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86
86
086화 마지막 수능 (5)
“으아, 벌써 끝났어!”
교무실 소파에 앉아 있던 김연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교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김연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연아야? 무슨 일이야?”
지성 형님이 묻자, 김연아가 울상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쌤, 레전드편 벌써 끝났어요.”
교무실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영 뜬금없는 말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전후사정을 알고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김연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가 보고 있던 태블릿PC를 손에 들었다.
[무한도전 236회 동계올림픽 국가대표들]2011년도에 방송되었던 예능 방송이었다.
“벌써 다 봤어?”
내가 묻자.
끄덕끄덕-
“당연하죠!”
녀석이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다른 화를 틀어 달라고 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인터넷에서 레전드로 일컬어지는 화를 전부 다 구매해 둔 상태라 부담될 건 없었다.
김연아가 원하는 데로 재미있는 회차를 찾은 뒤, 녀석에게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아싸!”
잽싸게 태블릿을 받아든 김연아가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보니 거의 10년 전에 방송됐던 것인데도 제법 재미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 너희 집 아니니까 좀 조용히 하고 봐. 안 그럼 예능이고 뭐고 없다?”
교무실에서 보는 것이니만큼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방송을 보느라 정신이 없던 김연아가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쳇, 너무해.”
“너무하긴. 너 숙젠 다 했어?”
내가 묻자, 김연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건 옛날에 끝냈죠!”
당당한 태도였다.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니 잔소리는 이쯤 해 두기로 했다.
“그래도 이것까지만 봐 알았지?”
“넹!”
사실 아까 토요일임에도 학원에 나온 김연아가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기에 틀어준 거였다.
원래는 기말고사 대비 문제를 풀게 하려 했지만.
‘으악! 심심하다고 했는데 문제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김연아가 기겁을 하기에 그만두었다.
하긴 시험이 아직 한 달 정도 남은 만큼 벌써 시작한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업무를 봐야 하니 진짜로 녀석과 놀아 줄 수는 없는 일.
그러다 보니 얼마 전 인터넷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결제해 둔 게 생각나, 혹시나 하고 틀어 주었다.
그런데 거의 십년 정도 지난 방송인데도 불구하고 내 예상보다 더 재미있게 보고 있다.
김연아가 소파에 앉아 다시 예능을 보기 시작하자.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지성 형님이 태블릿에 빠져 있는 김연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김 쌤, 예능도 봐?”
눈은 김연아를 향하고 있었지만 내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테스트 자료를 만들고 있던 은솔부터 정신없이 태블릿PC을 쳐다보고 있던 김연아까지.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내 평소 이미지가 어떻기에······.
하지만 뭐 예능이나 드라마를 잘 안 보는 것은 사실이었다.
딱히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시간도 부족했으니 만큼 굳이 챙겨서 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지금 김연아가 보고 있는 예능 방송을 결제한 것도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일한의 논술고사에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결제하지 않았을 테니까.
‘3번 문제만 아니었어도.’
USB에서 ‘2019년 한룡대학교 논술’ 문제를 처음 봤을 때 살짝 난감했다.
‘아니, 논술에서 왜 유재석이 나와.’
일반적인 논술고사의 문제 유형과 전혀 다른 유형의 문제였으니까.
[문제3] 마키아벨리의 을 기본으로 해서 예능 프로그램 의 리더 유재석을 논해 보시오. (50점, 750±50자)이런 유형의 문제는 소위 말하는 ‘공부벌레’를 가려내기 위한 문제였다.
원래 논술이라는 대입제도가 수능시험에서 평가하기 어려운 논리력, 사고력 등을 평가하자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현재 그 취지가 많이 변색되어 버렸기 때문이 나타난 문제 유형.
때문에 예전처럼 철학 서적만 들입다 파서는 예상치 못한 함정에 걸려 쉽게 넘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요즘은 논술을 준비하면서 사회적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드라마나 예능을 파악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안에 이뤄지는 것이던가?
그렇다고 갑자기 박일한에게 예능을 봐야만 한다고 예능을 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의도를 숨기고 그에게 예능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그냥 쓸 데가 있어서 결제했어요.”
내가 말하자,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평소에 내 이미지가 진짜 어떤 거야?
그렇게 잠시 평소 내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그건 그렇고 오늘 일한이 시험 본다고 하지 않았어?”
지성 형님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3시.
박일한이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시간이었다.
