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67
67
067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2)
“아린 언니. 언니는 누가 제일 나아요?”
누군가 이아린을 불렀다.
돌아보니.
같은 줄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 몇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색색깔의 츄리닝을 걸치고 이아린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만화영화의 주인공들 같았다.
“응? 무슨 이야기야?”
이아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여학생들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언니가 보기에 이 강의실에서 누가 제일 나아 보여요?”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노량진 고시식당 짬밥 3년 차인 이아린은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마 누가 제일 잘생겼냐는 말이겠지.’
그러자 이아린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제 한창 이런 이야기가 오갈 시기였다.
재수생 1년 차.
그리고 이제 막 7월에 접어드는 기간.
두렵기만 했던 재수 생활도 이제 익숙해지고, 날도 따뜻하다 못해 더워지는 시기였다.
그러니 한창 때의 젊은 남녀들에게서 나온 이야기란 사실 뻔했다.
“음?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여학생들이 김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언니 다들 말했는데 치사하게! 혹시 이미 사귀는 사람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까 맨 뒷자리에 앉던 키 큰 오빠가 맨날 언니 쳐다보던데 설마?”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배신자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아린은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들의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4수를 하면서 잃어버린 발랄함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학원 내에 무슨 소문이 퍼질지 뻔했다.
그러니 지금 아니라고 단단히 말해 두어야 했다.
그녀가 여학생들에게 막 말을 하려는 순간.
“야 언니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하겠어. 23살이랑 20살이랑 사귀는 게 말이 되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1,500원짜리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올 널디 샀는데? 얼마임? 색깔 이쁘다.”
그녀의 등장에 여학생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새빨간 트레이닝 복에 무슨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여학생들이 꺅꺅거리며 널디를 입은 학생을 둘러쌌다.
“얼마 안 해. 99,900원 정도?”
그녀가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이아린을 바라보는 폼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야 넌 누가 제일 나아?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
여학생들 중 하나가 널디녀에게 물었다.
이아린에게 질문을 던졌던 학생이었다.
그러자 옷에 정신이 팔려있던 여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 남자들 중에? 한 사람밖에 없지 않아?”
널디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누구?”
질문을 던졌던 여학생이 다시 채근했다.
널디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김준영 있잖아. 그 사람이 제일 나은 거 같던데? 아니야?”
그러자 여학생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준영 쌤이 있었네?”
질문을 던졌던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었던 학생들 중 하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야 그런데 이거 반칙 아니야? 너무 게임이 안 되잖아. 애초에 그 사람은 선생인데?”
그러자 널디녀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네가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라며. 선생이니까 강의실에 있는 사람 맞잖아.”
“그러네.”
“아무튼 난 그 사람이 제일 나아. 키도 크고 얼굴도 그만하면 괜찮고 어깨도 뭐···나쁘지 않아. 만나 달라고 하면 뭐 만나 줄 의향은 있어.”
널디녀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널디녀가 이아린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웃는 모습이 잠자리 날개를 찢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나저나 언니. 이번 모의고사는 잘 봤어요?”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평소에 이아린과 직접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뭐 그렇다고 숨길만한 것은 아니었다.
“응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아. 넌?”
이아린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널디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런데 언니 혹시 몇 등급인지 물어봐도 돼요?”
이번에는 이아린도 약간 당황했다.
이렇게 디테일하게 점수를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등급? 1 2 2 1 인데?”
이아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널디녀가 해맑게 웃는 얼굴로.
“어 생각보다 점수가 높네요? 그런데 언니 왜 4수 하셨어요?”
이아린의 가슴에 유리조각을 박아 넣었다.
순간, 이아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널디녀를 제외한 주변 여학생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4수’
이아린의 가슴에 깊게 박혀 있는 글씨.
주홍색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아픔 이름이었다.
아이린은 생각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을까.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
그러자.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넌 내 인생의 실수다.’
무거운 목소리.
언제나 두려워했던.
‘소도 20년을 키우면 알아서 주인이 좋아하는 길을 찾아 가는데, 너는 이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내 앞에 앞서서 나간 적이 없구나. 그래 서율대 가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니?’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국회의원 자식이 지잡대 간다는 거. 난 절대 인정 못하니까. 서율대 못가겠으면 유학을 가던지 아니면 아버지가 정해준 사람이랑 결혼이나 해.’
그녀가 처음 대학을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혹시 서율대를 가면 좀 나아질까 싶어 그 이후로도 계속 도전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부할 때는 그럭저럭 점수가 나왔지만 시험을 봤다 하면 성적이 우수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서율대 가려고. 그런데 거기가 좀 힘들잖아.”
그녀가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 맞다. 그랬었죠. 미안해요, 언니.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이번에는 꼭 붙으실 거예요.”
널디녀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하게 굳어 버린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 사과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어머, 언니 화장 정말 잘 먹었다.”
여학생 하나가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갑자기 이아린의 얼굴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때다 싶은 여학생들이 너도나도 말을 내뱉었다.
