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74
74
074화 역사를 잊은 아이돌에게 미래는 없다 (2)
“선생님 어떠신가요?”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내가 내게 물었다.
고저의 차가 거의 없는 정중한 어조였다.
나는 천천히 사내를 모습을 살펴보았다.
얼굴의 윤곽이 뚜렷한 남성적인 얼굴.
근래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천천히 살펴본 사내의 모습은 한 마디로.
‘곰이네.’
그것도 화를 참고 있는 어미 곰 같았다.
사실 나도 어디 가서 작은 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는데, 그의 앞에 서니 오랜만에 내가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저녁 11시가 넘어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으니, 내가 오해를 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나였으니 깜짝 놀란 정도로 넘어갔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했을 만한 비주얼이었으니까.
‘아니 소리부터 먼저 쳤을라나?’
그래도 그가 유리창 밖에서 나를 바라볼 뿐, 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하지만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문을 연 내게, 그가 뱉은 첫 마디는 정말 뜻밖이었다.
‘선생님. 저희 나윤이 좀 살려 주십시오.’
응?
그리고 그는 내가 채 말릴 새도 없이,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 허리를 숙여 버렸다.
내가 깜짝 놀라 바로 만류하려 했지만.
‘이게 돌덩어리야? 근육이야?’
아무리 용을 써도 요지부동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약간이나마 부끄러움이 들 정도의 차이였다.
‘운동이라도 좀 해야 하나?’
요즘 너무 바빠서 자기관리에 소홀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나름 운동을 열심히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는 내가 ‘나윤이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 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그런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 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하지만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터라 단박에 기억이 나진 않았다.
‘나윤?’
그러고 보니 그가 한 말 중에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나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퍼블벨벳 ‘손나윤’밖에 없었으니까.
그러자 천천히 그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백인지적을 촬영할 당시 손나윤이 말실수를 하자마자 PD에게 달려가던 사내의 모습이.
내가 손나윤의 포옹을 거부하자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의 모습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내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자 대충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나는 슬쩍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이러시면 저 거절할 겁니다?’
내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허리가 펴졌다.
그 기세가 얼마나 매서운지, 순간 학원 안에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달칵-
나는 내 몫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는 입맛에 맞으신가요?”
그러자 묵묵하게 앉아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네. 요즘에 생각할 게 좀 많아서 신경이 좀 날카로웠는데, 달달한 게 들어가니 좀 풀리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불쑥 찾아와 제 소개도 없이 대뜸 부탁했는데, 이렇게 대접도 해 주시고 정말······.”
그는 진중한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달콤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나나 그처럼 피로를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커피나 녹차보다 이런 코코아가 제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 학원 문 앞에서 보았을 때보다 그의 표정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좀 전의 그가 굶주린 어미 곰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꿀 퍼먹은 새끼 곰 같았으니까.
“···그런데 선생님 대답은···?”
하지만 달콤함에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 듯, 그가 나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슬쩍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음 일단, 왜 저한테 손나윤 씨 한국사 강의를 부탁한 건지 듣고 싶은데요? 그쪽 사정은 잘 알겠지만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내가 묻자 그가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 게 이해가 가지 않으시죠?”
그가 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내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앉았을 때에는 넓어 보이던 소파가 그가 앉으니 왠지 작아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꼭 저여야 하죠? 다른 분들도 많은데?”
그러자 그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른 분들은···안 됩니다. 절대로.”
그가 묵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직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믿음이 갔다.
적어도 허언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일의 가부를 판단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으니까.
“그 이유가 꼭 알고 싶은데요?”
내가 웃는 얼굴로 묻자, 그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코코아 잔 위로 피어오르던 김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무거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 *
“···그러니 선생님이 꼭 해 주셔야···이대로라면 회사 차원에서도 다른 멤버들을 위해서···나윤이를······.”
여기까지 말한 그가 차마 뒷말을 입에 담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흐렸다.
하지만 쉽게 그가 말하지 못한 뒷말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탈퇴··· 아니 퇴출이겠지.’
그와 그녀가 있는 곳이 바로 아마존 정글보다 더 치열한 연예계이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연예인 지망생 100만 시대.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새로운 별이 뜨는 곳.
그곳이 바로 연예계였다.
그러니 그 안에 상처 입은 ‘별’이 남아 있을 자리는 없다고 봐야했다.
그 별의 자리는 금세 다른 별이 차지할 테니까.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왜 이렇게 비밀리에 나를 찾아왔는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회사 입장에선 수익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마무리해 보려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저를 뭘 믿고 이렇게 이야기해 주시는 거죠? 제가 손나윤 씨를 잘 가르칠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게다가 전 국어 선생인데요.”
