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9
9
009화 하룻강아지 그리고 전국연합학력평가 (1)
은은한 빛이 창문 너머에서 스며든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커피 잔 위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른다.
[···이제 탑승하러 갈 거야. 그 동안 가자가자 말만 하고 못 갔었는데 네 덕분에 애들이랑 가족여행도 떠나 보고··· 정말 고맙다. 너도 휴일인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생각하면서 쉬엄쉬엄해. 주말인데 푹 쉬고 다녀와서 보자.]“네 형님. 네네 저야 뭐 고등부 올라가기 전까지 준비만 하면 되니까요. 형님이야말로 이번 기회에 푹 쉬세요. 형수님이랑 여행 잘 다녀 오시구요. 네 그럼 제가 조만간 또 연락드릴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밝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형수님의 가벼운 핀잔과 수더분하게 대꾸하는 지성 형님의 목소리.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여행을 떠난 모양이다.
뚝-
전화를 끊자 귓가를 간질이던 소리들이 사라지고, 바쁘게 돌아가는 하드 디스크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커피 한 잔을 입에 머금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정리하던 고등부 자료 파일이다.
고등부 커리큘럼에 맞는 문법과 문학, 비문학 자료들.
수업이 없는 일요일을 맞아, 지난 5년간 정리해 왔던 자료에 살을 붙이는 과정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USB를 통해 어떤 문제가 나올지 안다고 하더라도 교과에 대한 이해와 자료 정리는 필수였으니까.
문법의 경우 중학교 문법의 기초정리에 심화 내용을 추가하고 활용문제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
이후 고전운문의 일반이론을 정리하고, 각 작품별 해설과 확인할 요소 등을 집어넣어 내용의 질을 확대시키는 등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언젠가 고등부 수업을 진행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만들어 왔던 자료들이었다.
그동안 휴일마다 틈틈이 정리해 오던 그 자료들이 이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날듯이 손이 움직이고 있던 참에, 지성형님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여행이라.’
그러고 보니 학교에 다닐 때 여행 다니는 걸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 가끔 생활이 힘겨울 때면 그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날마다 여행을 떠난 기분이 든다.
띠링-
[고등수학(내신, 모의고사)의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잔여 포인트 : 11]USB드라이브를 열자마자 떠오르는 알림창.
굳게 닫혀 있던 고등수학 폴더가 열렸다는 표시이자 내가 지성 형님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증거.
수학 문제집을 만들 때 ‘혹시나’하고 예상했던 것이 실제로 이뤄지자, 짜릿한 기운이 몸을 관통한다.
달깍- 달깍-
이제 USB의 해금 기준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바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
USB를 사용해서 타인이나 나의 삶에 직접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면, 그만큼 포인트가 차오르고 그 수치가 100을 넘을 때 잠겨있던 과목의 폴더가 열리는 방식인 듯싶다.
마치 게임의 경험치와 레벨 업 시스템처럼 말이다.
직관적인 방식이지만, 그 동안은 수치가 오르고 내리는 기준을 알지 못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이제 그 기준이 명확해졌다.
달칵-
폴더를 열자 학교별로 정리된 고등 수학 문제지들이 모습을 보였다.
먼저 해금된 폴더들과 같은 모습이다.
[OO고등학교, 2학기 중간고사, 수학]입가에 미소가 짙어질 수밖에.
삐빅삐빅-
알람 소리가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 * *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죠.”
이게 차린 게 없는 거면 임금님 수라상도 검소한 식사가 맞다.
내가 평소에 먹던 것들은 전투식량 정도고······.
듣도 보도 못한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 위에서 이름을 아는 것이라곤 너비아니와 신선로 정도밖에 없다.
그 외에 다른 음식들은 하나 같이 젓가락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정갈한 꾸밈을 갖추고 있는 것들 뿐.
맞은편에 앉은 김연아의 부모님과 내 옆에 있는 연아, 연수 자매는 내가 젓가락을 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슥-
수저를 들어 죽 그릇에 가져갔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죽의 온기가 유기 수저를 타고 손에 닿는 느낌이었다.
새하얀 죽이 혀에 닿는다.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밥알이 녹아 흐르고, 밥알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전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맛있네요.”
그 이외의 수식이 불필요한 맛이었다.
가정집에서 맛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맛.
전에 원장이 강사들을 강제로 이끌고 갔었던 미슐랭 스타 한정식 집에 뒤지지 않는 맛이었다.
근엄한 표정을 견지하던 김연아의 아버지가 슬며시 웃음을 내보였다.
그때서야 다들 음식을 들기 시작한다.
서로간의 대화는 거의 없는, 건조한 식사였다.
“한식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막 장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던 와중이었다.
김연아의 아버지가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원장 편으로 온 김연아 부모님의 초대를 수락한 이후에 김연아가 교무실로 쳐들어와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쌤, 쌤. 내일 우리 집 와요? 엄마가 선생님 뭐 좋아하시는지 물어보라던데?’
그때 대답하기 귀찮아 ‘한식이면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했었지.
김연아를 돌아보자 막 탕평채 한 젓가락을 집어 들고 있었다.
녀석이 왜 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마주보았다.
‘연아야, 그런데 이건 한식이라기보다는 만한전석(滿漢全席)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그래도 대답은 해야 했다.
“네 좋아합니다. 정말 맛있네요. 어머님의 요리 솜씨가 엄청나신데요.”
장김치를 꿀꺽 삼키고 대답하자 연아 아버지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다.
이 양반 무미건조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은근하게.
