈은 이루기 힘들지. 맞아. 분명 비단길은 아니야. 아마 자갈밭이거나 가시밭에 가까울 거야.
이쯤에서 호흡을 한번 골랐다.
“그러니까 조금만 힘을 내자.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것도 아주 확실한 방법으로.”
그러자.
“어떻게요?”
남학생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자세히 보니 어제 피시방에 갔다가 나에게 혼이 났던 학생이었다.
그는 약간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서류 봉투 안에서 일단의 문제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학생들에게 보이며 입을 열었다.
“바로 이걸로.”
내가 서류봉투에서 꺼낸 문제지 위에는.
[7월 모의고사 언어영역 예상문제]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 * *
“쌤! 감사합니다! 충성충성충성.”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엊그제 우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던 그 학생이었다.
그는 막 가채점을 마친 따끈따끈한 시험지를 들고 내게 말했다.
“가채점 했는데 이번에 대박이에요!”
그리곤 이젠 1등급도 두렵지 않다느니, 목표로 했던 대학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느니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쩍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기분 내지 말고. 어차피 수능 전까진 연습이다 생각해. 알았지?”
그러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남은 시간 동안 저도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할 거예요.”
그리곤 입가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예상 문제 있잖아요? 이번에 고난도 문제들은 거기 다 나왔던 문제들이던데···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무래도 신기하다는 투였다.
나는 슬쩍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실력이지. 뭐 별다를 게 있겠어?”
그러자 그가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해도 다 좋다는 눈치였다.
“넵 그렇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그리곤 나에게 인사를 하고 독서실로 사라졌다.
“······.”
드디어 7월 모의고사가 끝났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결과도 아주 좋았다.
복도나 교무실에서 마주친 학생들이 나에게 말해 준 점수들을 들어보니, 6월 모의고사 따위는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점수 대였다.
예상 문제지에 고난도 문제 몇 개만 섞어 놓은 것 치고는 괜찮은 결과였다.
“······.”
사실 처음엔 모의고사 예상 문제지에 고난도 문제를 섞어 놓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재수학원에선 모의고사의 점수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보는 모의고사 점수가 학생들의 사기를 좌우한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학생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약간의 조력 정도는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예상했던 것처럼 학생들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6월 모의고사를 보고 난 다음의 학생들 표정이 폭락 이후의 암호화폐 보유자라면, 7월 모의고사를 보고난 다음의 학생들 표정은 그 반대였으니까.
게다가.
‘김 선생님. 오신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이거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벌써 소문을 퍼졌는지 본부장이나 학원 관계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이런 말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대화의 끝을.
‘지금 바로 계약서 꾸밀까요?’
계약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올해 수능이 오기 전에 내년 계약서까지 서둘러 체결해 버리고 싶은 것 같았다.
물론 그때마다 난처한 얼굴로 미루고 있었지만 점점 거절하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학생들을 건져 내면서 내 이름값까지 올리는 일석이조의 기회였으니까.
때문에 교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느 때 보다 더 가벼웠다.
그런데 그때.
맞은편 모퉁이에서 누군가 튀어 나왔다.
아직 앳돼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내 쪽으로 달려드는 그녀를 피하려 몸을 틀었다.
하지만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워 아무리 봐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둘 다 넘어질 기세.
어쩔 수 없이 다리를 굳게 세우고 그녀를 두 팔로 받쳤다.
그러자.
“꺄악!”
내 쪽으로 쓰러진 그녀를 가까스로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저기 괜찮아요?”
내가 묻자 내 팔에 안긴 꼴이 된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하얀 얼굴로 나를 바로 보는 그 모습이 마치 작은 눈송이 같았다.
나는 팔에 힘을 주어 그녀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 섰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녀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말했다. 고개를 푹 수그린 모습이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내가 넘어진 것도 아니었으니 이제 와서 그녀에게 뭐라 할 것은 없었다.
“그럴 수도 있죠. 우리 학원 학생 같은데 학원 바닥 대리석이라 미끄러우니까 앞으론 천천히 다녀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학생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방금 전까지 부끄러움과 당황이 뒤섞여 있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휴, 네 그럴게요. 그럼 이만.”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
그런데.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얼굴을 익힌 사람들은 대부분 내 강의를 듣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까 그녀는 분명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그러자.
‘아 모의고사 볼 때.’
갑자기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