그러자 그가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는 폼이 뭔가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선생님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까 작년 수능 만점자 출신이시더라고요. 게다가 선생님 강의도 다 찾아봤는데 음···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제가 책 읽는 걸 좀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저한테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걸 보니까 실력이야 확실하긴 것 같고···”
그러더니 그가 슬쩍 내 눈치를 본다.
그로서는 의도야 어쨌든 나에 대한 사찰을 한 것일 테니, 내 표정이 어떤지 살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차피 인터넷만 살짝 검색해도 수두룩 빽빽하게 나올만한 자료들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화를 낸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웠다.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가 선생님을 믿는 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천천히 말을 잇는다.
“바로 그날 선생님의 초인적인 자제력을 봤으니까요.”
응?
순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초인적인 자제력?’
그게 이유라면 황당한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그의 앞에서 초인적인 자제력을 보여 준 일이 있었나 싶었다.
나와 그가 마주친 적은 ‘백인지적’을 제외하고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얼굴 가득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에게 물었다.
“제가요? 언제?”
그러자 그가 틀림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분명히 봤습니다. 그날 백인지적 촬영장에서.”
“···???”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때 촬영 끝나고 나서 선생님께서···”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그걸 가지고 ‘초인적인 자제력’어쩌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맞다면 이 사람 정말 어마어마한···
“기억나신 것 같네요. 맞습니다. 선생님이 나윤이의 ‘포옹’을 거절했을 때부터 저는 선생님이 믿을 만한 분이라는 걸 확신했거든요. 설마하니 나윤이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는데, 그날 정말···”
···팔불출이다.
그는 그 후로도 잠시 손나윤이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착한지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 선생님이시라면 믿고 나윤이를 맡겨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절절한 손나윤 예찬이 끝나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생긴 건 뭐 ‘세기말 최종보스’처럼 생겨서 저런 말들을······.
내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내 표정을 오해한 듯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제안을 드린다는 게 어쩌다 보니 제 한풀이가 된 것 같네요. 그럼 저희 측 제안을 먼저 들어보시죠. 그 다음에 결정을 내리셔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구비했던 서류들을 내 앞쪽으로 밀어 넣었다.
“사실 제가 태블릿을 잘 못써서···자 일단 여기 보시면 선생님이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셨을 때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나는 천천히 그가 내민 서류들을 읽어 보았다.
그러자 나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쪽의 제안을 보니 그들이 얼마만큼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 일단 선생님이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지금부터 10월 말, 한국사능력검정 시험 때까지 한 달 500만 원의 강의료를 기본으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0월 시험에서 나윤이가 한국사 1급을 취득하면, 저희가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1,000만 원을 일시불로 드릴 계획입니다. 어떠신가요?”
그리곤 제법 자신감 있는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 달 정도 시험을 준비하고 치러도 웬만큼 점수가 나오기 때문에, 그가 제안한 내용대로라면 사실 많이 오버해서 제안한 거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일반 한국사 강사라면 눈에 그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콜’을 외칠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다른 건 없나요? 돈은 지금도 충분히 벌고 있거든요. 만약 제가 손나윤 씨 수업을 맡으면, 준비하는 시간까지 온전히 손나윤 씨만을 위해 소모하는 시간일 텐데, 이 정도 금액으로는 그 시간을 소모할 가치가 없어 보여서요.”
그건 그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거고.
솔직히 지금 그 시간에 다른 걸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손나윤 측에서 제안한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저 정도의 금액은 내 전공인 국어와 연계도 쉽지 않은 한국사 강의에 전력을 쏟을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러자 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었는지 그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프로답게 금세 표정을 회복하고 나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따로 원하시는 금액이 있나요? 저희가 최대한 맞춰 보겠습니다.”
의외였다.
이미 그가 손나윤과 스텔라리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였을 때,
연차가 제법 쌓인 매니저인 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자의적으로 교섭권을 가질 정도의 위치에 있는 줄은 몰랐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원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물론 손나윤의 처지도 딱하고 그녀를 생각하는 사내의 마음 씀씀이도 감동적이었지만, 이미 나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만큼 더 이상 다른 일을 추가할 수는 없었으니까.
동정심에 일을 하다간 그르치기 십상이다.
누가 그러지 않았나, 연예인 걱정이 제일 쓸모없는 걱정이라고.
하지만.
그가 교섭권을 가지고 있다면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
확실히 얻어 갈 게 있다면 얻어 가는 게 맞았다.
지금으로선 오직 그들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
나는 슬쩍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돈 말고 다른 것도 될까요?”
그러자 그가 단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석고대죄를 해서라도 성사 시킬 테니, 호랑이를 잡아 오라는 것만 아니면 다 맞춰 드리겠습니다.”
음, 어미 곰 대 호랑이라 재미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었다.
만일 저쪽에서 이것만 받아들인다면, 수업료 얼마 더 받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을 테니까.
나를 바라보며 기대어린 눈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