“귀한 분이 오신다고 해서 애들 엄마가 노력한 모양입니다. 아는 분들 중에 솜씨가 좋은 분이 계시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연아 어머니를 돌아보는 폼이 냉랭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훈훈하다.
그런데 마주 돌아보는 연아 어머니의 표정이 자못 수줍다.
뭐야, 이 양반들······.
내가 와서 오버하는 건가 싶어 연서, 연아 자매를 돌아보자 둘은 ‘또 시작이야.’ 하는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다.
아 원래 이러시구나.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는 두 분에게서 신경을 거두고 음식에 집중한다.
홍어같이 아예 못 먹는 음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음식이 내 입맛에 맞았다.
특히나 쇠고기 수육으로 짐작되는 요리가 내 입에 맞았는데, 여러 부위의 고기를 맞춤하게 익혀 낸 것이 아주 오묘한 맛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양지, 사태, 우설, 머릿고기와 각종 내장을 담박하고 정갈하게 썰어 낸 요리.
그중에서도 동그랗게 말린 부위가 유독 맛이 있어 계속 젓가락이 향했다.
쫄깃쫄깃하면서 약간은 쓴 오묘한 맛이 혀를 자극할 때마다 먹으면서도 침이 고였다.
“으··· 선생님 그거 맛있어요?”
그런데 연서와 연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연아는 뭔가 꺼려지는 표정을 짓고 있고 연서는 숫제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다시 한 젓가락 집어 들어 입에 넣고 씹자 자매의 안색이 뱀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래진다.
‘아직 애들이라서 그런가?’
사실 내 주변에도 다른 고기는 곧잘 먹으면서 내장 부위는 질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나이가 어릴 때뿐이었고, 그들도 나이가 조금 든 이후엔 식성이 변해 없어서 못 먹게 되었다.
“역시 선생님 드실 줄 아시는군요. 이게 애들 엄마가 제일 자신하는 요리죠”
김연아의 아버지도 한 점 집어 먹으며 말했다.
뭔가 동질감이 느껴지는 시선.
좀 전까지 보이던 경계심이 거의 사라진 투다.
“······?”
이쯤 되니 좀 불안해진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 음식은 나와 연아의 아버지만 먹고 있었다.
연아, 연서의 젓가락은 근처에도 안 가고 연서 어머니는 내가 먹던 것만 피해서 먹고 있다.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어머님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어머님, 이 고기는 어느 부윈가요?”
그런데 연아 어머니는 입가에 손만 살포시 얹고 대답이 없다.
대신 다른 곳에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우낭(牛囊)입니다. 남자한테 정말 좋은 부위죠. 이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니 집에서나 가끔 맛볼 수밖에 없죠.”
우낭(牛囊)?
소 우(牛)자에 주머니 낭(囊)? 우리말로 하면 소의 주머니······?
그때 확인사살을 하듯 연아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네, 불알입니다.”
아.
* * *
식사가 정리되고 후식으로 간단한 다과와 차가 나왔다.
연아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숙실과를 한 입 넣고 엷게 우린 녹차를 한 모금 마신다.
후우-
식사의 잔향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생전에 다른 생명체의 불알을 먹게 될 줄이야. 남자로서 뭔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후릅-
다시 한 번 차를 마시자 조금 남아있던 꺼림칙한 기운마저 씻겨 내려갔다.
“사실 오늘 선생님을 모신 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연아 성적도 많이 올랐고··· 전보다 말썽부리는 정도가 확실히 줄었으니까요.”
연서와 연아 자매가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고 난 뒤, 연아의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은 익히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원장의 입을 통해서도 들었던 이야기였으니까.
“···게다가 요즘은 그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도 보더군요. 부모 된 입장에선 연아가 지금처럼만 계속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겠지요,”
시험을 보고난 뒤 김연아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 전처럼 수업을 보이콧하는 경우도 없었고 아이들을 선동해 선생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도 사라졌다.
학원 내 언터쳐블 문제아에서 조금 발랄한 여중생 정도로 변화한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고등부로 자리를 옮기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에선 이미 기정사실화 된 이야기였다.
이번 시험이 끝나면 박훈과 내 자리가 바뀐다는 사실은 강사들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슈였으니까.
‘역시 과외 이야기인가?’
연아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았을 때 다음에 할 이야기라곤 그 정도밖에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연아 아버지의 입은 다시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처럼 지긋하게 자신의 아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지? 잠시 의아해지려는 그때.
“선생님, 저희 연아 계속 맡아 주실 수 없나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연아 어머니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식사 내내 은은한 미소만 띈 채 거의 말이 없던 분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학원 과외 형식이라면 제가 고등부로 옮긴 이후에도 가능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사실 김연아 덕분에 기회를 잡은 것도 사실이니까. 녀석과의 약속은 꼭 지킬 생각이었다.
그나마 요즘엔 좀 조용해져서 직접적인 문제는 만들 않았으니,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연아의 어머니는 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표정이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선생님. 저는 그런 걸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뭐지?
설마 내가 이대로 중등부에 주저앉아 달라는 것은 아닐 것이고.
“지금처럼 일주일에 두세 시간 봐 주시는 것 말고 개인적으로 봐 주실 수 없는지를 여쭤보는 거예요. 연아에게 들어보니 수학도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떠신가요?”
연아 어머니가 간곡한 어조로 이야기하니 단박에 거절하기 애매했다.
개인과외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거대한 바다를 앞에 두고 개울물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
이거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불알까지 얻어먹어 놓고 싫은 소리 하기가 좀······.
“······.”
내가 답을 않고 기다리자, 식탁 분위기가 어째 묘해진다.
침묵의 의도를 오해한 것일까?
연아의 어머니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면 될까요?”