“네. 이제 슬슬 끝났을 시간인데요?”
내가 말하자.
“잘 봤어야 할 텐데. 요즘 논술이 워낙 어려워서.”
그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일한의 수학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 만큼 그가 걱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잘 봤을 거예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박일한이 시험을 잘 봤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 동안 해 온 게 있는데 잘 보지 못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그런데 그때.
“다녀왔습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방금 전 화제가 되었던 박일한이다.
한데?
사람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설마.
서둘러 뒤돌아보자, 흐린 표정을 짓고 있는 박일한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표정은···마치 수능 다음날 표정 같았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나를 엄습했다.
분명 녀석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풀 만한 문제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예의 그 ‘3번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반강제로 녀석에서 예능을 보여 주었다고 해도, 녀석이 그걸 떠올리지 못했다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
“일한아···너 설마?”
내가 말하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뿔싸.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위로하기 위해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장난이에요! 시험 잘 봤어요! 쌤 다 쌤 덕분이에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일한이 나를 덥석 나를 안았다.
그러자 교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와 박일한을 바라보았다.
녀석,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난은커녕 긴장을 늦추지 못하더니···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시험을 잘 본 것 같다.
* * *
잠시 뒤.
작은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져왔어?”
내가 말하자 박일한이 씨익 웃는다.
“쌤이 말씀하신 대로 가져왔죠.”
그리곤 등 뒤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녀석이 내민 것은 바로 하얀 A4용지.
언뜻 봐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는 것 같은 종이다.
하지만 이 보잘 것 없는 종이가 나와 박일한이 교실로 자리를 옮긴 이유였다.
삭삭삭-
박일한이 내민 종이를 받은 나는, 4B연필을 길게 깎아 A4용지에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지 상태였던 A4용지에 희미한 글자들이 나타났다.
내 작업을 바라보고 있던 박일한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쌤, 이거 신기한데요?”
나는 슬쩍 웃으면서 박일한에게 종이와 연필을 내밀었다.
“직접 해 볼래?”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각사각-
나는 작업에 심취해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종이를 두 겹으로 겹쳐서 펜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쓰면 밑에 있는 종이에 글씨 자국이 남는 것을 응용한 방법이었다.
사실 논술을 보고 나서 가채점을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수험생이 논술 답안지에 쓴 내용을 다 암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다 했어요!”
박일한이 복원을 마친 답안지를 내게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이 건넨 답안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빽빽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문은 랑 , 마키아벨리 이라고 했지?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들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박일한에게 문제를 물어본다.
그러자 박일한이 ‘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만요.”
휴대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아마 시험이 끝나자마자 문제를 메모해 놓은 것 같았다.
슬쩍 보니 USB에 나와 있던 문제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프린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전략)··· 주관적 위치의 아와 그 상대적인 위치의 비아가 역사적 시간과 공간속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상속성과 보편성이란 속성이 있어야 한다.]음, 내 예상대로 1번 문제와 2번 문제는 수월하게 넘어간 것 같았다.
그 두 문제의 경우 일반적인 논술형 문제였던 데다가 지문의 내용 또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집어놨었으니까.
문제는 3번이었다.
이 문제만은 박일한이 어떤 식으로 3번 문제를 풀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3번 문제를 보기 시작하자, 박일한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략)···리더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은 대중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리더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대중이 리더을 미워한다면 그 능력은 리더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때문에 리더는 자신의 권력을 파괴할지도 모를 악덕을 목도했을 때, 그 오명을 피할 방법을 알아야 하고, 정치적으로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은 악덕이라도 가급적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재석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리더의 모습에 부합하는···(후략)···]
나는 말없이 답안지를 일한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긴장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박일한의 얼굴이 무거워진다.
“쌤···별로에요? 어···어쩌죠? 그래도 마지막에 쌤이 보여 준 게 생각나서 쓰긴 했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한테 전화 드렸어?”
그러자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마치 낙하산 없이 하늘에서 뛰어내린 표정이다.
“아니요···아직···쌤 저 진짜 이번에 떨어지면 재수를···”
그리곤 고개를 떨군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표정만 봐도 뒷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수능을 망쳤을 시점에서 부모님이 재수를 강권했을 테니, 이젠 도망칠 방법이 없어 보이겠지.
하지만.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녀석이 해괴한 표정을 짓는다.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얼굴로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박일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합격이라고 말씀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