“파데 어디 꺼 써요? 으 나도 화장 잘 하고 싶은데.”
“이년아 너는 본판이 문제야. 언니는 얼굴이 받쳐주잖아.”
“헐 너도 만만치 않거든?”
여학생들의 살을 깎는 만담 덕분에 이아린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맺혔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학생 한 명이 널디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널디녀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언니 아침에 화장할 시간도 있어요?”
순간, 만담을 내뱉던 여학생들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 * *
‘야 너 언니한테 왜 그래.’
‘내가 뭘.’
‘아니 너무 공격적이잖아. 얼마나 민망한지 알아? 도대체 왜 그래.’
‘재수 없잖아. 남들은 부모님한테 손 벌려 가면서 츄리닝 입고 다니는데 4수생 주제에 맨날 풀메하고 원피스 입고 다니는 게 말이 돼?’
강의실 밖에서 여학생들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일이 있은 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여학생들이 커피를 마시러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한 후였다.
빈 강의실에 혼자 남은 이아린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검은 눈물이 책상에 툭 떨어져 내렸다.
화장품이 섞여 있는 눈물이었다.
‘화장’
원래 이아린은 화장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화장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이 풀메이크업을 하고 다닐 때에도 틴트 하나 제대로 바를 줄 몰랐었다.
그러니 학창시절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맨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재수생이 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2번째 수능을 망치고 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무렵.
우연히 본 상가 유리창에서 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았다.
자기 몸보다 더 두꺼운 교재를 들고, 김치국물이 묻어 있는 초라한 츄리닝을 입고 있는 여자.
하얗게 질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때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모습이 너무 초라했으니까.
너무나 불쌍해 보였으니까.
그때부터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화장을 한 뒤, 제일 예쁜 옷을 입고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주르륵-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떨어진 눈물방울을 밟으며 그녀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감춰 주던 화장을 다 씻어 냈다.
그리곤 화장실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2년 전 보았던 초라한 여자가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마치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 앞에 선 것과 같이 손발이 덜덜 떨렸다.
숨는 것에 중독이 된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강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꺄악.”
누군가와 부딪쳤다.
정신없이 달리던 중이라 일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렇게 곧 딱딱한 대리석에 넘어질 것이라 생각한 그녀가 눈을 감는 그 순간.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저기 괜찮아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 *
“집중! 이제 수능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알았지?”
“넵! 준비됐습니다!”
“좋아. 그 자세 그대로 가즈아!”
강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의에 집중하지 못한 채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강의를 하고 있는 김준영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녀와 김준영이 부딪쳤던 날.
‘···우리 학원 학생 같은데 학원 바닥 대리석이라 미끄러우니까 앞으론 천천히 다녀요.’
김준영이 던진 그 말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때의 그가.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화장하기 전과 후가 많이 차이가 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김준영이 자신을 못 알아볼 줄은 몰랐었다.
그녀가 맨 뒤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쯤에, 그것도 앞쪽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으니,
처음엔 혹시라도 그가 알아보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준영은 바로 눈앞에서도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둔한 건가?’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 모의고사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모의고사를 보던 날.
아버지에게 보여 줄 모의고사 성적표를 위해 평소처럼 컨닝을 하던 날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날도 준영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것은.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가 꽃이 아니라고 착각하지 마라···’
준영이 전날 했던 말 때문에 그녀가 컨닝에 집중하지 못했던 때의 일이었다.
사실 그녀는 준영이 했던 말과 비슷한 말들은 많이 들어 봤었다.
그동안 그녀가 만나봤던 학원 강사들 중에서도 재수생들의 감성을 살짝살짝 건드리며, 자신의 수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과 준영은 달랐다.
다른 강사들의 경우 자신의 모자란 능력을 가리기 위해 재수생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데 반해.
준영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위해 그런 말을 던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준영이 던진 말은 말라 버렸던 그녀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때문에 ‘꽃’이 되기 위해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그녀는 준영이 감독으로 들어온 그날, 평소와 달리 어설픈 컨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 또한 아버지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나마 다른 때와 다르게 컨닝을 할까 말까 갈등을 했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서 컨능을 하면서도 그녀는 감독을 맡고 있는 준영에게 걸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해도 그날의 컨닝은 엄청나게 어설픈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준영은 자신의 어설픈 컨닝을 잡아 내지 못했다.
“하아.”
이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 혼자 이러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녀를 고민하게 만든 준영은 지금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신나게 강의를 하고 있었으니까.
‘바보같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준영의 얼굴을 보며 강의를 들을 자신도 없었다.
감명받았던 사람의 앞에서 컨닝을 하던 자신도 부끄럽고, 그런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서운해하던 자신도 우스웠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강의가 끝나고 준영이 나갈 때까지 책상을 바라보면서 견뎌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에 순식간에 어그러졌다.
강의가 끝난 후.
준영이 나가길 기다리던 그녀의 귓가에.
“이아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환하게 웃고 있는 준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